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경제사적 관점③ ] 동방무역서 대박난 유럽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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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경제사적 관점③ ] 동방무역서 대박난 유럽상인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6.11.11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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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포르투갈, 삼각무역에서 거대한 부 형성

[김인영 기자] 1498년 바스쿠 다가마가 이끄는 포르투갈 함대가 향신료를 찾아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처음으로 아프리카 동쪽 해안에 도달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무역활동을 하던 아랍인들의 안내를 받아 인도 캘리컷에 도착했다. 그들은 진짜 인도를 발견했다. 그 무렵 인도는 유럽보다 풍요로운 나라였다. 향신료 이외에도 캘리컷의 무명은 매우 고급품이어서 유럽인들들이 한눈에 반했다. 인도에서 가져온 무명이 유럽의 면직산업을 일으켰고,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됐다.

바스코 다가마 일행은 향신료와 무명을 가득 싣고 2년만에 리스본에 도착했다. 이들은 동양에서 가져간 물건으로 6,000%, 즉 60배의 이문을 남겼다. 출항할 때 선원 170명중 3분의1도 못되는 55명이 살아 돌아갔지만, 죽은 자의 목숨 값을 교역을 통해 톡톡히 받아낸 것이다. 리스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본 왜구가 전투를 치르면서 중국과의 밀무역을 감행한 것과 같은 이치다.

중세에 지중해 무역에서 향신료를 거래해서 얻는 이윤율은 40% 정도였다. 그것도 높은 이윤율이었다. 동양과의 거래에서 수십배의 이윤이 난다는 소식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모험가와 모험자본을 부추겼다. 돈 냄새가 나면 투기가 형성된다. 험난한 바다를 거쳐 동양의 산물을 손에 쥐었을 때 크게 한탕한다는 대박심리가 유럽을 흔들었다. 포르투갈은 1505년 인도 고아에 총독을 두고 식민지 개척에 나서 1511년 실론(스리랑카)과 말레이반도의 말라카를 정복했다. 이어 1515년 페르시아만 호르무즈를 점령함으로써 이베리아 반도에서 희망봉을 지나 동아시아에 이르는 대항로를 구축했다. 포르투갈은 중국 광동성의 거대한 비단시장, 말라카의 향신료 시장을 독점하며 거대한 부를 형성했다.

이때 경쟁자가 나타났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이끄는 스페인 함대가 3년간의 기나긴 항해를 거쳐 1521년 4월 필리핀에 도착했다. 포르투갈이 동쪽으로 항해해 동아시아에 왔다면 스페인은 서쪽을 돌아 동아시아에서 만난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무역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곳곳에서 두나라의 중계기지와 식민지가 형성됐다. 동남아의 향신료와 중국의 비단이 목적이었다.

마카오의 성 바울 성당

16세기 후반들어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중국, 일본과 무역 거래에 나섰다. 포르투갈은 1513년 마카오에 거주지를 확보하고 무역거점으로 삼았다. 1557년엔 마카오에 영구거주권을 획득하고 중국과 금, 은, 도자기등의 중계무역을 했다.

스페인은 1571년 필리핀 루손섬을 점령하고 마닐라를 건설해 동아시아 중국, 일본과의 무역 거점으로 삼았다. 스페인은 은 거래에 참여했다. 스페인은 남미 포토시(볼리비아)에서 생산된 은을 태평양을 건너 중국에 팔았다. 스페인은 중국과의 은 거래에서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16세기 후반에 중국이 수입한 은의 절반은 스페인, 나머지 절반은 일본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서양에서는 오랫동안 금과 은이 1대12.5의 교환비율로 거래됐다. 기원전 5,000년, 지금 이라크 땅인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줄기를 따라 수메르인들이 마을을 이루고 인류 최초의 문명을 일으켰다. 청동기 문명을 일으킨 수메르인들은 동전 주화인 세켈을 제조해 사용했다. 인류 최초의 화폐다. 성경에도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위해 세켈을 주고 묘지를 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 이스라엘 통화인 세켈도 여기서 나왔다.

수메르인은 강을 따라 무역활동을 하면서 큰 거래에는 금과 은을 사용했다. 그들은 금과 은의 교환비율을 천문학에서 찾았다. 그들에겐 금은 태양이요, 은은 달이었다. 수메르 천문학에선 1년에 달이 태양을 도는 비율을 1대12.5로 계산했다. 이 1대12.5의 비율을 금과 은의 교환비율로 정했다. 수메르인의 전통은 로마제국에도 이어져 금과 은의 비율이 1대12.5 또는 1대13을 유지했다.

