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리의 차(茶)인문다방] 방랑 차인 매월당 김시습과 무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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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리의 차(茶)인문다방] 방랑 차인 매월당 김시습과 무량사
  • 김세리 차문화콘텐츠연구원장
  • 승인 2021.01.18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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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금수강산 주유한 뒤 '무량사'를 마지막 거처로
차나무 키우고, 지인들과 차 즐겨...작설과 용봉단차 마시며 위안
'꿈을 꾸다 죽은 늙은이' 매월당, 코로나와 혹한에 지친 현대인에 '차 벗'
김세리 차문화콘텐츠원장
김세리 차문화콘텐츠원장

[김세리 차문화콘텐츠연구원장] 차 한잔이 유난히 향기롭게 느껴지는 날이면, 문득 그 차향을 함께 할 친구 하나 불러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이렇게 차의 인연을 오래도록 함께 나누는 사이를 차친구, 차벗, 다우(茶友)라고 부른다.

스마트폰으로 연결하면 바로 만날 수 있는 차친구도 있지만, 대면할 수 없는, 다른 시대의 다우도 있다. 과거의 선대차인들이 그렇다. 전혀 만날 수 없는 건 아니다. 그들이 가꾸었던 차나무 잎을 지금 우리가 따서 마시고 있으니, 차나무라는 연결고리를 두고 그들과 우리는 차의 이야기, 다담(茶談)을 나누고 있는 셈이다. 다른 시대를 살고 있지만 같은 향취를 가진 그들을 만나는 일은 설레기까지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의 작가인 김시습(金時習, 1435~1493년)은 세조에게 밀려난 단종에 대한 신의를 끝까지 지키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자연에 은거한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매화향 달빛 그윽한 매월의 차인이기도 하다.

부여 무량사 극락전과 5층석탑.
부여 무량사 극락전과 5층석탑. 사진= 차인연합회 답사

차향이 머무는 무량사

고즈넉하고 맑은 기운이 흐르는 부여 만수산(萬壽山) 기슭 무량사(無量寺). 사비성 정림사 탑을 빼어 닮은 오층 석탑이 세월흐름도 잊은 채 자리하고 있다. 백제를 추억하게 하는, 장엄한 듯 너그러운 극락전은 그 존재만으로 방문자에게 깊은 위로가 된다.

극락전은 석등과 석탑을 품고 있는 형상으로 아늑한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한다. 조선 중기의 건물인 극락전은 밖에서 볼 때는 2층 구조지만, 내부는 통층으로 된 보기 드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전각의 조형미도 아름답지만 처마 밑 공포가 백미이다. 소의 혀 모양이라 해서 ‘쇠서’라고 하는 공포의 끝부분이 아름다워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공포 栱包: 우리나라 전통목조건축에서 처마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대는 부재다.)

만수산 무량사. 여덟 가닥의 산줄기가 연꽃 모양으로 퍼져 만수산이라 했다. 산자락은 그저 편안하게 둥근 모습으로 세상을 안아주는 형상이다. 무량사는 한없이 편안한 절이다. 산도, 절도, 나무도, 오래된 탑도 모두가 무난하고 편안하다. 무량사가 특별한 이유는 절의 정취를 만나는 것도 좋지만 이곳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선대차인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매월당 김시습 초상화.
매월당 김시습 초상화. 사진= 구글

차나무를 직접 키우고, 차를 만들어 지인들과 나누는 것을 즐겼고, 돌샘의 물을 길어 작설(雀舌)과 용봉단차(龍鳳團茶) 마시는 것을 마음의 위로 삼으며 살았던 매월당 김시습.

그가 마지막에 머물렀던 곳이 바로 무량사다. 매월당은 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눈 녹인 물로 차를 끓이며 운치를 즐겼고, 무겁고 번거롭지만 돌솥을 쓰며 차에 대한 애정을 쏟았다. 그렇다면 매월당은 어떻게 이곳 무량사를 찾게 되었을까?

김시습은 18세에 송광사에서 선정(禪定: 불교수행법중 하나라 마음을 쉬는 공부)에 드는 불교입문을 했다. 그 후 삼각산 중흥사로 들어가 공부하던 중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을 폐위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오열했다. 의리없고 득세에 눈먼 자들과 함께 할 수 없다고 결심했던 그는 가지고 있던 책을 모조리 불지르고 세상을 등졌다. 그리고는 출가해 천하를 주유하였다.

