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와 혁신기업]③ 인프라투자의 시작, 이리 운하와 뉴욕 센트럴 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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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혁신기업]③ 인프라투자의 시작, 이리 운하와 뉴욕 센트럴 철도
  • 이영원 미래에셋대우 이사
  • 승인 2020.12.01 14: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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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원 미래에셋대우 이사] 지금도 경기부양을 위한 정부의 정책수단으로 인프라 투자는 단골 메뉴다. 대규모 국책 사업이 발표될 때 마다, 그 사업의 사업성이 얼마나 되는지, 선심성 정책으로 비용 낭비의 사례가 아닌지 논쟁이 뜨겁다. 

하지만 초기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인프라 투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부고속도로가 그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는 것처럼, 미국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는 이리 운하와 철도가 눈부신 역할을 수행한 바 있다.

이리 운하(Erie Canal)는 뉴욕주 올버니 인근 허드슨강에서 이리호까지 584km를 연결한다. 이리 운하의 개통으로 뉴욕이 위치한 미국 동부와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의 오대호 연안이 연결되었고, 다시 미시시피 강을 통해 멕시코만까지 거대한 경제권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이리 운하는 1825년 개통 되었는데, 개통 이전 미국은 좀처럼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으로 경제권을 확대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광대한 루이지애나를 1803년에 매입했지만 낙후된 서부로 사람들의 진출은 드물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일찌감치 운하 건설방안이 제기되고 있었는데, 제퍼슨 대통령의 거절 등으로 연방 정부 차원의 사업은 시도되지 못했다.

하지만 뉴욕시장과 연방상원의원, 뉴욕주지사를 역임한 드윗 클린턴(Dewitt Clinton)은 운하의 사업성을 확신하고 1817년 공식착공하여 예정된 공기 10년보다 2년 단축된 1825년 이리 운하를 완공한다. 허드슨강 올버니 북쪽의 워터포드에서 이리호 연안의 버펄로를 연결한 운하는 깊이 1.2m, 폭 12m의 규모로 83개의 수문을 갖췄다.

이리 운하를 통과한 선박은 이리호와 물길로 연결된 휴런호, 미시간호까지 운항이 가능했고, 추후에 수페리어호까지 확장되었다. 이로 인해 클리블랜드, 디트로이트, 시카고 등 중서부지역까지 동부의 경제권이 확대되는 계기가 된다.

이리 운하 건설이후의 수로(빨간선 부분). 뉴욕항에서 버팔로까지의 운송이 가능해지며 뉴욕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자료=위키피디아

뉴욕, 시카고를 키워낸 이리호 운하건설

시카고의 경우는 이리 운하의 건설로 경제적 발전이 시작된 이후, 1848년 일리노이-미시간 운하로 미시간호와 미시시피강을 연결하는 기점이 되면서 물류의 거점으로 부상한다.

운하의 건설에 따른 경제적 효과는 막대했다. 화물 운송비가 1/10 이하로 떨어졌다. 완공 첫해 7000척의 배가 이리 운하를 이용했고 1800년대 중반까지 30배 이상 폭증하게 된다. 중서부 지역의 곡물이 유럽으로 수출되었고 유럽으로부터의 수입은 뉴욕항으로 집중되었다. 필라델피아, 보스턴에 뒤지던 뉴욕이 비약적으로 발전, 경제적으로나 인구수에서 미국 최대 도시로 부상하게 된다.

중서부로의 이주도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이리 운하 개통 전 인구가 1000명에도 미치지 못했던 시카고도 대도시로 성장해갔다.

운하의 뒤는 철도가 이어가게 된다. 세계 최초의 철도는 이리 운하가 개통된 1825년 영국의 스톡턴-달링턴의 40km다. 5년 뒤, 1830년에는 볼티모어-오하이오 철도가 개통되며 미국은 영국에 이어 두 번째로 철도를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이후 철도에 대한 투자는 미국에서 폭발적으로 단행되었으며 1840년대에는 8000km, 1850년대에는 3만2000km의 연장을 자랑했고, 1861년 미국 남북전쟁 시작 전 미국의 철도연장은 영국, 프랑스, 독일의 철도 연장을 합한 것보다 길었다.

