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① ‘신경영’으로 본 ‘사상가 이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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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① ‘신경영’으로 본 ‘사상가 이건희’
  • 박원배 어린이경제신문 대표(전 서울경제신문 산업부장)
  • 승인 2020.10.27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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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신경영 선언' 특종 보도한 박원배 전서울경제신문 산업부장
회장 취임후 7년동안 '질 경영' 주창했지만 변화없는 삼성임원에 '분노'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한 해에 '신경영 선언'...'한국의 개혁'도 시동 걸어
이건희의 경영은 '경영 이상의 사상'..."마누라·자식 빼고 다 바꿔보자" 탄생
박원배 어린이경제신문 대표
박원배 어린이경제신문 대표

[박원배 어린이경제신문 대표(전 서울경제신문 산업부장)] 대한민국과 세계 경제에 큰 족적을 남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별세했다. 2014년 5월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급성 심근경색증으로 쓰러진 뒤 6년5개월 만이다.

이 회장은 선친인 호암 이병철 창업주가 별세한 뒤 1987년 2대 회장에 취임해 국내 최대 그룹을 이끌었다. 회장 취임 후 삼성 매출액은 40배 이상 뛰었고, 이익, 회사 가치 등에서 국내외에 주목할 만한 성장을 달성했다. 프랑스 AFP통신의 이 회장에 대한 평가는 여기에 주목했다. “그는 삼성전자를 글로벌 테크 거인으로 변모시켰다.”

이건희 회장의 업적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외형과 함께 ‘정신’이다. 정신은 대를 이어 성장과 발전의 바탕이 되며, 삼성의 성장은 가장 확실한 증거다. 특히 우리가 그의 행적에 주목하는 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많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장에게서 여전히 우리가 배우고, 추구해야 할 가치의 출발은 1993년, 지금으로부터 27년 전 시작한 ‘신경영’을 꼽을 수 있다. 이 회장의 신경영은 ‘경영 그 이상’이다. 그게 뭘까? ‘사상’이다.

그의 사상은 반도체, 스마트폰, 대형 컬러TV 등 ‘상품’으로 구체화돼 삼성뿐 아니라 대한민국, 세계인의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같은 평가를 가장 잘 담아낸 것이 미국 뉴욕타임스의 기사다. 이 신문은 이 회장 별세 소식을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건희 회장 재임 동안 전문 경영인들이 더 큰 책임을 지게 됐지만 이 회장은 삼성의 ‘큰 사상가’(big thinker)로 남아 거시전략 방향을 제시했다.”

세계 일류 기업으로 도약한 삼성의 오늘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인 '삼성 신경영'. 그 때로 돌아가, 이건희 회장의 정신, 사상, 그리고 혁신이 오늘의 삼성과 대한민국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당시 자료와 취재 수첩을 다시 들춰본다. 

1993년 6월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호텔에서 삼성 임원 200여명을 모아놓고 '신경영 선언'을 발표하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사진제공= 삼성
1993년 6월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호텔에서 삼성 임원 200여명을 모아놓고 '신경영 선언'을 발표하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사진제공= 삼성

1993년 이건희의 '신경영선언' 어떻게 탄생했나 

1993년. 그 때나 지금이나 삼성의 움직임은 모든 그룹의 관심사 였다. 이 가운데 특히 자동차 산업에 관심을 가진 삼성 때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곳이 있었다. ㄱ그룹. 이 곳에서 재계 정보를 맡은 취재원이 있었다.

4월 중순, 그는 내게 두툼한 회의록을 건네 주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2월 미국 LA, 4월 일본 도쿄에서 가진 사장단 회의 회의록이었다. 무엇보다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업인 삼성의 현실에 대해 그 중심에 있는 그룹 회장의 표현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삼성 TV· VCR(비디오 녹화기기)은 싸구려의 대명사 같다.”

“전자 사장과 임원들은 미국 전자제품 매장을 직접 둘러보고 그들이 우리 제품을 진열해 놓은 꼴을 보고 우리 상품이 얼마나 천덕꾸러기가 되어 있는지, 또 한쪽 귀퉁이에서 얼마나 많은 먼지가 쌓여 있는지 똑똑히 봤을 것이다.”(이상 LA회의)

“위기다.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대로 가면 안된다고 했을 때부터라도 움직였으면 훨씬 여유를 가지고 할 수 있었는데, 이제 7년밖에 안 남았다.”(도교 회의)

당시 나는 현대그룹 출입기자였다. 그런데, 이 자료를 보고 우리가 알던 ‘국내 최대기업 삼성’의 모습, 게다가 회장이 직접 삼성의 내부 상황을 질타한 내용이라 큰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었다.

