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바라보는 종교와 철학의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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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바라보는 종교와 철학의 시각
  • 강낙규 기술보증기금 이사
  • 승인 2015.12.16 10:4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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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사후세계를 위해 현세를 소모한다면 억울하지 않을까

 

(오피니언뉴스에 시리즈 ‘철학, 축제에 빠지다’를 게재한 강낙규 기술보증기금 이사가 시리즈와는 별도로 정리한 글입니다.)

 

인간은 죽는다. 인간은 죽음을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가 인간에게선 중요한 주제가 되어왔다.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은 종교에 따라, 그리고 철학자와 사상가에 따라 다르다. 게다가 동일한 종교라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죽음에 대한 시각이 변해갔다.

 

기독교와 불교 그리고 힌두교에서는 사후에 나(아트만)란 주체가 천당이나 지옥 또는 연옥으로 가던지 혹은 윤회를 한다고 믿는다. 즉 죽더라도 영혼이든, 무엇이든 나란 주체가 있다고 상정한다.

반면에 공자는 “삶을 모르는데 죽음을 어떻게 알겠느냐?” 고 반문하면서 사후세계에 대해서 불가지론을 편다.

이에 비해 장자는 적극적으로 죽음과 사후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편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저서 「파이돈」에서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에 따라 영혼불멸을 믿었으며,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충분히 정화된 사람은 사후에 아름다운 거처에 머무른다고 말하면서 사후세계의 존재를 인정한다.

 

이처럼 여러 종교와 철학자 그리고 사상가들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비교해 보면서 호상놀이를 축제라는 관점에서 관람하면, 무언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을 발견할수 있다.

 

-기독교 문화권…원죄의 댓가에서 고독·공포의 대상으로 변화

기독교에서 죽음은 아담이 지은 원죄 때문이며 따라서 죽음은 죄의 댓가로 사유한다. 하지만 예수가 대신 죽음으로서 기독교는 죽음을 극복한 종교가 되어 사람들은 죽음을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중세초기의 기독교인들은 육체와 영혼을 구별하지 않았으며 심판의 날에 하늘나라로 초대받아 간다고 믿어 죽음이 찾아오면 순순히 그 뒤를 따랐다. 단지 악인만 부활하는 날, 벌을 받지 않고 깨어나지 못할 뿐 기독교인은 심판에서 제외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중세후기로 가면 인간을 영혼과 육신으로 나누고 기독교인들도 최후의 심판에서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죽음이 공포로 바뀌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죽음 앞에서 초연한 태도는 점점 사라지고 현세에 대한 애착이 점차 강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크시대(17~18세기)에 오면 천국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니라 바람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신이 자연으로 대체되고 멜랑콜리(우울, 침울/편집자주)가 발생한다. 죽음이 우연히 저지른 실수 때문에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안에서 죽으며 죽음을 삶 그 자체에 내재한 필연성으로 인식한다.

낭만주의시대에는 죽음은 죄와 관계없고 고통도 없으며 오히려 아름답기까지하다. 그래서 피안은 헤어진 사람과 영원히 만나 위로받는 세계가 된다.

현대에 와서 죽음은 병실에 갇혀버리고 성직자 대신 의사가 죽음에 대하여 심판을 한다. 죽는 자의 죽음에 대한 사실마저 거짓말로 넘긴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죽음은 이러한 장면을 상세히 보여준다. 환자와 의사만 남은 초라한 병실이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이며, 혼자 남은 고독감과 죽음 이후의 불확실성으로 공포를 느낀다.

 

- 불교…죽음 이후의 세계를 윤회→열반에 이르는 길

불교에서는 엄밀하게 주체로서의 나를 부정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나만을 인정함으로써 무아(無我)를 상정하나 경험으로서의 나는 해탈하지 않으면 욕계, 색계, 무색계를 영원히 윤회한다. 따라서 아미타불의 서방정토든지, 아니면 도솔천이든지 죽음 이후의 또 다른 세계가 있고 그런 세계를 윤회한다.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지막 찌꺼기인 육신을 버리고(無如涅槃), 3학 즉 계(戒 : 삶의 규칙), 정(定 : 마음의 집중과 안정), 혜(慧 : 바르게 보고 바르게 알다)와 8정도를 따르라고 가르친다. 불교는 자이나교처럼 과거의 업을 녹여 없애기 위하여 극단적인 고행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욕망으로 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요구한다. 현세는 욕계, 색계, 무색계중 가장 아래 단계인 욕계에 속해 있으므로 더 이상 윤회가 일어나지 않는 열반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궁극의 지점이라고 할 때 현세는 극복해야 할 세계로 여긴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윤회 (시간의 바퀴)의 만다라 (우주를 상징하는 원) 출처: 프랑스국립박물관

