[임진왜란의 경제사적 관점⑤] 가토군, 단천 은광을 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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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경제사적 관점⑤] 가토군, 단천 은광을 노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6.11.13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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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비 마련 위해 채굴 허가

원말(元末,) 명초(明初) 왜구는 중국의 해변과 강남(江南)에서 노략질했고,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타이완에 진출했다. 그들은 중국 해안과 동아시아 섬들을 거점으로 폭럭적인 방법으로 해상 교역을 추진했다. 그 무렵 포르투갈은 인도를 거점으로 서쪽에서, 스페인은 남미를 거쳐 동쪽으로 진출해 동아시아에서 만났다. 서양 세력은 왜구와도 부딛쳤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사고는 왜구적 경험에 이베리아 국가들의 세계관을 받아들여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동양에 진출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해양거점을 기반으로, 육지를 포위하고 교역하는 전략을 취했다. 이에 비해 대륙국가인 중국은 육지에서만 지배력을 형성하고, 해양을 포기함(해금령)으로써 해양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명사(明史)」 외국전에는 토요토미가 1586년에 “66주(州)를 정복하고, 류큐(琉球, 오키나와)와 루송(呂宋, 필리핀 루손섬), 셴루오(暹羅, 샴·태국), 포랑지(佛郞機, 포루투갈과 스페인령)등 여러나라를 위협하여 공물을 바치게 했다. 그리고 연호를 분로쿠(文祿.)로 고치고, 중국을 침략하고 조선을 멸망시켜 점유하려 했다. 예전의 왕직(汪直. 중국 남해안의 무역상)의 잔당을 불러 (중략) 그의 기세가 더욱 교만해졌다.”고 기록돼 있다.

도요토미가 류큐에서 필리핀, 중국 남해안을 거쳐 멀리는 인도차이나에 이르는 해상의 조공을 받으려 한 점, 베이징이 아닌 닝보(寧波)에 쇼군의 주둔지로 계획한 점 등에 비추어 해상거점을 통한 동아시아 지배를 꿈꿨다. 이를 기반으로 대륙세력인 중국(明)과 충돌했다.

명나라도 도요토미의 목표가 중국임을 알고 있었다. 도요토미에게는 조선을 거쳐 베이징으로 침공하는 방법, 16세기 중엽 왜구 침공로를 따라 절강·복건성등 중국 남해안을 직접 공격하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도요토미는 조선을 거치는 방법을 선택했다. 아마도 대규모 육군과 전쟁 물자를 수송해야 하는 지정학적인 문제를 고려한 것 같다.

조선 침공에 앞서 도요토미는 류큐 국왕을 위협해 칭신납공(稱臣納貢)을 요구하고,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던 필리핀에 세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 위협했다. 아울러 200여척의 배로 펑후(澎湖)와 타이완을 공격하도록 준비했는데, 명이 펑후에 방어망을 구축했기 때문에 좌절됐다. 일단 해상세력의 위협을 가라앉힌후 조선을 거쳐 육로로 명을 공격키로 한 것이다.

가토 기요마사의 구마모토성. 지난 4월 지잔으로 성벽이 무너졌다. /연합뉴스

1592년 4월 700여척의 왜선이 대마도에서 바다를 덥쳐 부산포를 침입했다. 부산 첨사 정발(鄭撥)은 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전사했고, 동래부에서 부사 송상현(宋象賢)이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했다.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 그는 도요토미의 가신으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함께 조선 침공에서 선봉경쟁을 벌였던 무장이다. 그는 일본 규슈의 히고(肥後, 구마모토)의 영주였다. 그는 도요토미로부터 조선침공 준비를 하라는 명을 받고 전비를 마련했다.

그의 전비 마련 과정을 보자. 구마모토(熊本) 근처에는 무역항인 나가사키(長崎)가 있는데, 그곳을 통해 필리핀 루손섬과 거래했다.

일본학자 나카지마 가쿠쇼(中島樂章)에 따르면 그 당시 가장 값나가는 교역품은 은(銀)이었다. 가토는 조선침공 직전인 1591년에 은과 밀 20만근(120톤)을 나가사키에다 팔라고 지시한다. 그는 영지에서 고율의 세금을 걷었고, 그렇게 해서 조달된 은과 밀을 필리핀 루손섬에 가져가서 조총과 실탄, 화약을 구해오도록 했다. 루손섬은 스페인령이었다. 당시 루손섬에 거주하던 스페인인들은 밀을 구하기 어려웠다. 중국에서도 식량난으로 밀이 부족했다. 루손섬에 수출된 가토 영지의 은과 밀은 루손섬에서 소화되거나 중국에 재수출됐다.

명나라가 1560년대에 중국 남해안에 민간무역을 허용한후, 복건성 상인들은 아시아 해역에 해상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하지만 명은 왜구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본과의 거래를 제한했다. 그럼에도 일부 복건성 상인들은 규수 일대에서 왜구와 밀무역을 했다.