그해 1993년 6월 7일 이건희 회장은 비장한 각오로 임원과 해외주재원 등 200여 명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캠핀스키 호텔로 불러 모았다. 새로운 삼성을 여는 회의를 주재하기 위해서다. 당시 회의는 예정에 없이 긴박하게 추진됐다. 삼성 임원들이 독일행 비행기표를 구하기 위해 한바탕 소동을 벌여야 했으니까. 이날 이 회장은 8시간 넘는 ‘강연’을 통해 외치고 또 외쳤다. 핵심 내용을 담은 말이다.

“삼성은 이제 양 위주의 의식, 체질, 제도, 관행에서 벗어나 질 위주로 철저히 변해야 한다.”

질 위주의 경영을 선언한 것이다. 이 회장과 삼성의 오늘을 있게 한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며, 신경영의 출발 선언이다.

1942년 1월 9일생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1993년 6월7일 50세를 갓 넘긴 젊은 나이에 재계 1위인 삼성에 '신경영'을 선언한다. 사진제공= 삼성
1942년 1월 9일생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1993년 6월7일 50세를 갓 넘긴 젊은 나이에 재계 1위인 삼성에 '신경영'을 선언한다. 사진제공= 삼성

이건희 '신경영선언' 의중, 삼성 비서실도 파악못했다

지금 보면 매우 중요한 선언이었지만, 당시 언론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다. 사실 이 회장의 행보를 눈여겨 봤다면, 1993년 들어 그가 이전과 확실히 다른 보폭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1987년 회장 취임 이후 밖으로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부회장 때 붙은 ‘은둔의 황태자’가 ‘은둔의 황제’로 바뀌었을 뿐, 큰 변화가 없었다. 1992년 공개된 이 회장의 움직임은 3건에 불과하다. ▲이건희 회장 독일 주재원 특강(7월) ▲21세기 리더과정 출범(미래경영자 육성) ▲취임 5주년 맞아 현장 경영 및 대외 활동 강화 선언이다.

1993년이 밝았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했다. 이 회장의 행보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당시 취재수첩을 통해 이 회장의 주요 일정을 정리해 본다.
▲신년사 3대 경영 방침 발표(1월) ▲비서실 현장 경영(그룹사 및 타사 산업시찰, 1~2월) ▲LA 사장단 회의(2월) ▲제2창업 5주년 기념사 ‘신경영 이념과 삼성 정신 강조’ ▲전경련 회의 참석(3월) ▲도쿄 사장단 회의(4월) ▲이건희 회장 포춘지 인터뷰(5월) ▲중소기업 경영자 대상 튺5KD, 전국 과학교육자 대회 강연, 한국 경영학회 경영자 대상 수상 기념 강연.

여기서 알 수 있듯 93년 들어 이 회장은 이전과 전혀 다른 행보를 보였다. 이 행보는 그해 6월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이어진다. 당시 언론은 이 회장의 이같은 움직임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김영삼 정부 눈에 나지 않기 위한 쇼’로 평가했다. 대다수 언론은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이 회장의 동정이나, 1단짜리 기사로 처리했다.그룹에서 프랑크푸르트에서 이 회장이 어떤 말을 했는 지 자세한 내용을 공개하지 않은 것도 큰 이유였다.

앞서 밝힌 대로 한 취재원으로부터 받은 LA회의와 동경 회의 내용에 강한 충격을 받은 필자는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분명 큰 일이 벌어졌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에 그룹 방송과 관련된 일을 하던 지인에게 연락했다. 그룹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그는 큰 거 하나를 알려줬다. “우리 팀에서 만든 '몰래카메라'형 프로그램이 있어요. 그거 회장님이 보고 발칵 뒤집혔어요. 그 이상은 말 못하니까, 그룹 홍보팀과 얘기해 보세요.”

