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리의 차(茶)인문다방] 이상적, 세한도 품고 중국으로 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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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리의 차(茶)인문다방] 이상적, 세한도 품고 중국으로 튀다
  • 김세리 차문화콘텐츠연구원장
  • 승인 2021.01.01 10:3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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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들고 중국 지인들에 감상평 받았던 이상적
흥선대원군에게 '용단승설' 얻자 스승에 선물보내 '존경' 표해
'승설' 차맛 못잊은 추사 "유배중인 스승을 제자가 챙기니..." 감격
김세리 차문화콘텐츠연구원장
김세리 차문화콘텐츠연구원장

[김세리 차문화콘텐츠연구원 원장] 세한도(歲寒圖)를 펼친 이상적(李尙迪)은 무척 고무되었다. 그토록 존경하는 스승 추사로부터 전해온 편지글을 보니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린다. 오직 자신을 위해 써내려간 글자 하나하나에 마음이 뭉클해진다. 혼자보기 아깝다. 하루라도 빨리 중국으로 가지고가 지인들에게 보여주면 얼마나 부러워할까. 혼자서만 이 감동을 느낄 수 없지. 이상적은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솟아오르듯 중국으로 튀어가게 된다.

추사 김정희와 역관 이상적의 인연...귀한 차 섭렵한 이상적

이상적은 역관이었다. 1829년부터 죽기 전 해인 1864년까지 열두 번에 걸쳐 중국을 다녀왔다. 한양에서 연경까지 3000여 리에 달하는 긴 여정은 한번 길을 떠나면 반년은 족히 걸리는 길이었다. 오가는 길은 험했고, 길 위의 노숙은 흔했다. 그런 날에는 불 지펴 차 끓여 마시는 일이 유일한 위로였다. 그날의 여정과 속마음은 그가 저술한 문집 <은송당집>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국보 180호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일부
국보 180호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일부

 

금석산 해가 저물 무렵에 내리는 눈(金石山暮雪)_ <은송당집>

압록강 어귀에 눈이 내리니 흩날려 먼 여행길 전송한다네.
본디 마음 천리나 떨어져 있어 흰 머리털 하루아침 생겨나누나.
나그네 옷 무거움을 점점 깨닫자 가야 할 길 분명함이 외려 슬프다.
오늘 밤 들판에서 잠을 자면서 차 끓여 마심만 다만 좋아라.

은송당집과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던 이상적 초상.
은송당집과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던 이상적 초상.

오가는 여정은 고되지만 차를 즐기는 차인으로서는 운이 참 좋았다. 조선에서는 경험하지 못하는 중국의 명차(名茶)를 두루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저술 속에는 다양한 차이름이 등장한다. 녹차를 비롯해 승설(勝雪), 백산차(白山茶), 죽로차(竹露茶), 무이차(武夷茶), 강남어차(江南御茶), 부사산차(富士山茶), 송차(淞茶), 녹설아(綠雪芽), 소용단(小龍團), 두강차(頭綱茶) 등 귀하다는 차들을 섭렵했다.

700년된 차 '용단승설', 흥선대원군에게 얻다

가장 좋은 차와 책을 먼저 선점하는 것은 당시 선비들에게 있어 커다란 '로망'이었다. 지금의 얼리어답터(early adopter)가 신제품에 재빠르게 반응한다지만 당시 금방 필사된 책과 차를 선점하는 파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랄까.

보통 그 귀한 것들은 자신을 출세길로 인도해줄 누군가에서 바치거나 아니면 정말 귀한 인연에게 선물로 전해진다. 이상적은 누구에게 주었을까? 제주 유배중인 스승 김정희에게 전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변방의 추사에게.

그 내용은 세한도 발문(歲寒圖跋文)에 자세히 적혀있다.

