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리의 차(茶)인문다방] 조선의 차통(茶通)한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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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리의 차(茶)인문다방] 조선의 차통(茶通)한 가족
  • 김세리 차문화콘텐츠연구원장
  • 승인 2021.02.13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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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조들, 명절에 온가족 모여서 뭐했을까
차인가족 홍인모 일가, 한밤에 시 지으며 행복한 시간 보내
돌아가며 시 짓고, 짓기를 놓치면 벌주 마시며 즐겼을 것
김세리 차문화콘텐츠연구원장
김세리 차문화콘텐츠연구원장

[김세리 차문화콘텐츠연구원 원장] 해마다 명절이 돌아오면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얼굴 마주하는 것만으로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막상 그 귀한 시간을 어떻게 하면 알차게 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평소와 다른 특별 이벤트를 마련하자니 번잡스럽고 그냥 보내기는 좀 섭섭하다. 옛 선조들은 어떤 가족 모임시간을 가졌을까?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옛 선조들 가족모임을 엿본다

어느 저녁 흩어져 있던 온 집안 식구들이 오랜만에 모여 다회(茶會, 찻자리)자리를 마련하느라 분주하다. 유난히 달빛 좋은 저녁, 모임에 맛있는 음식이 빠질 수 없다. 가족들이 예전에 즐겨 먹던 추억 담긴 음식을 마련한다. 집안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비법으로 빚어 놓은 술은 마시기 딱좋게 익었다. 식구들이 다 함께 모이면 마시려고 남겨두었던 귀한 차도 끓일 준비가 다 되었다. 기분 좋은 자리니 거문고 연주 한 자락도 빠질 수 없지. 우리는 문장 짓기를 좋아하는 가족들이니, 붓글을 쓰려면 먹도 미리 갈아 두어야겠어. 오늘 쓸 화선지는 어디에 두었더라.

이곳은 조선의 문신 족수거사(足睡居士) 홍인모(洪仁謨,1755∼1812)의 집이다. 그는 성품이 소박하고 강직한 문장가로 그의 저서 『족수당집(足睡堂集)』에 고문과 시 2000여 편을 남겼다. 그의 부인과 자녀들도 글 쓰는데 있어서는 빼어난 능력자들이었다.

부인은 조선의 대표 여류 시인인 영수합(令壽閤) 서씨(徐氏)이고, 《유한당시고(幽閒堂詩稿)》를 지은 유한당 홍씨가 큰 딸 홍원주다. 그리고 지난 편에 언급했던 차마시는 왕의 사위, 홍현주가 이 댁 셋째 아들이다. 맏아들과 둘째아들인 홍석주, 길주도 당대 대단한 문장가다.

여러모로 자랑거리가 많은 집안이지만 가족 모두의 공통점이 있다면 차마시기를 특별히 좋아하는 차인 가족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차 관련된 기록이 문헌에 남아있다. 특이한 점은 개인 단독 기록 뿐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한 구(句)씩 지어 이를 모아 만든 한 편의 시로 지은 ‘연구(聯句)’가 있다는 점이다. 쉽게 생각하면 가족들이 시짓기 릴레이를 하는 것이다.

한 가족이 다 모여 차를 마시고 있는 모습.
한 가족이 다 모여 차를 마시고 있는 모습. 사진= 차인가족 유혜은님 제공

차인가족 홍인모 家, 시 지으며 명절 보내 

연구는 옛날 중국에서 시를 짓은 방법 중 하나다. 이것은 두 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각자 한 구절 또는 몇 구절을 이어서 짓는 방식으로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것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여러 신하들과 합작해 「백량시(柏梁詩)」를 지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런 형태의 글은 친목의 계회나 풍류의 자리에서 지어지는데, 가족 모임 자리에서 지어진 경우는 매우 드물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도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고 상상하면서 아버지 족수당이 되어, 혹은 아들 홍석주가 되어 감상해 보자.     

<연구(聯句)>

아버지 족수당 : 비 개인 후 떠오른 달 밝으니.

어머니 영수합 : 성긴 발에 구름 그림자 어리고, 멀리서 온 손님은 흥에 겨워.

큰 아들 석주 : 맑은 달빛 좋기도 하네, 허공이 밝아지니 하늘은 넓고 넓어.

둘째 아들 길주:  이슬 내려 꽃을 적시네, 누각은 허공에 솟았고.

큰 딸 원주: 뽀족한 산봉우리엔 달이 걸렸네,  구름 걷힌 하늘엔 고요함만이.

셋째 아들 현주: 별들은 나무사이에 걸렸네,  걸어 논 등잔에 밤은 깊어지고.

족수당: 바람소리 피리소리 뚜렷이 들리는데,  서로 만나 기뻐 환하게 웃고.

영수합: 둘러앉아 서로에게 취해 즐거워하네. 붓들 들어 좋은 시 짓고.

석주: 이루지 못하면 벌주를 마셔야 하네. 계단 둘레엔 아름다운 나무 둘렀고.

길주: 갖추어진 음식들은 옛 맛 그대로네. 차가 익으니 시심(詩心)이 일고.

원주: 거문고 맑은 소리 고운 손에 울린다. 가족들의 이 즐거움.

현주: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젖어드는데. 하늘 쳐다보니 은하는 기울었는데.

족수당: 이 기쁨 영원하길 달 보고 빈다네.

『족수당집(足睡堂集)』 홍인모 

 
당주원집
홍인모가 지은 족수당집의 '연구(聯句)>'  원문

예나지금이나 가족의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지금 이 가족들 마음이 얼마나 행복하고 풍요로운지 시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돌아가며 시를 짓고, 짓기를 놓치면 벌주를 마시게 하고, 그러면서 서로 깔깔 거리며 웃었을 것이다.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서로의 웃음 속에 있지.

음식을 먹으며 옛 추억을 떠올리고, 흥겨움 중에 향기롭고 따듯한 찻잔을 중간중간 기울인다. 차를 마시면 배불리 먹은 음식 소화도 잘 되고, 머리는 한결 맑아지니 좋은 글귀는 자연스럽게 떠오를 것이다. 숙취해소의 기능까지 있으니 차가 가지고 있는 효능이 동시다발적으로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거문고 소리는 분위기를 더욱 그윽하게 만들고, 가족의 정은 차곡차곡 깊어지는 중 그야말로 차로 소통하는 차통(茶通)한 가족이다.

예나 지금이나 가족이 모두 모이는 시간. 참 귀한 시간이다. 명절이나 잔치, 생일 아니면 소소한 중요한 날에 향기로운 찻잔을 사이에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추억을 만드는 이벤트는 어떨까.

차례(茶禮)상에는 예전에 그러했듯 조상님께 차를 올리고, 식구들끼리 차를 나누는 마시는 문화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문화이다. 지금의 우리 어린 가족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어린 날 추억의 음식자리를 피자와 햄버거에게 빼앗기지 않기를. 두 손에 마주 잡은 녹차 한잔의 추억을 지금이라도 다시 만들어 주는 건 어떨지. 푸른 빛 소망을 담아 기원해 본다.

● 김세리 차문화콘텐츠연구원 원장은 성균관대학교 철학박사, 초빙교수로 동아시아 차문화 연구와 한국 현대 다법 및 차문화 콘텐츠를 다각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차분야별 후학을 양성하고 있으며, 동아시아차문화연대기 <차의 시간을 걷다>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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