출입기자가 아닌 ‘후배’ 자격으로 특별한 인연을 가진 그룹 홍보실 L실장을 만났다. 그는 나를 서울경제신문 복간 멤버로 추천해준 사람이다. 몇차례 만나서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실체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는 “현대그룹 출입기자니까 오프더레코드(비보도)를 전제로” 비디오 테이프 하나를 빌려주었다. 집에 돌아와 본 테이프 내용은 먼저 활자로 만났던 LA회의, 동경회의의 내용과 비교할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8시간 넘는 강연과 토론을 1시간 정도로 편집한 내용이었지만, 삼성의 현실과 이 회장이 느끼는 위기감을 전달하는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부회장이 된 뒤 불량은 안된다고 소리소리 질렀으나 부회장, 후계자라는 핸디캡에 따라 내 말이 강하지 않았다. 회장 취임 5년(1992년)이 지나서도 '불량은 안된다', '양이 아니라 질로 향해 가라'고 했는데도 아직 양을 외치고 있다. 비서실장, 삼성전자 사장, 본부장 모두 양을 지향한다. 어처구니 없다. 썩어빠진 정신이다. 암을 번지게 하는 것이다.”

“뛸 사람은 뛰어라. 바삐 걸을 사람은 걸어라, 안 말린다. 걷기 싫으면 놀아라. 의식주는 보장해 주겠다. 안 내쫓는다. 그러나 남의 뒷다리는 잡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왜 앞으로 가려는 사람 옆으로 돌려놓는가?”

“나는 위기의식을 느낀다. 금세기는 문제없다. 21세기 초반에는 이런 상황으로는 못 견딘다. 전자, 건설, 중공업, 석유화학은 위험수위다. 4개 사가 흔들리면 그룹 전체가 흔들린다.”

그리고 삼성 신경영의 핵심 단어로 자리한 말이 나온다.

“제대로 하자. 하루 2~3시간 일해도 된다. 나머지는 집에 누워도 좋다.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자. 내가 회장 자리에 앉아보자는 생각을 가져보자.”(프랑크푸르트 유럽 주재원 간담회)

삼성 반도체 30주년이던 2004년 이건희 회장이 기념서명하고 있는 장면. 사진= 삼성
삼성 반도체 30주년이던 2004년 이건희 회장이 기념서명하고 있는 장면. 사진= 삼성

삼성의 개혁 너머...한국의 개혁에 출발선 되다

테이프의 내용을 보고 확신을 갖게 됐다. 이 회장이 이 정도의 말을 하고 나섰다면 단순한 ‘말’에서 그치지 않고,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L선배를 졸랐다.

“다른 회의 테이프도 보여주세요. 단언컨대, 이건 삼성 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를 위한 개혁의 출발선이 될 수 있어요.”

사실 프랑크푸프트 선언에 대해 삼성 비서실조차도 회장의 정확한 의중이 무엇이며, 이 선언에 담긴 영향력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한 상황이었다. 쉽게 말해 그룹 차원에서는 ‘예고없이 진행된 개혁’이었다.

삼성이 신경영 선언 몇 달 뒤에야 '삼성의 용어', '삼성 신경영', '신경영 파이팅', '만화로 보는 삼성 신경영' 등의 책자를 발간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회장의 신경영 의지가 사전에 스탭과 논의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당시 삼성은 비서실부터 적잖은 혼란을 겪고 있었다.

L선배는 드러내 놓고 언론의 평가를 받기 힘든 속사정이 있었다. 마침, 일자리까지 추천해준 ‘믿을 만한’ 후배가 관심을 갖게 되니까(더구나 삼성 출입기자가 아닌) 나를 통해 회장 행보에 대한 평가를 알아싶어했다. 그렇게 얻는 10개의 비디오 테이프(그룹내 임원 교육용으로 제작)는 하나하나가 놀라움과 충격을 주었다.

이 테이프를 보고 분석을 마친 뒤 1단 짜리 동정 기사로 처리하던 ‘이건희 삼성 회장의 행보’를 삼성그룹을 출입하던 선배와 함께 1면 톱 기사로, 세차례에 걸쳐 시리즈로 쓰게 됐다. 파장은 컸다. 곧이어 한 공중파 방송은 프랑크푸르트 선언 편집본을 특집으로 편성했고, 언론이 앞다퉈 신경영을 비중있게 보도했다.

필자는 그 시리즈 기사의 마지막을 이렇게 정리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지금 같은 과감한 개혁을 최소한 김영삼 정부의 집권기간만이라도 중단없이 또 강도를 낮추지 않고 밀어붙인다면 삼성은 21세기 세계 일류기업의 목표를 달성하게 될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떠났고, 삼성은 목표를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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