철도 역시 이리 운하와 비슷하게 동북부 해안과 중서부 도시를 연결하며 확장되어 갔다. 1848년에는 시카고에도 첫 철도가 부설되었다. 시카고, 디트로이트, 클리블랜드와 보스턴, 뉴욕 등을 거미줄 처럼 이어가던 철도는 남북전쟁 직후 1869년 대륙 횡단 철도가 부설되기까지 이르렀다.

철도 역시 운하와 함께 운송혁명의 한 축을 이루며 엄청난 경제적 효과를 불러왔다. 육상 운송 비용에서 철도는 철도 이전 주된 수단이었던 마차를 이용한 운송에 비해 1/25 이상 저렴했다. 운하를 이용한 수상운송에 비해서는 훨씬 빠른 속도를 보였고 겨울에도 얼지않아 상시 운송이 가능했고 정시운행의 강점도 보였다.

1869년 5월8일 미국 솔트레이크시티 북쪽의 프로먼토리서밋에서 대륙횡단철도 마지막 연결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장면을 그린 화보. 대륙횡단철도의 개통으로 뉴욕에서 캘리포니아까지 7일 안에 도착할 수 있게 됐다. 위키피디아
1869년 미국 솔트레이크시티 북쪽의 프로먼토리서밋에서 대륙횡단철도 마지막 연결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장면을 그린 화보. 자료=위키피디아

민간주도로 이뤄진 철도사업...뉴욕증시의 핵심 종목으로 부상

뉴욕주가 주도했던 이리 운하와 달리 철도는 민간의 투자를 바탕으로 구축되었다. 많은 철도사업자가 등장했으며 이들간의 경쟁도 치열했다. 핵심 노선의 경우에는 중복 투자도 많았고 사업자간 경쟁으로 파산과 합병 등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대규모 투자가 필요했던 철도는 자금조달을 위해 주식을 발행했고, 뉴욕증권거래소의 핵심 상장종목들이 되었다. 초기 다우존스 운송지수의 대부분 종목이 철도회사로 구성되었다.

초기 경쟁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회사는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의 뉴욕 센트럴 철도(New York Central Railway)였다. 뉴욕 센트럴은 록펠러의 스탠다드 오일과 대규모 장기계약을 통해 안정적인 물동량을 확보하며 성장했고, 스탠다드 오일은 저렴한 운송비로 가격경쟁력을 가져갈 수 있었다. 이후 철도사들은 자동차와의 경쟁을 거치며 연이은 인수 합병의 대상이 된다.

운하와 철도에 이어 내연기관 자동차와 도로 건설까지 운송체계의 발전, 인프라의 확충은 미국 자본주의 발전의 결정적인 수단을 제공했다. 자연을 상대로 한 과감한 도전과 투자가 경제적 성과를 창조한 것이다.

물론 인프라 투자의 역사에서 실패 사례도 많다. 이리 운하에 자극 받았던 많은 운하 사업자들은 대부분 수익을 올리는데 실패했고, 철도사업에서도 많은 경쟁자가 밀려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인프라 투자는 여전히 많은 주목과 기대를 받는 분야다. 특히 5G 통신망과 같이 정보의 인프라는 19세기 물류의 수송을 가능케 했던 인프라 투자와 마찬가지로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된다.

앞선 물류인프라를 구축했던 19세기의 미국은 유럽 국가에 비해 높은 생산성으로 빠른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2020년대 세계에서 가장 앞선 통신·데이터 인프라로 성장을 가속화할 지역은 어디가 될까? 200년 전의 운하건설에서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교훈이다.

 

●이영원 이사는 연세대 경제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마쳤다. 대우증권에서 리서치 업무를 시작해 푸르덴셜투자증권, 현대차투자증권에서 투자전략을 담당했다. 미래에셋대우에 합류한 이후 해외주식 분석업무를 시작, 현재 글로벌 주식 컨설팅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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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연 2021-04-06 14:12:12
자료 잘봤습니다. 정리가 깔끔하고 가독성이 좋아서 학생인 제가 봤을 때도 쉽게 읽혀졌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