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의 과학과 철학] 사람 여기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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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의 과학과 철학] 사람 여기 없소?
  • 정연섭 '크로의 과학사냥' 저자
  • 승인 2020.12.08 11:4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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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라는 원형은 있을까, 관념으로만 있는 것인가
과학은 DNA 통해 '보편자 원형이 존재한다'는 실재론 뒷받침
우리는 보편 유전자로서 사람을 존중하고, 고유 유전자로서 그의 역량을 기대한다
정연섭 '크로의 과학사냥' 저자
정연섭 '크로의 과학사냥' 저자

[정연섭 '크로의 과학사냥' 저자] 덜 된 인간

은퇴 준비를 위한 변화관리 교육의 마지막 시간에 진로설계가 들어 있다. 오랜 직장 생활에서 해방되기도 무섭게 사회는 은퇴자에게 '제2의 인생설계'를 강요한다. UN에서 정한 기준에 따르면 60세는 청년이라며 돈을 벌라고 한다.

나는 그럴듯한 직업을 핑계될 수가 없어 나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말았다. 세상의 진리를 캐고 글을 쓰겠다고 했다. 강사는 난처한 표정을 잠시 짓더니 안사람이 허락했는지 물었다. 치매가 오기는 이르고 철이 덜 든 사람으로 여기는 듯했다. 젊은 눈으로 발굴 못했던 진리가 노안에게 보일 리가 없다는 판단은 잘못이 아니다. 나뿐인가? 아니다. 주변에 사람이 덜 된 자들이 수두룩하다. 친구들에게 너도 태어나서 미역국 먹었느냐며 나도 농담을 하곤 한다.

철학과 신학의 이혼 사유: 중세 보편론

중세에도 사람됨이 현안이었고 이를 '보편자 논쟁'이라고 한다. 신학을 섬겼던 중세철학은 천지 창조나 성육신의 기적을 이성적으로 해석하고자 했고 보편자 문제를 피해 가지는 못했다.

사실 보편자 문제는 기원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올라간다. 로스켈리누스(1050~1120년), 아벨라르(1079~1142년),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년)가 논쟁에 뛰어들었다. 중세 말기 윌리암 오컴(1290~1349년)이 해답으로 '유명론'을 제시하자 철학과 신학은 더 이상 동거할 수 없다며 이혼하고 각자의 길로 가게 된다.

이후에 보편 논쟁은 잠잠해졌다. 이제는 현대 철학자들도 해묵은 보편 논쟁을 끄집어내지 않는다. 보편 논쟁을 무엇이고 정말 결론은 났는가? 다시 건드려 세상을 어지럽게 할 내용인가? 보편 논쟁에서 오컴의 유명론이 정답인가? 과학기술자의 눈으로 보면 이는 정답이 아니다.

유명론, 실재론, 온건 실재론

보편자를 언어 놀이로 설명해 보자. 내 앞집에는 갑돌, 뒷집에는 길동, 옆집에는 철수가 살고 있다. 밤새 내린 눈을 치우려 가정마다 한 사람 나오라고 문자를 보내면 이들은 투덜거리며 나온다. 사람으로 주민증을 받은 갑돌, 길동, 철수가 나오지만 주민증이 없는 개나 청소 로봇이 나오지 않는다. 국어문법에 따르면 갑돌, 길동, 철수는 고유명사라 하고, 사람은 일반명사라고 한다. 보편자 논쟁은 고유명사의 존재, 일반명사의 존재에 대한 다툼이다.

'유명론'은 고유명사는 세상에 존재하지만, 일반명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갑돌, 길동, 철수는 이웃집에 확실히 살지만 사람이라는 원형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갑돌, 길동, 철수의 행동에서 직립보행, 언어 등의 공동 특성을 추출하여 사람이라는 어휘를 사전에 만들어 넣었다.

플라톤이 털이 없고 두 발로 걷는 동물을 사람으로 정의하자 디오게네스는 털 뽑힌 닭 한 마리를 던지며 사람라고 반박했다. 그만큼 사람을 정의하기 어렵고 그 정의에 합당한 원형이 살지는 않는다. 관념으로만 존재한다. 로스켈리누스는 유명론을 주장하여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실재론'은 고유명사도 일반명사도 모두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에 따르면 천상에 사람의 원형이 있는데 이를 복사하고 붙여 넣어 세상에 고유명사인 개개인이 태어난다고 보았다. 모두가 1+1=2라고 동의하는 이유는 천상에서 그렇게 배운 탓이라고 주장한다.