1571년 포르투갈이 마카오와 나가사키 사이에 중계무역을 시작했다. 동시에 복건성 상인들은 명 조정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규수로 건너가 일본 은을 수입해 명 조정에 팔았다. 복건성 상인들은 필리핀 루손섬도 방문했다. 그들은 규슈, 루손섬을 잇는 삼각 무역에 종사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무역상들은 합법적인 교역을 했지만, 복건성 상인들은 밀무역에 종사했다.

이런 상황에서 규슈 일본상인들이 가토의 지시로 해외무역 주자로 나타난다. 임란 직전인 1590년대 루손-규슈 무역이 증가했다. 일본은 은을 수출하고 필리핀에서 금과 중국산 생사를 수입했다. 남미산 은 도입이 급증하면서 일본의 루손 수출품은 은에서 밀과 같은 소비재로 바뀌었다. 가토는 은과 밀을 팔아 루손섬의 스페인 상인으로부터 조총과 실탄제조용 납, 화약등을 대량 구매했다.

왜의 선봉장 가토에게는 은이 곧 무기였다. 조선에는 대규모 은광이 있었다. 함경도 단천(端川)이다.

조선은 초기부터 금·은등 귀금속 채굴에 힘을 기울였다. 1398년(태조7년) 군인들을 동원해 단천에서 금을 채굴했고, 경상도 안동, 황해도 등지에서 금과 은의 채굴을 시험해 보았지만, 단천 이외에는 경제성이 없었다.

태종은 1407년에 은의 채굴을 중지했는데, 그 이유는 은 채굴기술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실록은 적었다. 하지만 명나라가 금과 은을 조공품으로 바치라는 압력이 거세 이를 거절키 위한 것이 주된 이유로 파악된다.

그후 1503년(연산군 9년) 상민 김감불과 노비 김검동에 의해 연은분리법(회취법)이 개발됐다. 이에 단천은 은산지로 변모했고, 영흥등지의 납 산지에서도 은을 제련할수 있게 됐다. 하지만 조선 정부가 명나라 사신들에게 면포를 선물하면, 사신들은 평안도를 지나면서 은으로 바꿔 귀국하는 일이 빈발했다. 조선정부는 사신들을 통해 조선에서 은이 난다는 소문이 명나라에 전해지면 조공품으로 달라고 할 것을 두려워 중종때(1516년) 다시 단천은광을 폐쇄했다. 이후 일본이 오히려 조선에서 개발된 회취법으로 은을 대량생산하게 됐고, 조선은 일본에서 은을 들여오는 사태가 빚어졌다.

당시 세계 기축통화는 은이었고, 중국에선 세금을 은으로 걷었다. 그런 시기에 조선에서 개발한 기술로 은을 대량 생산했더라면 무역을 통해 많은 이문을 남겼지 않을까. 당시 조선 왕조는 은을 대량 생산하면 중국에 뺏긴다고 생각해 은 생산을 쉬쉬하고 광산을 폐쇄했다.

가토 기요마사

가토는 조선의 은 냄새를 맡은 것 같다. 일본 무역상들이 조선과 거래하면서 조선의 은 제련기술을 훔쳐가고, 중국 사신들이 선물로 준 비단과 포목을 은으로 바꿔 갔다는 소문을 당시 동아시아 무역을 쥐고 있던 중국상인과 왜상을 통해 들었을 것이다.

가토는 동쪽 공격로를 맡았다. 고니시 군이 평양에서 명군에게 발이 묶여 있을 때 가토군은 철령을 넘어 함경도로 달려갔다. 잉카제국을 무너뜨린 스페인 군인들이 원주민에게서 황금의 나라 ‘엘도라도’(El Dorado)의 소문을 듣고 남미 끝까지 뒤진 결과, 볼리비이에서 포토시라는 은광을 찾아냈다. 가토도 조선의 은광을 향해 달음질쳤다. 그는 단천의 소덕(蔬德)에서 은을 캐서 도요토미에게 진헌하고, 은광을 개발해 전비에 보태겠다고 보고한 바 있다.

하지만 가토의 단천 점령은 짧게 끝났다. 정문부등의 의병들이 일어서고, 명군이 빠르게 남하하자 가토군은 단천은광을 활용할 틈도 없이 남하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 군대는 조선 왕조에 주둔비로 은을 요구했다. 명나라는 앞서 몽골과의 전쟁에서 은을 유통시켰는데, 조선에서도 군수물자를 은과 교환하고자 했다. 이에 전란 발발 이듬해인 1993년 선조임금은 비변사의 청에 따라 단천 은광 채굴을 허락했다.

해양국가 일본은 해전에서 이순신장군에게 패하고, 오히려 육상전에서 승리했다.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은 제2차 포에니 전쟁의 한니발에 비견된다. 왜군은 대부분의 육상전에서 승리하면서 한반도 지역을 휩쓸었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이기지 못했다. 왜군이 한 일이란 살육과 파괴 말고는 없었다. 그들은 조선인을 대량으로 끌고 갔다. 그들 속에는 도공(陶工)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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