 세상의 도도한 풍조는 오로지 권세가와 재력가만을 붙좇는 것이다. 이들 책을 구하려고 이와 같이 마음을 쓰고 힘을 소비하였는데, 이것을 권세가와 재력가들에게 갖다 주지 않고 도리어 바다 건너 외딴섬에서 초췌하게 귀양살이 하고 있는 나에게 마치 세인들이 권세가와 재력가에게 붙좇듯이 안겨주었다. 사마천(司馬遷)이 “권세나 이익 때문에 사귄 경우에는 권세나 이익이 바닥나면 그 교제가 멀어지는 법이다” 하였다.

그대 역시 세속의 거센 풍조 속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이다. 그런데 어찌 그대는 권세가와 재력가를 붙좇는 세속의 도도한 풍조로부터 초연히 벗어나, 권세나 재력을 잣대로 삼아 나를 대하지 않는단 말인가? 사마천의 말이 틀렸는가?(하략)

추사 김정희가 제주에 유배되어 지내던 유배지. 사진=김세리 원장
추사 김정희가 제주에 유배되어 지내던 유배지. 사진=김세리 원장

이상적은 책뿐 아니라 최고의 차도 추사에게 선물한 걸로 보인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충청도 덕산현으로 묫자리를 보러 갔다가 가야사의 5층 석탑에서 고려 때 불상과 불경, 사리와 침향, 진주 그리고 용단승설 네 덩어리를 발견한다. 사방 2.35㎝, 두께 1.2㎝ 내외 크기의 네모난 떡차였다. 그중 한 덩이를 이상적이 얻는다.

차를 사랑했던 그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어떠한 이유로 그 귀한 차가 오랫동안 숨어 있었는지 연원을 추적하여 용단승설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기록하여「기용단승설記龍團勝雪」이라 이름지었다.

용단차 한 덩이는 한 면에 용의 형상을 만들어, 비늘과 수염이 은은히 일어났다. 승설(勝雪)이란 두 글자가 있는데 해서체의 음각문이다. 건초척(建初尺)으로 가늠해서 사방 한 치이고, 두께는 그 절반이다. 근래 석파 이공께서 호서의 덕산현에 묏자리를 살피러 갔다가 고려 시대의 옛 탑을 찾아가 소동불과 니금 경첩, 사리와 침향단 및 진주 등과 용단승설 네 덩이를 얻었다. 근래 내가 그중 하나를 얻어 간직했다.

구양수의 '귀전록歸田錄'을 살펴보니, “경력 연간에 채군모(채양)가 처음으로 소품룡차를 만들어 바치면서 소단이라 했다”고 했다. '잠확유서潛確類書'에는 “선화 경자년에 정가간이 은선빙아(銀線冰芽)를 처음 만들었다. 사방 한 치의 새 덩이차를 만들었는데, 작은 용이 그 위에 꿈틀꿈틀 서려 있어 이름을 ‘용단승설’이라 했다”고 했다. 또 '고려도경'을 살펴보니 “고려의 토속차는 맛이 쓰고 떫어 도무지 마실 수가 없다. 다만 중국의 납차와 용봉사단만을 귀하게 여긴다. 직접 하사품으로 받은 것 외에 장사꾼도 통상하여 팔므로 근래 들어 자못 차 마시기를 좋아하고, 또한 차 도구도 갖추었다”고 했다.

대개 인종 때에는 이미 소룡단이 있었던 것이다. 다만 승설이란 이름은 송나라 휘종 선화 2년에 비롯되었다. 하지만 서긍은 선화 5년에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온 사람이다. 중외의 풍속과 물산에 대해 이미 낱낱이 다 듣고 보았던 까닭에 이처럼 말했던 것이다. 또 고려의 승려 의천과 지공, 홍경과 여가의 무리가 앞뒤로 바다를 건너 도를 묻고 경전을 구하려고 송나라를 왕래한 것이 계속 이어졌으니, 문헌에 기록이 남아 있다.

