核강대국 소련은 경제 문제로 붕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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核강대국 소련은 경제 문제로 붕괴됐다
  • 김인영
  • 승인 2016.02.10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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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실패, 민족갈등이 핵보다 파괴적…군비경쟁 하다 경제 파탄

 

1991년 해체된 소비에트연방(소련)은 핵강대국이었다. 소련은 2차 대전 이후 서방 진영과 대결하며 동서냉전체제를 이끈 공산권의 종주국이었고, 핵무기 보유량에서도 미국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러던 소련이 핵 전쟁이 아닌 내부의 문제로 붕괴됐다. 초강대국 소련을 붕괴시킨 요인은 바로 경제문제와 민족문제였다.

북한이 새해벽두부터 핵실험에 이어 장거리미사일 발사를 감행해 우리나라는 물론 국제사회를 들쑤셔놓았다. 이 와중에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국민 삶에 대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아무리 핵을 개발해도 결국 와해될 수밖에 없다. 북한은 과거 소련의 경험을 잘 인식해야 한다. 소련이 핵이 없어서 국가가 무너진게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 와해 또는 궤멸을 거론하면서 소련의 붕괴를 예시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인 1990년 경제수석을 맡아 정부 대표단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방문해 경제협력을 논의하는 도중에 1991년 소련 붕괴를 목격한 그로서는 핵보유와 경제가 함께 갈수 없는 문제임을 직시한 것이다.

1917년 11월 7일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소련은 1991년 8월 쿠데타와 그후 일련의 선언과 협정으로 종언을 고했다. 소련은 한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74년째 무너졌다. 1945년 북한 정권이 탄생한지 올해로 70년이 넘었다는 점에서 공산국가의 핵경쟁이 얼마나 무모한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핵강대국 소련이 어떤 과정을 거쳐 붕괴되었던가.

 

서방과의 군비경쟁에서 경제 위기 초래

소련 붕괴의 씨앗은 경제 위기였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련은 강력한 중앙통제 경제를 실시하며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후 소련은 GNP 규모에서 미국 다음가는 산업국가로 발전했다. 1950년대말에 서방학자들 사이에 소련이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는 견해도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1985년 권력을 잡았을 때는 소련은 20년이상 경제성장률이 하락하고 있었다. 성장의 주축이었던 값싼 원료, 풍부한 노동력, 계획에 의한 집중 투자기회가 1970년대 중반에 바닥을 드러냈고, 미국과 유럽의 산업 생산력에 따라잡을수 없을 정도로 뒤쳐졌다.

또 대외정책 목표달성 수단으로 군사력에 의존했기 때문에 서구와의 군비경쟁, 해외동맹국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지원은 소련의 경제적 부담을 더욱 가중시켰다. 미국과 동등한 군사력의 건설을 위한 노력이 소련 경제위기를 초래한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베트남 원조에서 오는 경제적 피로와 평균 GDP 20%에 육박하는 국방비 지출은 소련경제를 수렁에 빠트리게 했고,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대륙간탄도탄 개발을 골자로 한 SDI(전략방위계획) 프로그램을 발표하자 소련은 안간힘을 썼지만 미국과의 군사력 격차가 커져가게 됐다.

소련 경제체제의 특징은 스탈린 시대 이래 중공업 우선 정책이었다. 중공업에 국가의 재원을 대거 할당하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소비자재 생산에 대한 투자는 낮은 순위을 두었다. 이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과의 군비경쟁 탓이 컸다. 군사력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중공업을 우선시해야 했다.

그러나 군비 경쟁을 위한 중공업 위주의 경제는 브래즈네프 집권기인 1970년대부터 둔화현상을 보였고, 붕괴직전인 1991년에 마이너스 17%의 성장을 기록했다.

소련 경제는 1970년대 중엽을 기점으로 적신호가 나타났다. 1960~70년대 전반까지도 연평균 5~7%를 보이던 공업성장률이 1970년대 후반에는 3.4%로 떨어졌다. 농업의 경우에는 1970년대 전반부터 정체현상을 보였다.

경제성장은 정체됐지만, 국민들의 소비수요는 급증했다. 그간의 지속적인 성장과 사회 안정은 국민들의 기대 수준을 크게 부풀렸다. 하지만 중공업과 군수산업에 치중해온 소련경제는 국민들의 소비재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브레즈네프 정부는 소비재 생산을 늘리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나, 구조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다. 생산재 부문과 소비재 부문의 격차는 오히려 벌어져 갔다. 농업부문에서도 식량은 자급할 수준이었지만, 육류 소비 증가에 맞추기 위해 식육 생산을 늘리면서 사료 수요가 급증해, 한때 곡물 수출국이던 소련이 곡물 수입국으로 변했다.

1970년대 말, 소련경제의 위기는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피부로 느낄 정도가 됐다. 그러나 타성에 젖은 관료들은 이 위기를 실감하지 못했다. 1973년 중동전쟁 이후 두 차례의 유류파동으로 석유가격이 폭등하면서 세계 최대의 석유수출국이던 소련에 오일 달러가 대거 유입돼 일시적은 풍요를 누렸지만, 내적으로 곪아가는 경제 위기를 일시에 은폐했을 뿐이었다.

폐쇄적인 관료들은 위기를 은폐하고 오히려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지하경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국가재산이 빼돌려져 암거래됐고, 서방에서 밀수입된 상품들이 지하에서 고가로 거래되기 시작했다.

