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와 혁신기업]⑤ 금융공황도 극복한 2차산업혁명 조율사 J.P.모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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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혁신기업]⑤ 금융공황도 극복한 2차산업혁명 조율사 J.P.모건
  • 이영원 미래에셋대우 이사
  • 승인 2020.12.2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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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원 미래에셋대우 이사] J.P.모건은 미국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19세기말~20세기초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투자가였다. 

지난 글에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제네럴 일렉트릭이라는 거대기업의 실질적인 지배자 이기도 했던 은행가로, 산업과 금융, 경제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다.

미국의 주요 투자은행이 대부분 유태계 자본으로 과장되게 알려져 있지만 앞선 세대 유럽의 로스차일드와는 달리 J.P.모건은 웨일스에서 초기에 미국으로 이주한 가문의 후손으로 성공회 신자이다.

은행업은 J.P.모건의 아버지 주니어스 모건때 시작되었다. 상당한 유산을 물려받았던 주니어스 모건은 영국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은행가 조지 피바디와 동업으로 피바디-모건을 운영했다. 독신이었던 피바디가 은퇴한 이후 J.S.Morgan & Co.로 회사명을 바꾸고 아들 J.P.모건과 함께 경영을 이어갔다.

모건 부자는 남북전쟁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등에서 큰 부를 이룰 수 있었다. 런던의 J.S.모건과 뉴욕을 담당했던 J.P.모건 사이에는 일주일에 두번씩 전신으로 정보 보고가 오갔고 이를 바탕으로 금 투자, 미국 국채발행,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패자인 프랑스 전쟁배상금을 위한 국채발행 주선 등으로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J.S.모건의 사후에 런던의 은행도 물려받은 J.P.모건은 뉴욕에서 J.P. Morgan & Co.을 굴지의 은행으로 성장시킨다.

젊은 시절의 J.P.모건. 사진=위키피디아

중앙은행의 역할을 대신했던 J.P.모건

은행가로서의 정점의 영향력을 발휘한 사건은 1907년 금융공황의 수습이었다. 알렉산더 해밀턴의 제1차중앙은행(1791~1811)과 제2차중앙은행(1816~1836) 이후, 중앙은행이 없었던 1907년 공황의 위기를 민간 은행가인 J.P.모건이 해결했던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유나이티드 코퍼의 주식을 매집했던 니코보커신탁이 유나이티드 코퍼사 주가가 폭락하며 파산했던 일이었다. 니코보커신탁의 파산은 신탁사들의 연이은 파산 압력으로 이어졌다. 중앙은행이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금융공황의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최대 은행가였던 J.P.모건의 역할이 절실했다. 미국 재무부에서는 J.P.모건에게 2500만달러를 지원하며 위기 수습을 당부했다.

J.P.모건은 뉴욕의 은행과 신탁은행 등 금융계의 의견을 모아 아메리카신탁에게 구제금융을 제공하고, 뉴욕증권거래소의 현금부족 사태를 콜자금 공여로 해소했으며, 뉴욕 어음청산 결제소의 지급을 보증하고, 뉴욕시의 부도사태를 해결했다.

이어 테네시석탄철강철도회사(TC&I)의 주가하락으로 야기된 증권사, TC&I의 파산을 막기위해 US스틸의 TC&I 인수를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반독점법 위반 혐의를 해소하기 위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면담해 동의를 얻어냈다.

일련의 과정을 2주만에 마무리해 본격적인 금융공황을 사전에 수습함으로써 은행가 J.P.모건의 영향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민간은행이 중앙은행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금융위기를 해소한 것이다.

J.P.모건이 은행가로서 최고의 영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후광 뿐 아니라 성장하는 미국 산업에 개입하고 투자하며 실력을 키웠기 때문이다.

런던에서의 은행업이 미국 주정부의 채권이나 철도회사의 주식 등을 해외에 판매하는 ‘상인은행(Merchant Bank)’에 국한되어 있었다면 뉴욕의 J.P.모건은 산업에 직접 투자하고 지배력을 행사하는 보다 적극적인 방식의 사업을 벌여 나갔다.

