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리의 차(茶)인문다방] 차 마시는 왕의 사위, 홍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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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리의 차(茶)인문다방] 차 마시는 왕의 사위, 홍현주
  • 김세리 차문화콘텐츠연구원장
  • 승인 2021.02.01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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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엔 육우의 '다경', 조선엔 초의선사의 '동다송'
정조의 사위 '홍현주', 차에 대한 호기심으로 저술 요청
왕가 신분에 시·서·화 즐기며 100여편의 다시(茶詩) 짓기도
김세리 차문화콘텐츠연구원장
김세리 차문화콘텐츠연구원장

[김세리 차문화콘텐츠연구원장] 중국 최고 차문헌으로 육우의 『다경茶經』을 꼽는다면, 한국에서는 초의선사(草衣禪師) 의순(意恂)의 『동다송東茶頌』을 최고로 친다. 차의 역사와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동다송 내용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홍현주라는 인물이 '다도茶道'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싶었기에 초의선사가 이를 집필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요즘 관점에서 보면 보통 전문서나 명저(名著)는 당대나 후대를 위해 정리하거나 집대성되었을 것 같지만 때로는 아주 생뚱맞게 탄생하기도 한다. 시로서 조선의 다도를 설명한 글인 동다송은 어쩌면 ‘홍현주’ 단 한사람을 위해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정조대왕의 사위 '홍현주'

홍현주(洪顯周1793-1865)는 정조(正祖)대왕 둘째딸 숙선옹주와 혼인해 영명위(永明尉)에 봉해졌다. 호는 해거재(海居齋), 약헌(約軒)이다. 왕의 사위인 부마(駙馬)가 되었기 때문에 본인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중요한 벼슬자리에 나아갈 수 없었다. 그 대신 한직으로 지내며 시문, 서화 그리고 풍류를 즐기는 삶을 살았다.

당시 차 생활에 심취해 있던 자하 신위(紫霞 申緯), 초의선사, 다산 정약용 등과 가까이 지냈으며, 중국을 왕래하는 가까운 친척이나 사신들을 통해 중국차와 고급스러운 차문화를 접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자하는 19세기 시·서·화의 삼절로 널리 이름을 알린 인물이다.

홍현주는 서신을 통해 다우(茶友)들과 교류하며 차와 관련한 이야기를 나눴다. 다도(茶道)에 대해 자세한 내용이 궁금했던 해거재 홍현주는 북산도인(北山道人) 변지화(卞持和)를 매개로 초의의 『동다송東茶頌』이 태어나게 만들었다.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이 동다송과 함께 동봉한 초의의 서간 내용에 보인다.

근자에 북산도인(北山道人)의 말씀을 들으니, 다도(茶道)에 대해 물으셨다더군요.
마침내 옛 사람에게서 전해오는 뜻에 따라 삼가 「동다행(東茶行」 한 편을 지어 올립니다.
말이 분명하지 않은 곳에는 해당 본문을 베껴 보여 하문하시는 뜻에 대답합니다.
홀로 진부한 말로 어지럽고 번거롭게 하여 균청(鈞聽)을 모독하고 보니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혹여 남겨둘 만한 구절이라도 있겠거든 한 차례 가르침을 주시는 노고를 아끼지 마십시오.
(초의가 홍현주에게 동다송과 함께 동봉했던 서간의 내용. 동다행의 행은 송의 원문 오타로 밝혀짐.)

초의선사는 신분이 높았던 홍현주에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동다송'이라는 차의 역사서를 지어 올리게 된다.

정조대왕의 둘째 사위 홍현주가 그린
정조대왕의 둘째 사위 홍현주가 그린 소림모옥도.

눈 물[雪水]로 끓인 차

홍현주가 초의에게 차에 대해 물은 것은 1837년의 일이다. 동다송 서문에서 해거재 홍현주가 차를 잘 몰라서 초의에게 물었다고 오해하는데 그런 건 아니다. 그는 이미 그전부터 차생활을 하고 있었고 더 깊이있게 알고 싶었을 것이다.

차에 조예가 깊었던 홍현주는 계절에 맞는 차생활을 즐겼다. 이렇게 눈이 내리는 겨울날이면 하얀 눈을 녹여 차를 즐기기도 했다. 맑고 차가운 눈을 녹여 끓이는 차는 겨울에만 즐길 수 있는 멋스러움이었다. 1823년에 지은 「섣달 눈 녹인 물로 차를 끓이다(臘雪水烹茶)」 라는 다시(茶詩)를 보자.

겨울12월 계미 납일.

남창 아래에서 한낮이 되도록 잠을 잤구나!
구름이 대나무 문에 잠겨 찾아오는 이 없고
눈이 매화나무 집을 둘러 속세와는 떨어졌네.
흰 깁으로 봉한 옛 상자를 가져다가
보이차고(普洱茶膏), 월단(月團) 차를 꺼내고
편지를 펴보니 천리 밖 그대 얼굴
연남 땅 친구의 마음이 담겨 있네.
모난 구슬 둥근 구슬 곳곳마다 떨어지고
마른 소나무 늙은 홰나무 마구 소리를 내네.
오지화로 수탄(獸炭)에 불이 붙기를 기다리는데
돌냄비의 끓는 물거품 솔바람 소리 들리네.
아이종에게 맡기지 않고 몸소 달이느라
머리 위 오사모는 반이나 기울었네.
꽃무늬 자기에 담아 오니 아름다운 빛 있고
한 사발 마시니 갑자기 답답한 가슴 열리네.
통정(桶井)과 미천(尾泉)은 오히려 둘째이니
차갑게 빼어난 맛 갈증 풀기에 알맞네.
병 많은 이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차 마시는 일이니
내년을 기다려 남겨서 넣어두네.

멀리 중국 연남(燕南)에서 벗이 보내준 보이차고(普洱茶膏), 월단(月團)차를 꺼낸다. 특별히 귀한 차를 골라 보내주었으니 차도 정성껏 끓인다. 그냥 물이 아닌 특별히 눈 녹인 물을 사용한다. 공해문제로 눈비 맞는 걸 질색하며 피해 다니는 우리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시에는 눈 녹여 차 마시는 일은 무척이나 멋스러운 일이었나 보다.

돌냄비에 물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며 내는 물거품, 솔바람 소리 모두 정겹다. 평소처럼 심부름 하는 아이에게 시키지도 않고 자신이 몸소 직접 차를 달인다.

홍현주의 글씨.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홍현주의 글씨.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타국의 벗을 그리워하며 끓여 마시는 차 한 잔. 왕가의 사람이었지만 권력에서 멀었던 홍현주의 최고 즐거움은 차 한 잔에 있었다. 차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조선 최고의 차문헌 『동다송』 탄생의 숨은 배경이 됐다. 그는 평생을 차를 즐겼으며 100여편이 넘는 다시(茶詩)를 남겼다. 학문에도, 정치에도 뜻하는 바를 모두 접고, 모든 잡념을 지우고 집중했던 것은 오직 차 마시는 일이었다.

● 김세리 차문화콘텐츠연구원 원장은 성균관대학교 철학박사, 초빙교수로 동아시아 차문화 연구와 한국 현대 다법 및 차문화 콘텐츠를 다각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차분야별 후학을 양성하고 있으며, 동아시아차문화연대기 <차의 시간을 걷다>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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