 

- 소크라테스의 영혼 불멸 사상, 니체의 비판

플라톤의 저서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사후세계에 대하여 이성적으로 논리정연하게 설명할 영역이 아니라고 전제를 하고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과 세계를 알려고 노력하고 절제하며 정의와 용기를 갖추기를 주문한다. 그래야만 영혼이 순수해지고 저 세상에서 행복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의 정신을 타락시켰고 아테네가 인정하지 않는 신을 아테네에 유포했다"는 죄목으로 500인 대배심원으로 부터 사형선고를 받는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탈출시켜려는 친지들에게 "법은 준수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탈출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기꺼이 독배를 마신다.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께 닭 한 마리를 빚지고 있으니 빚을 갚아달라”는 말을 하고 죽는다. 소크라테스 자신은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충분히 정화되어 확실히 저 세상에서 행복하리라는 확신으로 독배를 마신 걸까?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술의 신이다. 의술의 신에게 빚을 졌다는 것은 치료를 받았다는 것인데 죽음으로 치료가 된다는 것은 삶을 포기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라고 니체는 해석했다. 소크라테스는 삶을 사랑했고 열정도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죽기 직전에 독배를 마시며 정신이 혼란스러워 삶에 대한 본심을 내뱉었던 것이다. 그는 삶을 증오했고 원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소크라테스의 죽음」…프랑스의 화가 자크 다비드의 작품. 1787년 제작.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 장자…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한 적극적 대화

 

「제물론(齊物論)」을 보면,

여희라는 여인이 진나라로 잡혀갔을 때 울다가 진왕과 침상을 같이하고는 맛있는 고기를 먹게 되자 자신의 눈물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내가 죽은 사람들도 처음에 삶에 집착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 것을 알겠는가? 생사라는 관념에 대해 삶을 기뻐하고 죽음을 싫어함이라는 태도를 문제 삼고 있다. 남과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나를 살아 있는 나로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으며 내가(吾) 내자신(我)을 잃었을 때(吾喪我) 나는 비로서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

 

「대종사(大宗師)편」에는,

자여에게 병이 나서 자사가 병문안 갔다. 자여가 말했다. ‘위대하도다. 저 조물자(造物者)여! 나를 이처럼 구부러들게 하다니! 곱사등이 등에 생기고 오장이 위에 있고, 턱은 배꼽 아래 숨고, 어깨는 정수리보다 높고 상투는 하늘을 가리킨다.’ ‘아! 조물자는 또 나를 이처럼 구부러들게 하는구나!’

자사가 말했다. ‘자넨 그것이 싫은가?’ ‘아니. 내가 어찌 싫어하겠는가! 점차 나의 왼쪽 팔을 화(化)하게 하여 닭이 되게 한다면, 나는 그에 따라 새벽 때를 알리겠네. 점차 나의 오른쪽 팔을 화(化)하게 하여 탄환이 되게 한다면, 나는 그에 따라 올빼미구이를 구하겠네. 점차 나의 궁둥이를 화(化)하게 하여 바퀴가 되게 하고 나의 정신을 말이 되게 하면, 나는 그에 따라 그것에 올라탈 것이니, 어찌 따로 멍에를 매겠는가! 무릇 삶을 얻는 것은 시간의 흐름의 한 때이고, 삶을 잃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순응한 결과이네. 태어난 때를 편안히 맞이 하고 죽음에 순응한다면, 슬픔이나 즐거움 등의 감정이 어찌 밀려올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옛날에 말하던 “거꾸로 매달린데서 풀려남[縣解]”이라는 것일세. 스스로 풀려날 수 없는 자는 사물[物]에 묶여 있기 때문이네. 무릇 사물이 자연적 과정을 이길 수 없는 지가 오래거늘, 내가 또 어찌 싫어하겠는가!’