1465년(세조11년) 경상도 금오산에 들어가 '금오신화'를 쓰고, 오세암에 머물면서 선수행을 하며 유불선을 넘나들었다.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세상에 쓴소리를 퍼붓기도 했다. 

당시 세조의 작당 한명회가 '압구정'에 정자를 지어놓고 ‘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라는 시를 한 글자씩 고쳐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靑春亡社稷 白首汚江湖)라고 조롱한 일화가 유명하다. 퇴락한 세상 속에 고단한 날들을 보내던 김시습은 무량사에 이르러 비로소 세상에 대한 마음의 무게를 내려놓는다.

무량사 뒤쪽 한편에는 청한당(淸閒堂)이 자리한다. 인적없이 한적하고 아담한 곳이다. 매월당이 무량사(無量寺)에서 말년에 머물렀던 공간으로 이곳에서 입적하였으니 그가 떠난 지도 어느덧 오백년 세월이 더 흘렀다.

매월당은 59세 나이에 열반에 들면서, 자기가 죽거든 다비(茶毘: 불교식 화장장례)하지 말고 절 옆에 3년 동안 묻어두었다가 그 후에 정식으로 다비해 줄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승려들이 시신을 절 옆에 가매장했다가 3년 뒤 무덤을 열었더니 시신이 살아 있는 사람과 똑같았다. 깜짝 놀랄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부처가 되었다고 믿었다.

매월당 김시습의 사리. 사진=연합뉴스
매월당 김시습의 사리. 사진=연합뉴스

이에 다비를 거행하고 사리를 수습하여 무량사 경내 부도에 모시게 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때 폭풍우로 나무가 쓰러지면서 탑도 함께 넘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이 일로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된 사리는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관된다. 매월당 사리는 박물관 전시가 아니라 무량사 그 안에 있어야 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있어야 하는 제자리에 있을 때 빛을 발한다. 긴 시간의 소요 끝에 2017년 박물관에 소장되었던 매월당의 사리는 원소장처(願所藏處)인 무량사로 반환되었다.

매월당의 영정각

매월당 김시습에 올리는 차 한잔.
매월당 김시습에 올리는 차 한잔. 사진= 김세리 교수

무량사 영정각에 가면 매월당을 만날 수 있다. 그의 초상이 담담하게 걸려있다. 수묵담채의 영정에는 패랭이 모자에 야인의 옷을 입고 꼭 다문 입과 깊은 눈매가 인상적이다. 그의 기상과 굳센 의지가 영정에 그대로 담겨있다. 세월을 거슬러 선대차인과 교감할 수 있는 시공간을 가질 수 있다니 너무나도 설레고 감사한 일이다. 영정에서 온화한 미소가 비추어지는 듯하다.

매월당은 금수강산을 떠돌다 무량사에서 마지막을 보냈다. 세상 어느 곳을 다녀보아도 이만큼 온화한 곳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묘비에 ‘꿈을 꾸다 죽은 늙은이’라고 적어 달라는 말을 남겼다. 그가 꿈꾸었던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무엇일까? 시대는 달라도 근본은 같지 않았을까?

혹독하게 추웠던 어느 겨울 매월당은 차한잔 마시며 다시(茶詩) 한수 남긴다. 코로나로 이래 저래 우리의 겨울도 그 어느 해보다 혹한이지만 맑은 차 한잔 기울이며 매월당을 차벗 삼아 보는 건 어떨까.

 

오래도록 앉아 있어도 잠 못 이루어
한 치 남은 촛불 심지 베어내었네.

서릿바람 소리 내 귀에 들려오더니
싸락눈 침상머리에 떨어졌네.

마음이 물과 같이 깨끗하니
자유자재하여 막히고 걸림이 없네.

이것이 바로 사물과 나를 잊은 것이니
혼자서 잔에 차를 따라 마신다네.

坐久不能寐 手剪一寸燭

霜風聒我耳 微霰落床額

心地淨如水 脩然無礙隔

正是忘物我 茗椀宜自酌  <매월당집>

● 김세리 차문화콘텐츠연구원 원장은 성균관대학교 철학박사, 초빙교수로 동아시아 차문화 연구와 한국 현대 다법 및 차문화 콘텐츠를 다각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차분야별 후학을 양성하고 있으며, 동아시아차문화연대기 <차의 시간을 걷다>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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