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진 칼럼] 한은법은 심심풀이 땅콩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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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진 칼럼] 한은법은 심심풀이 땅콩이 아니다
  • 차현진 한국은행 연구조정역
  • 승인 2020.11.26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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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기관·이해단체가 금통위원 추천...가장 먼저 없애야
중앙은행 정책목표에 '고용안정' 명시 반대해야
"고용안정 추가하면, 가계부채·부동산 문제 단념해야 하나"
마땅한 수단도 없이 책무만 커져선 안돼...한은, 빨리 입장 표명해야
차현진 한국은행 연구조정역
차현진 한국은행 연구조정역

[차현진 한국은행 연구조정역] 한국은행법 개정이 또 추진된다. 지난 봄 영리기업 여신조건을 완화하는 내용의 개정안이 발의된 데 이어서 이번에는 금융통화위원회 위원(금통위원)들의 임명절차와 통화정책의 목적을 변경하는 법안이 발의되었다. 법률 개정을 시도하는 데는 여야가 따로 없다.

한은법은 세법이나 부동산 관련법과 달리 일반 국민들의 일상생활과 크게 상관이 없다. 법이 잘못되었을 때 부작용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입법실적을 올리기 위한 방편으로 법률 개정이 쉽게 추진된다.

그러나 한은법은 심심풀이 땅콩이 아니다. 우리나라 금융법 제1호다. 그러므로 바꾸려면 제대로 바꿔야 한다. 이 글에서는 바람직한 한은법 개정방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 제기되는 금통위원 임명절차와 목적조항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 정작 관심을 갖고 시급히 보완해야 하는 부분은 다른 쪽이다. 바로 금통위원 추천제도다.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위원회 구성에 은행연합회와 대한상공회의소 등 이익단체가 지분을 갖는 경우는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무이하다.

국회, 금통위 추천제도부터 폐기해야

미국은 연준 위원 7인 모두 상원의 인사청문회 대상이다. 일본은행도 총재, 부총재 2인, 그리고 6인의 심의위원 등 9인이 양원의 동의를 얻어 임명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한국은행의 금통위원 7인 모두를 인사청문회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그것이 지금 국회의 생각이 그러하다.

그런데 합의제 의결기구는 금융통화위원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금융위원회, 공정거래위원회, 방송위원회, 감사원감사위원회 등 굉장히 많다. 그런 기관들은 기관장(위원장)만 청문회를 거친다. 정치력 소모라는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여야의 대치 속에서 많은 공직이 공석으로 남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미국의 경우 연준 위원 7인 중 2인이 3년째 공석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합의제 의결기구 전원이 인사청문회를 거치는 경우는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뿐이다. 금통위가 헌법기관이 아닌 이상 모든 위원을 인사청문회 대상으로 삼는 것은 어색하다.

금통위원의 임명절차에 관해서 고쳐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 바로 추천제도다. 한국은행 금통위원 중 5인은 기재부장관 등 외부 기관의 추천을 거쳐 임명된다.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공직을 임명하는데 행정부와 이익단체(대한상공회의소, 은행연합회)가 추천권 지분을 갖는 것은 대단히 불합리하다. 세계에서 유일하다.

우리나라의 추천제도는 1950년 한은법을 만들 때 일본은행의 정책위원회 위원 추천제도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그 제도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 태평양사령부의 요구로 시작되었다. 일본 군부가 일본은행을 전쟁의 도구로 삼아 전비를 조달토록 한 것을 문제 삼고 ‘금융의 민주화’를 요구하자 그 타협안으로 일본 정부가 제시한 방법이었다. 일본은행 정책위원회에 시중은행, 지방은행, 상공업계, 농업계의 대표 각 1인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일본에서 이 제도는 1998년 폐기되었다. 패전국 일본마저 폐기한 방식을 우리나라가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것은 설명하기 힘들다. 국회가 하루라도 빨리 폐지해야 한다.

한은, 한은법 개정에 단호히 반대해야

한 시대나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수용될 수 있는 생각의 범위를 오버톤 윈도우(Overton window)라고 한다. 너무 급진적이거나 비현실적이지 않은, 허용 가능한 영역을 말한다. 재정정책의 오버톤 윈도우는 항상 논쟁거리다. ‘한국형 뉴딜’의 범위를 두고 정치권이 대립한다.

반면, 통화정책의 오버톤 윈도우는 간명하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물가안정으로 아주 좁게 설정하고 있다. 다만 아르헨티나에서는 중앙은행의 설립목적에 사회적 평등까지 포함된다.