이때 이들의 무리가 반드시 다투어 이름난 차를 구입해서 불사(佛事)에 바쳤고, 심지어는 석탑 안에 넣어두기까지 했다. 7백여 년이 지나서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은 또한 기이하다 하겠다. 하지만 무릇 물건 중에 가장 쉽게 부패하여 없어지는 것으로 음식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런데도 두강차의 한 종류가 우리나라 땅에까지 흘러 전해져서, 그 수명은 흰 매를 그린 그림과 나란하고, 보배로움은 수금천보(瘦金泉寶)보다 더 낫다(내가 전부터 선화 연간의 매 그림과 숭녕중보 몇 매를 소장하고 있는데, 바로 휘종 황제가 직접 쓴 수금체다). 지금에 이르러 예림(藝林)의 훌륭한 감상거리가 되니, 어찌 신물(神物)이 이를 지켜 남몰래 나의 옛것 좋아하는 벽을 도우심이 아니겠는가? 이에 전거를 뒤져서 동호인에게 공개한다.

차의 표면에는 용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고 700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차는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대원군으로부터 얻게 된 용단승설차는 귀하디귀한 보물과 같은 것이었다. 이상적은 스스로 옛것을 매우 좋아하는 자신에게 신이 이를 지켰다가 보내주었다고 표현했다.

중국 북송시대 휘종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그에게 휘종 때 마시던 차가 온 것은 정말 행운이었을 것이다. 휘종의 용봉단차는 웅번의 '선화북원공다록'에 ‘용원승설(龍園勝雪)’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차는 아마도 용원승설을 말하는 듯하다.

중국서 승설차를 맛봤던 추사에게 선물 

용봉단차는 중국 송대 황제의 차였으므로 황제의 다원 북원에서 만들어져 황제에게 진상된다. 황제는 이 차를 신하들과 귀족들에게 하사했으며, 외교적인 하사품으로 사용했다. 송의 황제들은 고려에 용봉단차를 보냈다. 고려왕은 다시 대신들에게 이 귀한 차를 하사한다. 용봉단차 중에 북송 휘종 때 만들어진 것이 용봉승설이다.

그렇다면 이 귀한 차를 이상적은 어떻게 했을까? 귀한 차이니 만큼 귀한 사람과 함께 공유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왕이면 그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 바로 스승 추사였다.

이상적의 스승 추사는 젊은 날에 청에서 맛본 차 맛을 내내 잊지 못했다. 추사는 완원의 서재인 쌍비관에서 승설차를 맛본 후 차에 매료되어 자신의 호를 ‘승설도인(勝雪道人)’이라 했을 정도니 말이다. 이상적의 귀한 용단승설차는 추사에게 간 것으로 보인다. 추사의 글에 송나라때 만든 기이한 보물 소용단 한덩이를 얻었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세한도 특별전
지난해 11월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세한도 특별전'에 전시된 세한도.

이상적과 김정희의 사제의 연은 애틋하고 돈독하다. 이제 그들은 없지만 세한도는 이야기와 함께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다.

그 당시 세한도의 사연에 감탄하며 청나라의 문인과 학자 16명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감상평을 붙였고, 한국 문사 4명까지 더해 15m에 육박하는 장편의 드라마가 되었다. 지난 11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시작된 ‘한겨울 지나 봄 오듯-세한·평안’ 특별전은 ‘세한도(歲寒圖)’ 스토리의 정점을 찍은 전시라 할 수 있다.

미술품 소장가 손창근 선생의 사회 기증과 더불어 2020년 <국보 제180호 세한도>는 그 누구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 되었다. 세한도 속에는 역사의 향기, 차의 향기 그리고 사람의 향기가 함께 녹아 있다.

● 김세리 차문화콘텐츠연구원 원장은 성균관대학교 철학박사, 초빙교수로 동아시아 차문화 연구와 한국 현대 다법 및 차문화 콘텐츠를 다각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차분야별 후학을 양성하고 있으며, 동아시아차문화연대기 <차의 시간을 걷다>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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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용 2021-01-02 16:24:36
차에 대한 그런 깊은 이야기가 있었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세상에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살아 가자고 마음이 담겨 차와 세한도에도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