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산책] 풍경 너머 존재를 그리는 서양화가 정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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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산책] 풍경 너머 존재를 그리는 서양화가 정일영
  • 심정택 미술칼럼니스트
  • 승인 2020.10.3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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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소에 일주일 이상 머물며 그린 사생화
사람이 인지한 빛을 그리는 화가
서울 충무로 세종갤러리서 내달 8일까지 전시회
심정택 미술칼럼니스트.
심정택 미술칼럼니스트.

[심정택 미술 칼럼니스트] 풍경화가 정일영의 최근작은 해경(海景)이 많다. 울산, 무안, 일본 돗토리현의 풍경을 담았다.

최소 한 장소에서 일주일은 머문다. 대상을 익히고 형태를 지우며 색을 올리면서 마무리까지 원칙적으로 사생(寫生) 작업을 한다. 사생은 어렵다. 얼굴은 햇볕에 그을리고 현지까지의 교통, 숙소, 식사 문제 등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풍경의 대상은 확대됐지만 언뜻 보면 스펙트럼이 넓지 않은 듯 보인다. 오로지 풍경 그 자체이고, 예외없이 작가 특유의 붓터치가 관통하기 때문이다.

정일영은 ‘사람이 인지하는 빛에 드러남 = 풍경’이라는 기존 관념을 뒤집어 엎는다. 작가는 처음부터 ‘의식 속에 있는 불안과 긴장, 흥분, 갈등의 공간’을 풍경의 대상으로 삼았다. 심상(心象)을 그린 것이다. 비구상적 추상이었다.

삶에 근원적인 회의가 들어 생을 포기할 뻔한 의지적 사고가 있었던 20대에 배회하면서 본 도시 주변 밤 풍경은 간판의 네온사인 빛이 이미지로 점철되어 있었다. 빛에 대한 회상이 '도시의 불빛 속으로'(2006년) 전시였다. 현재 진행형인 전원 풍경 작업의 출발이고 기법의 근원이다.

주전해안 (울산)  65.2 x 100cm  acrylic on canvas 2017.
주전해안 (울산). acrylic on canvas. 65.2 x 100cm. 2017.

작가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빛에 대한 관심보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형태를 끊임없이 거부하며 그 대상의 내면으로 들어가고자 애쓴다. 지워가는 순위는 의식 밑바닥에 깔려 있는 체험한, 무의식화된, 알고있는 이미지를 배제하고 의식하지 못했던 이미지들을 끄집어내고자 했다.

그는 보이는 대상인 풍경을 도구로 지난 삶에 각인된 심연의 풍경을 입힌다. 생태 신학 공부가 인생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절대자는 우주와 자연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믿음이 요체이다. 종종 숲과 대화를 한다. 자신이 숲을 의식하듯이 숲도 자신을 의식할까하는 의문이 들곤했다.

그는 10여년 전 경기도 양평 서후리 숲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사생 작업을 시작하였다. '평범한 풍경'(2014년)은 본격적인 종교적 풍경화이다. 우주와 자연 속에 절대자가 있다는 믿음은 강해져갔다. 삶의 상태, 인간의 모습, 사회적 현상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게 아니고, 시각적으로 바라보는 대상에는 뭔가 있다는 확신을 확인해야 했다.

평범한풍경. acrylic on canvas. 145*112. 2014.
평범한풍경. acrylic on canvas. 145*112. 2014.

사생으로 캔버스에 구현돼 표현되는 현장은 자연을 들여다보는 뭔가가 녹아들 것이다는 믿음이었다. 정일영은 풍경 너머를 그린다.

그의 독특한 붓터치는 마치 굼벵이가 기어가듯 제법 굵은 폭으로 꾸불꾸불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끊어져 있다. 나무줄기 하나하나에 깃든 생동감을 표현하였고, 자신의 호흡법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색채가 단순한 여름보다는 겨울을 좋아한다. 겨울은 여전히 여름과 같이 초록이 주류다.

풍경의 깊이 (서후리, 양평) Acrylic on canvas 97 x 130.3cm / 2020.
풍경의 깊이 (서후리, 양평). Acrylic on canvas. 97 x 130.3cm. 2020.

그가 밝고 투명한 색을 갖게 된 것은 흰색을 바탕에 깔고 원색을 얹기 때문이다. 그러한 색은 20대 서울 노량진 학원가 밤거리 상점의 간판과 교회 십자가의 흐릿한 네온 빛에서 가져왔다. 작가는 실제 대상보다 채도를 한 단계 올려서 쓴다.

뉴노멀이 된 코로나19는 기후온난화가 직접적인 원인이다. 줄곧 숲에 내재된 고통스런 존재를 응시해 왔던 정일영의 ‘평범하지 않은 풍경’전이 서울 충무로 세종호텔 세종갤러리에서 오는 11월8일까지 열린다. 신작 중심으로 30여 점이 걸린다.

● 심정택 미술칼럼니스트는 미술계 입문 12년차의 미술 현장 전문가이다. 쌍용자동차 기획팀, 삼성자동차 기획팀 등 자동차회사 기획 부서를 거쳤고, 홍보 대행사를 경영했다. 상업 갤러리를 경영하면서 50여회의 초대 전시를 가졌고, 국내외 300여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하였다.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칼럼을, 최근에는 미술 및 건축 칼럼을 기고해 왔다. 저서로는 <삼성의몰락>, <현대자동차를 말한다>, <이건희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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