공산당내 '노멘클라투라'라는 특권계급이 형성됐다. 적대계급이 사라졌다는 공산 사회에 새로운 계급이 형성된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지위와 특권을 유지하는 데 급급하며 부패한 관료주의를 만연시켰다. 공업화가 진전되면서 형성된 전문직 종사자를 비롯한 중간층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서방국가와 비교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들어 경제성장률은 사실상 제로 상태로 떨어졌고, 생산성도 격감했다. 행정·명령형 경제체제와 관료주의로 인한 물자의 낭비와 비효율성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국민들은 경제위기를 피부로 느끼면서 불만을 표출했다.

소련 경제에 구조적 문제가 드러나는 와중에 1983년 여름, 노보시비르스크 지역의 자슬라프스카야 등 연구자들이 중앙집권 계획경제의 문제점을 지적한 「노보시비르스크 경제보고서」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중앙집권 계획경제의 문제점을 ①경제 의사결정의 과도한 중앙집권 ②생산계획 책정의 일방적·명령적인 성격 ③ 미약한 시장 발전 ④ 노동에 대한 중앙 규제 등 8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요약하자면, 기업활동이 중앙관료기구에 의해 질식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노보시비르스크 보고서」는 개혁논쟁의 출발신호 역할을 하며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브레즈네프는 1982년 11월 76살의 나이로 죽었다. 후임에는 68살의 전 KGB(국가보안위원회) 의장 안드로포프가 취임했지만, 1984년 2월에 사망했다. 뒤를 이어 74살의 체르넨코가 서기장에 올랐지만, 1년을 넘기지 못했다. 체제위기의 절정에서 1985년 3월, 54살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당 서기장이 됐다.

 

뒤늦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개혁파의 리더인 고르바초프는 고질적인 경제정체를 깨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개혁)과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주창했다.

1987년에 고르바초프가 직접 쓴 책 『페레스트로이카』에 소련의 위기에 대한 그의 진단과 해결책이 잘 제시돼 있다. 고르바초프는 이 책에서 소련경제의 병폐로 ▲원재료의 낭비와 비효율성 ▲신기술의 도입 지연 ▲중앙집중관리의 경직성 등을 열거했다. 고르바초프는 위기의 근원을 소련 사회주의의 특수한 결함, 그중에서도 특히 경제관리의 과도한 중앙집중, 인간이해의 다양성 무시 등에서 찾았다. 즉, 소련체제의 가장 큰 결함은 민주주의의 결여이며, 그 해결책은 사회의 모든 면에서 민주화를 확대하는 것이라는 진단이었다.

경제개혁에서 고르바초프는 두 방향을 제시했다. 첫째는 기업 경영을 포함한 경제제도의 민주화였고, 둘째는 경제에 시장요소를 더 많이 도입하는 것이었다.

1989년 3월 사실상 자유경선을 통해 연방 인민대의원 선거가 실시됐는데, 이변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향유해온 공산당과 정부의 간부들이 무려 87명이나 낙선했다. 옐친은 모스크바의 한 지역구에서 89%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개혁과 개방은 새로운 위기를 초래했다. 자유화의 바람을 타고 쿠즈바스· 돈바스 탄전지대의 광부를 비롯한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고, 그루지야와 발트 연안 3개 공화국에서 탈연방 독립운동이 거세졌다. 대중들에게 페레스트로이카의 효과가 느껴지기 이전에 지배체제 이완을 틈타 소수민족들의 독립욕구와 노동자들의 요구가 분출된 것이다.

1989년엔 동유럽에서 극적인 사태전개가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루마니아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났다. 고르바초프는 동유럽에 대한 불간섭 정책을 고수하며 사태를 묵묵히 관망했다.

 

자유화 바람 타고 공화국들의 연방이탈 가속화

아울러 연방구성 15개 공화국이 실세화하는 추세가 뚜렷해졌다. 발트 3국이 1990년 3월 리투아니아의 독립선언을 계기로 탈소 독립운동을 가속화했고, 이제까지는 소련 내에서 실체 없는 러시아 공화국은 보리스 옐친이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한 후 주권선언을 했다. 모스크바에 소련과 러시아의 이중권력 상태가 출현했다. 연방이 위기에 처한 것이다.

▲ 옐친을 커버로 한 타임지 1991년 8월호

동유럽의 대변혁은 부메랑이 되어 소련으로 되돌아왔다. 시장경제의 도입 요구가 거세지면서 자본주의를 선호하는 목소리가 높아갔고, 발트 연안 3개 공화국을 중심으로 탈소 독립운동이 열기를 더해갔다. 날로 격화되는 민족운동은 직접적으로 소련체제를 위협하는 문제로 부각됐다.

소련은 본래 120여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였다. 인구의 약 절반이 러시아인이고, 우크라이나인과 벨로루시인을 합친 슬라브계가 약 70%이다. 연방구성 15개 공화국은 원칙적으로 민족단위의 공화국이고, 연방구성 공화국들 안에도 20개의 민족 단위 자치공화국이 있다. 이 많은 민족들을 하나로 묶은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라는 이념과 소련 인민으로서의 평등성이었다.

하지만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시행으로 그동안 잠복해왔던 민족문제가 폭발적 양상을 띠면서 표출된 것이다.

1991년 8월 18일 소련공산상 보수파들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고르바초프의 권한을 박탈하고, 크림지역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그를 체포했다. 하지만 쿠데타 발생 몇 시간 뒤 옐친은 시민들에게 불법 쿠데타 반대를 촉구한뒤 러시아 공화국의 통제권을 장악했음을 선언했다. 곧이어 발트 3국등 여러 연방국들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러시아·벨라루스·우크라이나등 슬라브계 세 공화국의 지도자들이 민스크에 모여 소비에트 연방의 소멸을 선언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이 조치가 위헌이라 저항했지만, 결국 소련 대통령직을 사임함으로써 15개 공화국은 모두 독립했다. 그해 12월 24일 소련은 지구상에서 그 자취를 감추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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