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희의 컬쳐 인사이트] 채움과 나눔의 미학 ‘영화 보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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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희의 컬쳐 인사이트] 채움과 나눔의 미학 ‘영화 보테로’
  • 권상희 문화평론가
  • 승인 2020.09.30 09: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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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뉴스=권상희 문화평론가] 코로나19로 닫힌 세상에서 만나게 된 영화 ‘보테로’. 맘껏 떠날 수 있는 자유를 결박당한 시기에 만난 탓일까? 오랜만에 숨통을 틔워주는 역할을 해준다.

보테로의 삶의 궤적을 따라 콜롬비아와 프랑스, 이탈리아, 모나코, 미국, 중국 등을 여행하는 동안 스크린 속 작품들은 ‘보테로 전시회’가 돼준다. 그 순간 그의 명작들은 미장센 이상의 역할을 한다. 영화를 통해 열린 세상을 맛보는 이런 방식의 환기도 꽤 괜찮은 것 같다. 

다양성이 인정되는 시대를 살고 있건만 우리 몸에 대한 기준은 천편일률적으로 획일화 돼있다. 미디어는 제대로 훈련된 근육과 쭉 뻗은 늘씬함이 매치 된 신체를 부지불식간에 강요하며 또 격하게 찬양한다.

자랑할 만한 몸은 거리낌 없이 SNS에 전시돼 있고, 이를 본 관찰자들은 때때로 부러움과 한숨을 동반하며 습관처럼 ‘좋아요’를 누른다. 이전과 다른 방식의 스타탄생 구조이기도 하다.

이 시대가 원하는 모습은 이토록 단편적이고 시각은 고정돼 있다. 다른 모습은 허용되지 않는다. 아름다움에 대한 주관적인 가치조차 객관화 시키고 만다. 

영화 '보테로' 스틸 컷
영화 '보테로' 스틸 컷

채움의 미학, 여전히 유효한 ‘보테로 스타일’

그런 의미에서 보테로가 작품 초기부터 일관되게 고집하고 있는 그만의 시그니처 스타일인 ‘풍만함’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사회로부터 외면 받는 몸에 대한 예술가의 고집스러운 집념은 당시에도 미적 가치에 배치되는 것이기에 평단의 혹평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리고 시대를 관통해 마침내 여전히 유효한 ‘보테로 스타일’을 창조해 낸다. 바로 ‘채움의 미학’이다. 

남자, 여자, 발레리나, 정치가, 투우사 등 성별, 직업의 구분 없이 그림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뚱뚱하다. 다빈치의 '모나리자'조차도 그의 손을 거치면 요요현상을 피할 수 없다. 색감과 양감 모두 증폭된다. 하지만 거북하지 않고 정겹다. 이

는 작품 전반에 흐르고 있는 따뜻함과 유러머스함 때문이다. 유년시절에 겪었던 가난과 척박하기만 한 고국 콜롬비아를 넘어 이 세상에 대한 풍요를 기원하는 마음을 자신의 예술세계에 오롯이 투영했으리라.

영화는 작품과 함께 성장하고 아파하고 견뎌내며 마침내 세계의 거장이 된 보테로의 인생을 조명한다.

두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페드로가 눈앞에서 죽는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고 비탄에 빠져 있을 때도 그는 사고로 다쳐 온전치 못한 손으로 ‘페드로 연작’을 그리며 삶을 버텨낸다. 아니, 버텨내려고 붓을 잡은 것이 아니라 붓마저 놓았다면 살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고통 속에서 예술혼은 그렇게 뿌리내리고 점차 세상 속에서 찬란하게 빛난다. 시련과 맞바꾼 위대함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설명 불가능한 얄궂은 인생의 아이러니다. 

영화 '보테로' 포스터

기꺼이 예술의 가치를 사회에 환원한 아티스트 ‘보테로’

그는 일명 이라크판 게르니카로 불리는 ‘아부 그라이브 연작’에서 그림을 통해 세상에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다. 2003년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의 포로학대 사진을 보고 인권유린의 참상을 화폭에 담아 형상화시킨 것인데, 하나의 그림을 통해 발현되는 사회 바판의 목소리는 다른 어떤 도구보다 선명하고 날카롭다.

화가로서 모든 것을 이룬 시기에 새롭게 도전한 조각가로서의 삶 역시 보테로답다. 안주하지 않기에 그의 작품엔 생명력이 넘쳐난다.

뉴욕의 파크 에비뉴, 프랑스의 샹젤리제 등 세계적인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조각품은 인체의 황금비율 대신 풍요로운 ‘보테로 스타일’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현대미술에서 그의 스타일은 현존하는 하나의 장르라고 하겠다.

고차원의 그 무엇이 아닌 ‘즐거움’을 창조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말하는 보테로는 그 가치를 공유하는데도 열정을 쏟는다.

거액을 들여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사들이고 조국 콜롬비아에 기증해 예술이 주는 즐거움을 국민과 기꺼이 함께 나눈다. 이렇게 사회에 환원된 가치는 계속 확장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예술을 향유하기 위해 ‘지적 레테르’라는 거추장스러운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그저 미소가 지어지면 그만인 것을. 보테로는 말한다. 그게 바로 예술이라고.

 

●권상희는 영화와 트렌드, 미디어 등 문화 전반의 흐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글을 통해 특유의 통찰력을 발휘하며 세상과 소통하길 바라는 문화평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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