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동열의 콘텐츠연대기] ㉑ ’굿즈’와 ‘덕질’의 기원 –스타시스템의 탄생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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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열의 콘텐츠연대기] ㉑ ’굿즈’와 ‘덕질’의 기원 –스타시스템의 탄생 (상)
  • 문동열 레드브로스대표
  • 승인 2020.12.11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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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영화 등장 후 30여년 만 오락거리가 된 영화
무성영화, 1920년대 황금기 정점찍고 사라져
스타 시스템 중심은 ‘여배우’들의 등장
여배우들에게 ‘덕질’을 하기 시작한 대중들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오피니언뉴스=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현대 콘텐츠사(史)에 있어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는 영화산업. 그 영화 산업의 타임라인을 몇 개의 큰 시대로 나눴을 때, 첫번째로 등장하는 시대의 분기점이 바로 무성영화와 토키 (유성영화)의 분기점이다. 

연대로 보면 뤼미에르 형제의 첫 영화 상영이 있었던 1895년부터 첫 유성영화가 나온 1927년까지 32여년의 시간이다.

영화사에 있어서 무성영화 즉 사일런트 필름 (Silent Film)의 시대라 불리우는 시기로 1세대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스타 시스템의 탄생

첫 영화가 상영된지 30여년이 지나면서 영화는 전 세계적인 오락거리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 종전되고, 그 동안 전쟁으로 인해 억눌러왔던 사람들의 욕구가 한번에 분출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힘입어 1910년대 초반에 시작된 무성 영화의 황금기는 1920년대 들어 극에 달했다. 1920년대를 무성영화의 황금기라 부르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이 시기의 세계 영화 산업을 선도하는 것은 미국이었다. 할리우드라는 새로운 터전을 확보한 미국의 영화 산업은 전 세계 영화 자본들이 모이는 곳이 되어갔고, 영화 산업은 점점 현대 영화 산업의 모습을 서서히 갖추기 시작한다. 기획, 제작, 배급, 저작권 관리, 글로벌 배급 등 현재도 사용되는 영화 산업의 시스템의 대부분이 이 시기 만들어졌거나 정착이 되었다. 

영화 엘리자베스 여왕의 사랑 (1912)에서 열연 중인 사라 베른하르트(우측 첫번째).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영화 엘리자베스 여왕의 사랑 (1912)에서 열연 중인 사라 베른하르트(오른쪽 첫번째). 사진출처=위키피디아.

그 중에서도 이 시기 가장 주목할 부분은 영화 산업에 있어 스타(Star) 시스템이 정착되기 시작했다는 점에 있다. 스타 시스템이 정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전까지 영화의 한 부분으로만 생각돼 왔던 배우라는 직업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사랑을 받고 더 나아가 배우가 영화의 전체 시스템을 종속시킬 수 있는 그런 모습이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자들은 이 시기 생겨난 스타 시스템이 ‘스타 비지니스’라는 새로운 비즈니스 영역을 만들어 냄과 동시에 스타들을 통해 현대 매스미디어가 빠르게 확장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한다.

즉 현대 콘텐츠 산업 자체가 현재의 모습으로 성장하게 된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 공식은 지금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일례로 유튜브를 보면 알 수 있다. 유튜브 역시 ‘유튜버’라는 스타 시스템을 통해 성장했고, 이로 인해 발생한 개인 방송 붐이 유튜브를 세계 최강의 미디어의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서론이 조금 길었지만, 이번 편에서는 이런 무성 영화의 황금기를 이끈 무성 영화의 스타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다들 흑백 무성 영화의 스타라고하면 당연히 찰리 채플린을 떠올린다.

그는 부인할 수 없는 세계 영화사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이며, 그가 만든 많은 것들은 현대의 영화 아니 콘텐츠 산업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오늘 소개할 사람은 주인공보다는 조연에 가까웠던 ‘여배우’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할까 한다.

무성 영화 시대를 주름잡았던 여배우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의 스타 시스템의 기반이 어떻게 성장했고, 자리를 잡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여배우’의 역사만든 '사라 베른하르트'

최초의 여성스타 사라베른하르트.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최초의 여성스타 사라베른하르트.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여배우라는 단어가 차별적이라는 논란도 있었지만, 19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여배우는 정말 차별의 대상이었다. 사실 여성들이 무대 위에 서게 된 역사는 그리 오래지 않다. 일부 사회에서 배우는 남자들만 될 수 있었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연극 무대 등에서의 여성의 역할은 아주 제한적이었으며, 영국에서 세익스피어의 연극들이 상연될 때 여성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남성들이 연기했다.