이에 비해 중국에선 금과 은의 교환비율이 1대6이었다. 중국에서 은 값이 비싼 것은 세금을 은으로 받아 은의 수요가 컸던 탓도 있었다. 명나라는 북방(몽골)과 끊임 없이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국내산으로는 은이 절대적으로 모자라 해외에서 수입이 절실했다.

여기서 엄청난 이문이 발생한다. 즉, 유럽인들이 일본 또는 남미 볼리비아에서 생산된 은을 가져와 중국에서 금과 교환하면 100%의 환차익을 얻게 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인들은 해외에서 싼 은을 구해 중국에서 금으로 교환하고, 그 금으로 일본에서 은으로 바꾸고, 인도에서 면직, 말레카에서 후추를 사서 유럽으로 가져가면 엄청난 무역차액을 얻었다. 이른바 재정거래(arbitrage)에 의한 삼각무역이다.

 

동아시아 무역은 일본 왜구와 중국 사이의 밀무역, 새롭게 진출하는 스페인, 포르투갈등 유럽인들의 삼각무역이 경합하며 급성장했다.

중국의 최대 수출품은 생사(生絲)였다. 생사(raw silk)는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가공하지 않은 실을 말한다. 생사는 주로 농민들의 부업에서 생산됐고, 최대생산지는 양쯔강(長江) 이남의 강남 델타지역이었다. 그 지역에서 생산된 생사를 호사(湖絲)라고 불리며 수출됐다. 생사산업은 벼농사와 비교하면 높은 수입을 얻을수 있었다. 또 많은 토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따라서 가난한 중국 농민들은 생사업에 종사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전세계 은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다. 중국 명나라는 당시 가장 부유한 문명국이었다. 중국인들은 서양에서 가져온 물건에 큰 관심이 없었고, 대신에 유럽인들은 중국의 비단, 도자기에 탐을 냈다. 이 물건을 가져가기 위해선 은을 가져와야 했다. 스페인이 해외(남미)에서 개발한 은의 절반이 중국으로 들어갔다. 이 와중에 유럽인들은 국내외 환차익을 활용한 투기적 행태를 보이며 무역이득을 챙겼다.

16세기 후반, 동아시아에는 무역의 시대가 열렸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동시에 국가가 형성되었다. 타이의 아유타야 왕조, 자바의 마타람 왕국, 수마트라의 아체 왕국, 베트남의 레 왕조가 형성됐다. 이들 지배자는 무역 요충지를 장악하고 활발해지고 있는 국제교역을 활용해 큰 이익을 취함과 동시에 새로운 무기와 군사기술을 습득해 주변 세력을 통합해나갔다. 그리고 부족 중심의 연맹체를 강력한 왕권하의 절대주의 국가로 전환시켰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16세기 후반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등이 국제 무역세력을 흡수하고, 조총(鳥銃)등 신군사기술을 받아들여 일본을 통일한다.

1543년 샴(태국)을 떠나 명나라로 향하던 중국선 한척이 일본 규슈 남쪽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표류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포루투갈인이 뎃포(鐵砲)를 건네주었다 화승총의 일종인 조총이다.

이 새로운 무기는 일본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하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뎃포를 처음으로 접한 다네가시마 영주가 모조품을 만들었고, 전국 다이묘들이 앞을 다퉈 뎃포 제작에 나섰다. 일부 다이묘는 뎃포와 그 제작기술을 다른 영지에 전달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규정을 만들어 독점하려 했다.

전국시대 군웅들 가운데 뎃포 제작에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이 오다 노부나가였다. 그는 무역과 뎃포 제작의 중심지인 사카이(堺, 오사카) 지역을 장악하면서 전국을 지배할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그는 일본을 통일하기 위해 뎃포 부대 육성에 박차를 가했다.

1575년 5월 오다 노부나가의 군대는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 군대와 나가시노(長篠)에서 붙었다. 나가시노 전투는 일본 판도를 결정하는 중대한 전투였다. 다케다 진영엔 당시 최강으로 꼽혔던 기마대가 있었다. 다케다의 기병대가 용맹스럽게 돌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기병대는 오다 군이 설치한 전방의 목책에 걸려 허둥거렸고, 그 배후에 뎃포부대(조총수) 3,000명이 사격을 가해 제압했다. 다케다 기마대는 속수무책으로 1만2,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섬멸됐다.

나가시노 전투는 일본 중세 봉건시대를 마감한 것은 물론 동아시아의 역사도 바꿨다. 부하의 배신에 목숨을 잃은 오다 노부나가를 대신해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군대는 15년뒤 임진왜란에서 이 전투방식을 그대로 써먹었다. 조선군과 명나라 정예기마부대는 왜군의 3열 뎃포부대에 무너진 것이다.

나가시노 전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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