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혼식을 맞은 부모님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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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혼식을 맞은 부모님을 보며
  • 김이나
  • 승인 2015.12.28 1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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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노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같이 늙어가자

지난 주 토요일은 친정 부모님의 결혼 오십 주년 되는 날이었다. 1965년 12월 26일에 남산 외교 구락부에서 결혼을 하셨으니 정확히 50년이 된 날이었다. 오십년 전에는 단 둘이었지만 이제는 제법 불어난 식구들과 함께 축하하는 자리를 가졌다.

최근 부모님들 세대 어르신들이 70대임에도 청년처럼 사시다 보니, 금혼식은 조금 과장하자면 결혼 30주년 정도의 무게감 정도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미 환갑잔치는 생략하거나 식사 정도로 대체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본인이 오래 사시는 것과 부부가 해로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지만.

 

▲ cominyu.info

 

어머니 말씀으로도 주변에 배우자와 사별한 친구들이 이젠 반 정도 된다 하니, 그분들은 금혼을 축하할 새 없이 배우자와 영원한 이별을 하신 셈이다. 고향이 인접한 곳에 사셨던 부모님은, 친구의 소개팅에 구경 갔다가 어머니를 보고 반해서 후일 줄기차게 만나자고 졸랐던 아버지의 용기 덕분에 연애를 시작하셨다고 한다. 비교적 유복했던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는 6.25 동란에 풍비박산이 난 집안이었고 어머니 말로는 학벌과 사람 됨됨이 말고는 아무것도 기대할게 없는 알거지였다고 한다. 그래도 기자로서 사회 첫출발을 하게 된 아버지를 믿고 두 분은 부부의 연을 맺으셨다. 하지만 순탄하지 않았다. 언론인의 아내는 터프함과 강한 멘탈로 다른 아내계(?)의 아내들보다 더 높은 순위를 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통금이 있던 시절이니 새벽 퇴근은 비일비재하셨다고. 그러니 집안 대대로 술 한잔 못하는 집안에서 자라온 어머니로서는 아버지는 분명 다른 별에서 온 남자임엔 틀림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종가집 종부로 딸만 연달아 셋을 낳고 맘고생도 많으셨던 어머니. 하지만 아버지의 단호한 결심으로 호적은 “女” “女” “女” 세 번 “만”으로 깔끔히 마무리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실 부모님이 부부로서 위기를 맞은 건 아버지가 은퇴하신 후였다.

이른 바 “삼식이” 생활을 시작하시면서부터. 30여년 동안 기자로 살아 왔던 아버지는 권위주의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소극적인 딸들을 못마땅해 하셨고 석사학위까지 마치고서도 전업주부로 살아가던 큰 딸에게 공부는 뭐하러 했냐며 내심 서운함을 비치기도 하셨던 분이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추종자이며 페미니스트인 아버지가 해결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 삼시 세끼였다.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던 남편과 하루 종일 코를 맞대고 있는 것조차 어색할 지경인데 삼시세끼를 집에서 드시는 날이 많아지니 아내인 어머니는 정말 힘드셨다고 한다. 여행을 다녀오거나 외출 후에도 집에 헐레벌떡 들어와 밥상을 차려야 했고, 반찬이 부실하면 아버지는 표정으로 나타내시니 내 나이 오십 넘어 이게 왠 시집살이인가 하셨던 것이다. 음식솜씨가 좋으셨던 탓에, 외식을 하거나 반찬을 사먹는 것은 예전부터 어머니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편법(?) 이었으니 맘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셨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 편법을 적절히 잘 이용하고 계시지만.

갈등은 깊어갔고 사소한 일에도 다툼이 일어났으며 딸들도 부모님 눈치만 볼 뿐 뚜렷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때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외할아버지가 물려주신 땅을 되찾게 되어 그 땅에 작은 집을 짓기로 하신다는 것이다. 처음엔 돈도 많이 들고 아무리 고향이래도 차로 두시간 반을 가야 하는 거리라 망설이시기도 했다. 하지만 한창 세컨 하우스를 짓는 붐이 일어날 때라 어영부영 작은 시골집을 하나 올리게 되었다. 그 집이 이 모든 문제를 한방에 해결해 줄지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사실상 별거에 들어가신 것이다.

처음엔 두 분이 같이 가셔서 어머니가 장소만 옮겨 그 예의 삼시 세끼를 실연하셨는데, 어느새 아버지 혼자 내려가시는 시간이 길어졌다. 지금은 한달에 보름 정도는 별거를 하고 계신다. 아버지는 혼자서 글도 쓰시고 티비도 보시고 고향 친구들과 소주도 한잔 하시는 생활을 8년째 유지하고 계신다.

토요일에도 그 얘기가 나왔다.

아마 그 별장 아니었음 니 아버지랑 안 살았을지도 모른다. 돈은 그만큼 썼지만 오히려 떨어져 지내면서 서로 더 챙기고 소중함을 느끼는 것 같다.“

부부가 오십 년을 함께 산다는 것, 참 대단한 일이다. 그 긴 시간을 살면서 사랑이 원망으로, 존경이 실망으로, 동정이 증오로 바뀔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감정들을 이젠 노년이 되어 새로운 감감정으로 승화시킨 것 같다. 연민, 정, 보살핌으로.

매일 매일 아니 매 순간 순간 바뀌는게 사람 마음인데 어떻게 바람 한 점 없는 호수 같을까.

둘만의 관계만 문제인가. 자식 낳아 키우면서 울고 웃고 고민하고. 쟤는 누굴 닮아 저러나 싶다가도 나닮았다 할까봐 노심초사 살다 보니, 어느덧 자녀들도 장성해서 가정을 꾸리고, 또 날 닮아 똑똑한 손주들도 안겨주고.

한해 두해 십년 이십년, 잘 참고 잘 살아오셨다. 실상 기대수명이 늘어난 만큼 황혼이혼도 증가하고 황혼 재혼도 증가하는 추세인데, 내친 김에 백년해로도 달성해 보리라는 강한 의지를 내보이시는 부모님을 뵈니 자식의 입장에서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같이 늙어 간다는 것. 힘도 없고 빽도 없고 이젠 가진 것도 없고, 더 나이들면 형제도 없고 친구도 없고. 나의 노년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의 배우자의 노년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앞으로의 오십년은 지난 오십년보다 더 순풍에 돛단 듯 순항 하시리라 빌어 본다.

    

 

김이나  ▲서울대학교 대학원졸(불문학) jasmin_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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