여성의 사회적 권리가 거의 없다시피 한 시기였기에, 여배우라는 직업 자체는 아주 천한 직업이었고, 많은 수의 여배우들은 실제 창녀들이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여배우가 매춘을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한국의 기생이나 일본의 게이샤와 같이 사회적 통념 상 여성들이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들이 꺼려지는 상황에서 보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스러운 매춘부들이 연기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러다 19세기 후반에 들어 여성들의 사회적 권리가 커지며, 직업적으로 배우를 선택하는 여성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사상 최초의 ‘스타 여성 배우’로 부를 수 있는 사라 베른하르트 (Sarah Bernhardt)다.

사라 베른하르트는 ‘여배우 (Actress)’라는 직업에 대한 편견들이 여전히 남아있던 19세기 중반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나 사람들의 주목과 인기를 한 몸에 받은 현대적 의미의 ‘최초의 유명 여성 스타’다.

1844년에 프랑스에서 태어난 그녀는 연극 무대를 통해 처음 연기를 하게 됐으며,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연극 ‘춘희 (La Dame aux camélias)’를 통해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감정적인 연기에 능했던 그녀는 사람들에게 ‘포즈의 여왕과 제스처의 공주’라는 별칭을 받으며, 인기를 끌었다. 그녀의 인기는 이전의 연극 무대에서 다른 남자 배우들이 누렸던 인기와 주목과 흡사했지만, 그녀는 조금 달랐다. 

새로운 미디어와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베른하르트가 가장 좋아했던 신 기술은 사진이었다. 초상 사진의 거장이라 불리우던 나다르 (Nadar)와 함께 다양한 초상 사진을 촬영했으며, 이 사진은 포스터나 엽서의 형태로 대중들에게 소비됐다.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굿즈’들인 셈이다. 프랑스 파리의 사진 스튜디오들은 그녀의 사진을 인화하여 사람들에게 팔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은 (특히 남성들) 그녀의 사진을 사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 바햐흐로 ‘덕질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팬들이 배우에게 꽂다발을 바치거나, 찬사를 보내는 그런 행동들 외에 어떤 스타의 이미지를 ‘상품’으로 만들어 이를 소비하는 행위, 이것이야말로 현대 스타 시스템의 핵심으로 사라 베른하르트는 이러한 현대 스타 시스템의 기원을 만들었다고 할만하다. 

유명한 초상사진가 나다르가 촬영한 사라 베른하르트 (1865년 作). 사진출처=위키피디아.
유명한 초상사진가 나다르가 촬영한 사라 베른하르트 (1865년 作). 사진출처=위키피디아.

자신의 외모와 이미지가 대중들에게 어떻게 소비되고, 받아들여지는 지 잘 이해한 베른하르트는 본업인 연극을 비롯해 사진, 영화에 그림과 조각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엄청난 부와 명성을 차지했고 이는 곧 ‘여배우’라는 직업 자체를 천한 여자들이나 하는 직업에서 뭇 남성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는 ‘화려한 직업’으로 변신시킨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 변화는 재능있고 아름다운 수 많은 여성들을 배우라는 직업에 뜻을 가지게끔 만들었고, 이로 인해 20세기 초반 무성 영화의 황금기와 함께 ‘여신급’ 인기를 누리는 여배우들이 탄생하게 된 근간이 됐다. 

 특히 그녀가 영화 산업에 끼친 영향도 막대하다. 그녀는 당시 유명한 연극 배우 중에서 처음으로 영화에 진출한 배우로 기록되어 있다.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처음 상영한 직후, 뤼미에르의 촬영 기사들이 그녀의 연극 무대를 방문했고, 그녀는 자신의 연극 무대를 ‘영상화’하는 것을 승인했다.

사라 베른하르트가 의도를 하고 현대 스타 시스템의 탄생에 큰 업적을 남긴 것은 아니겠지만, 신 기술을 받아들이는데 거리낌이 없는 이러한 베른하르트의 행보는 초기 ‘듣보잡’ 기술이었던 영화가 빠르게 대중화되는데 큰 기여를 했고, 그녀가 남긴 이 유산은 현대 콘텐츠 산업에 있어 빠질 수 없는 핵심적인 산업의 한 부분이 되었다. (다음 편에는 무성 영화 황금기를 이끈 무성영화들의 여신들을 차례로 소개합니다).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는 일본 게이오대학 대학원에서 미디어 디자인을 전공하고, LG인터넷, SBS콘텐츠 허브, IBK 기업은행 문화콘텐츠 금융부 등에서 방송, 게임,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 기획 및 제작을 해왔다. 콘텐츠 제작과 금융 시스템에 정통한 콘텐츠 산업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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