플라톤이 사랑했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조금 딴 소리를 한다. 천상에 이데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의 모든 개체에는 틀림없이 이데아라는 형상이 들어 있다고 했다. 기독교도 창조주가 천상의 원형을 모방하여 세상을 만들었다며 플라톤을 옹호한다. 일반 명사인 원형이 천상에 있으니 기독교나 플라톤은 실재론이다. 성직자가 실재론을 좋아하고 유명론을 싫어하는 이유이다.

엉큼한 아벨라르는 명망가 딸 엘로이즈를 가르치다 눈이 맞아 자식을 낳았다. 화가 난 귀족은 아벨라르를 거세하고 쫓아버렸다. 씨를 가졌다가 씨를 잃어버린 아픔이 컸는지 그는 보편자는 탄생 이전에 있었고, 보편자는 아기 속에 있으며, 태어난 아기는 보편자를 표출한다고 주장했다. 실재론과 유명론을 모두 수용한 온건 실재론이다. 아퀴나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따라 온건 실재론자이다.

그런데 아퀴나스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오컴이 나타나 유명론을 주장한다. 천상의 이데아를 본 적이 없고, 개체 속에 보편자를 본 적이 없다면 보편자는 이름뿐이라는 주장이다. 머릿속에 여러 생각하지 말고 눈에 보이는 현상과 법칙만 믿으라고 한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오컴 이후부터 철학자들은 입 뻥끗 못하고 보편 논쟁은 얼음 속에 묻혔다.

사진
'생명체 안에 유전정보를 지닌 DNA, 보편자로 발현된다.

부활한 온건 실재론

최근에 시베리아의 동토가 녹으면서 매머드 미라가 발견되었다. 1만 년 전의 매머드의 멸종에는 크로마뇽인이 범인일 수도 있다. 미라에서 DNA 유전자를 복제해 세포에 주입하고 살살 배양하면 조만간 매머드를 복원할 수 있다고 본다. 동물원 관람객들에 복원된 매머드를 보여주면 매머드! 매머드! 하며 소리칠 것이다. 언어로 보편자가 있다는 유명론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생명체를 복제할 수 있는 이유는 DNA가 생명체의 설계도이기 때문이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의사 집안이었다, 그가 개체 속에 들어 있다고 주장한 원형은 지금 과학으로 보면 DNA 유전자이다. DNA 유전자 속에 매머드의 보편자가 들어 있다. 이 유전자는 긴 시간 동안 진화되어 왔다. 원형은 플라톤이 주장처럼 천상에 있지 않았고 시베리아의 미라 속에 있었다. 암튼 보편자는 존재하므로 실재론도 틀린 주장은 아니다. 이제 과학자들은 보편자에 해당되는 유전자를 보여 줄 수가 있으므로 오컴이 다시 태어난다면 그는 유명론을 철회해야 한다.

보편 인간, 고유 인간

갓 대학을 입학하고 뭘 모를 때 벤치에 앉아 있는 나에게 어떤 상급생이 오더니 나를 전도하기 시작했다. 삶과 구원이 무엇인지 침을 튀겨가며 설명을 한 다음 나의 결단을 물었다. 나는 웃었다. 그는 버럭 화를 내더니 한 마디 남기고 떠났다. 자기는 왜 사냐고 묻지 않았으며 내가 웃을 정도의 위인이 아니라고 했다. 맞는 말이지만 좀 억울했다.

우리는 타인을 사람이 아니라고 자주 비난하고 개라고 가끔 저주도 한다. 확실한 사실은 각 사람은 사람이라는 보편 유전자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 고유 유전자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보편 유전자로 인해 사람을 존중하고, 고유 유전자로 인해 그 사람의 역량을 기대해야 한다.

● '크로의 과학사냥' 저자인 정연섭 연구원은 서울대 화학 석사 후에 LG화학연구소, 한국전력연구원 거쳐 한국수력원자력 중앙연구원에 재직하고 있다. 50여 편 발표 논문, 10여 건의 특허를 등록했다. 원전 설계 및 수출로 한국원자력학회 기술상, 산자부 표창을 받았다. '크로의 과학사냥'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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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용 2020-12-09 18:13:11
철학과 과학에 박식하고 풍부한 내용이 너무 좋습니다 좋은 글 계속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