미국도 특이하다. 연준에 물가안정이외에 고용안정의 책임까지 부여되어 있다(호주중앙은행도 그렇지만, 이는 모든 정부기관의 공동책무다). 이를 두고 보통 이중 목표(dual mandates)라고 하는데, 연준에게는 큰 오점이다. 1970년대 미국 사회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스태그플레이션의 책임이 연준, 특히 아서 번즈(Arthur Burns) 연준 의장에게 있다는 점을 콕 집어 밝히는 과정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아서 번즈가 학자로서는 명망이 높았다. 경기변동론의 대가로서 오늘날 미국의 대표적 경제연구기관인 NBER의 창립멤버였다. 밀턴 프리드먼(노벨 경제학상 수상)과 엘런 그린스펀(연준 의장)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공직자로서 아서 번즈는 실패한 인물이다. 닉슨 대통령은 1960년 대선에서 자신이 케네디에게 졌던 이유가 연준의 긴축정책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대통령 경제고문인 번즈를 연준 의장으로 임명할 때 자신의 재선을 위해 완화정책을 요구했다. 번즈 의장은 그 요구를 따랐고, 그 대가로 연임되었다. 그 결과는 스태그플레이션이었다.

1976년 취임한 카터 대통령과 당시 상·하원을 장악한 민주당은 1977년 연준개혁법(Federal Reserve Reform Act)을 제정하고 번즈 의장에게 책임을 묻기로 했다. 그때까지 의장은 최초 임명될 때만 청문회를 거쳤는데, 그러다 보니 무책임하게 정책을 편 뒤 연임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의장과 부의장만큼은 연임될 때마다 청문회를 밟도록 하여 책임추궁의 기회로 삼기로 했다(다른 위원들은 연임될 때 청문회를 거치지 않는다). 명백히 번즈 의장을 타겟으로 삼은 법률이었다(그쯤 되면, 번즈는 사임해야 했으나 모른 척하고 8년의 임기를 꽉 채웠다. 공직에 욕심이 많았던 번즈는 사상 최악의 의장이라는 평에도 불구하고 레이건 대통령 시절에는 5년 간 서독 대사로 일했다).

연준개혁법 공포 직후 활짝 웃는 번즈 의장(맨 왼쪽), 지미 카터 대통령, 그리고 차기 의장 부부. 대통령이 차기 의장까지 미리 공개하고 압박했지만 번즈는 자리를 지켰다.
연준개혁법 공포 직후 활짝 웃는 번즈 의장(맨 왼쪽), 지미 카터 대통령, 그리고 차기 의장 부부. 대통령이 차기 의장까지 미리 공개하고 압박했지만 번즈는 자리를 지켰다.

연준개혁법에 추가된 고용극대화 목표는 그냥 양념이었다. 그 목표가 없더라도 번즈 의장은 고용극대화를 목적으로 돈줄을 펑펑 풀었고, 훗날 카터대통령이 임명한 폴 볼커 의장이야말로 긴축정책을 통해 고용극대화에서 이탈했다. 그 바람에 카터는 재선에 실패했다.

이런 속사정을 감안할 때 통화정책의 오버톤 윈도우를 넓혀서 한은법에 고용안정을 추가하려는 시도는 뜬금없다. 특정인을 망신주려고 만들었고, 성과도 거두지 못한 미국의 법률을 우리가 곁눈질할 필요는 없다. 지금 한은법에 고용안정을 추가하면, 한은은 가계부채나 부동산 문제를 단념해야 하는가?

그런데 최근 한은은 “법안이 제출되면 관련 논의에 적극 참여해 중앙은행의 과감한 변화를 치열하게 고민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과거의 입장과 상당히 다르다.

과거 김중수 총재는 취임사에서 “경제정책은 한 마디로 고용과 물가의 두 개 축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며, 고용이 늘어나지 않는 경제는 지속되기 어려운 법”이라고 밝혔다. 그런 개인적 소신에도 불구하고 한은법에 고용안정을 담는 것에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2012년 9월 기자간담회). 마땅한 수단도 없이 책무만 커지면, 후임 총재에게 부담이 되기 때문이었다.

사태가 복잡하게 전개되는 것을 막으려면, 한은이 가급적 빨리 그리고 분명하게 입장을 밝혀야 할 것이다.

● 차현진 한국은행 연구조정역은 한국은행에서 36년째 근무하고 있는 금융전문가다. 한국은행 조사부, 자금부, 금융시장국 등 정책관련 부서를 거쳤고 워싱턴사무소장, 인재개발원장, 금융결제국장, 부산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대통령비서실과 미주개발은행(IDB) 등에서도 근무했다.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 '숫자 없는 경제학', '금융오디세이', '중앙은행 별곡', '법으로 본 한국은행' 등 다수의 저서를 집필한 금융 에세이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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