철도 투자는 J.P.모건의 초기 산업투자의 대표적인 예이다. 대규모 자금이 필요했던 철도회사들에게 대출을 해주던 J.P.모건은 철도회사들의 지나친 경쟁으로 수익성이 악화되고 파산위기에 몰리는 사례를 보고 개입을 단행한다.

대표적으로 뉴욕 센트럴 철도와 웨스트쇼어 철도 사례가 있다. 두 회사는 뉴욕에서 오대호까지 노선을 나란히 운영하며 극심한 경쟁을 펼쳤다. 결국 수익성이 악화되면서 웨스트쇼어 철도가 파산에 이르게 되자 J.P.모건은 양사의 경영자를 자신의 유람선에 초청, 허드슨강을 오르내리면서 경쟁을 해소하는 타협을 종용한다.

이어 파산한 철도회사를 대상으로 은행부채를 인수해 새로 설립한 회사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을 시도했는데, 이를 '모거니제이션(Morganization)'이라 불렀다.

은행에 의한 워크아웃을 의미하는 모거니제이션을 통해 이리철도, 체사피크-오하이오철도, 필라델피아-래딩철도, 산타페, 노던퍼시픽, 그레이드노던, 뉴욕센트럴, 리하이밸리, 저지센트럴, 서던레일웨이 등이 새롭게 개편되었다. 전체 철도의 1/6이 모거니제이션을 거쳤고 1/3 이상이 J.P.모건의 영향력 하에 편입되었다.

미국 철도, 철강산업 재편 주도하며 막강한 지배력 행사

철도에 이어 J.P.모건은 철강산업도 재편에 성공한다. 몇몇 중소형 철강사를 규합해 페더럴 철강회사를 설립한 이후, 미국 최대 철강사였던 카네기제철을 인수하고 록펠러 소유의 철강사까지 인수해 시장지배력이 65%를 넘어서는 세계 최대 철강회사를 구축했다.

지나친 경쟁이 산업의 수익성을 떨어뜨리고 효율을 저해한다고 보았던 J.P.모건의 산업계 투자는 경쟁을 해소하고 규모의 경제를 구현해 막대한 이익을 거둘 수 있게 했다.

철도, 철강 뿐 아니라 통신(AT&T), 전기(GE), 농기계(International Harvester), 해운(International Mercantile Marine Co.) 등 다양한 산업에 투자했다. 록펠러가 지배했던 석유를 제외한 주요 산업은 대부분 J.P.모건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었고 주력 기업들은 각 산업의 선도기업이 되었다.

산업계에 대한 막대한 지배력, 영향력은 셔먼 반독점법의 타겟이 되었고 갈등은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J.P.모건은 오늘날 투자은행(IB)의 전형을 보여주었던 기업가였다. 사진은 뉴욕에 있는 J.P.모건 본사 건물. 사진=로이터/연합뉴스

하지만 J.P.모건은 대형 은행을 넘어서 경제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2차산업혁명이 진행중이었던 미국의 경제발전에 투자를 통해 직접적인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투자은행(IB)의 전형을 보여주었던 기업가가 J.P.모건이었던 것이다.

J.P.모건의 모든 것이 순조롭지는 못했다. 금융공황을 수습한 이후, 민간은행의 과도한 영향력에 대한 견제심리로 인해 1913년에 새로운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를 낳았고 해운업 진출을 위해 조직한 트러스트 IMM(International Mercantile Marine Co.)은 해양주권의 빼앗기지 않으려는 영국의 견제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1912년 IMM 산하의 화이트 스타 라인에서 건조한 초호화유람선 타이태닉호는 처녀 항해 도중 침몰하는 비극을 맞았고 IMM도 파산의 위기에 빠진다.

반독점법의 타겟이 된 J.P.모건은 미의회 하원의 푸조위원회의 조사를 받게 되었고 1912년 청문회에도 불려나가게 된다. 이후 건강이 급속히 악화된 J.P.모건은 1913년 생을 마치게 된다.

 

●이영원 이사는 연세대 경제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마쳤다. 대우증권에서 리서치 업무를 시작해 푸르덴셜투자증권, 현대차투자증권에서 투자전략을 담당했다. 미래에셋대우에 합류한 이후 해외주식 분석업무를 시작, 현재 글로벌 주식 컨설팅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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