▲ 강원 횡성군 우천면 정금리에서 삶과 죽음을 테마로 한 국내 유일의 전통 장례문화 축제인 '회다지소리 민속문화제'가 지난 4월 열렸다. 사진은 지난 11일 회다지를 재현하는 행사 모습. /연합뉴스 <횡성군>

 

얼마 지나지 않아 자래에게 병이 나서 숨을 헐떡이며 곧 죽을 것 같았다. 그의 아내와 자식들이 빙 둘러싸고 흐느껴 울었다. 자리가 병문안 가서 말했다. ‘쉬이! 물러들 가시오! 화(化)를 방해하지 마오!’ 그는 문에 기대어 자래에게 말하였다. ‘위대하도다. 조화(造化)여! 또 자네를 무엇으로 만들고, 자네를 어디로 데려가려는가? 자네를 쥐의 간으로 만들려나? 자네를 벌레의 팔뚝으로 만들려나?’

자래가 말했다. ‘부모가 자식에게 동서남북 어디를 명하든 자식은 그것을 따르게 되지. 하지만 음양(陰陽)이 인간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정도가 아닐세. 음양이 나를 죽음에 가까이 가게 하는데도 내가 듣지 않는다면 내가 버릇없이 구는 것일 뿐, 음양에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무릇 대지는 형체로써 나를 실어주었고 삶으로써 나를 수고롭게 했으며 늙음으로써 나를 편안하게 해주고 죽음으로써 나를 쉬게 해준다네. 그러므로 내가 삶을 좋다고 여기는 것은 바로 나의 죽음을 좋다고 여기는 바로 그 근거가 되지. 지금 위대한 대장장이가 쇠붙이를 녹여 무언가를 만들려는데, 그 쇠붙이가 뛰어올라 “나는 꼭 막야()와 같은 명검이 될 테야”라고 한다면, 그 대장장이는 필시 그것을 상서롭지 못한 쇠붙이라고 여길 것일세. 지금 한번 인간의 형체로 주조되었다고 해서 “인간일 될 거야, 인간이 될 거야”라고 말한다면, 저 조화자(造化者)는 필시 상서롭지 못한 인간이라고 여길 것일세. 지금 하늘과 땅을 큰 용광로로 삼고, 조화(造化)를 위대한 대장장이로 삼는다면, 어디를 가든 안 괜찮겠는가! 편히 잠들었다 화들짝 깨어나리라!’

 

장자는 생사라는 관념의 매개를 통해 죽음과 허구적이고 관념적으로 관계하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문제는 삶은 즐겁고 죽음은 슬프다라는 삶과 죽음에

대한 논리에 종속된 삶의 태도이다. 죽음 이후 영혼이나 자아 또는 아뜨만이란 주체를 인정하지 않고 몸은 완전히 해체되어 버린다. 왼쪽팔이 닭이 되고, 오른쪽팔이 탄환이 되며 궁둥이는 바퀴가 되고 정신은 말이 된다. 혹은 몸이 쥐의 간이 되거나 벌레의 팔뚝으로 화한다 한다. 종차를 벗어나서 변화할 뿐아니라 유기물이 무기물이 되기도 한다. 음양의 조화에 따라 무엇으로 화하던지 기꺼이 변화에 동참하겠다는 태도이다. 이로써 삶과 죽음 모두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인다. 기존의 종교와 철학자들의 사후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 준다.

 

「지락편」에서는,

장자의 아내가 죽자 혜자가 조문을 갔는데 장자는 두 다리를 뻗고 앉아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자네와 이제껏 같이 살아온 아내가 죽었는데도 곡은 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다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네. 아내가 처음 죽었을 때야 나라고 어찌 슬프지 않았겠나? 하지만 그 처음을 돌이켜 보건대 본시 삶이란 없었던 게고 삶만 없었던 게 아니고 형체마저 없었던 게지. 형체뿐만이 아니고 기라는 것조차 없었던게야. 흐릿하고 아득한 속에 섞이어 있다가 그것이 변하여 기가 있게 되고, 그 기가 변하여 형체가 생겼으며, 형체가 변하여 생명이 생겼고 이제 다시 변하여 죽은 것이지. 이는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이 서로 자리를 바꾸며 운행하는 것과 같은 것일세. 그 사람은 천지라는 거대한 방 속에서 편안히 잠들고 있는 것이야. 그런데 내가 큰소리로 운다면, 내 스스로 하늘의 명에 통달하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곡을 그친 것이네."

 

장자가 초나라로 가다가 앙상한 해골을 발견했다. 그는 말채찍으로 해골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대는 삶을 탐하여 도리를 잃어 이리 되었는가? 나라를 망쳐 처형되어 이리 되었는가? 선하지 않은 행동을 함으로써 부모나 처자들에게 오명을 남긴 게 부끄러워 이리 되었는가? 아니면 춥고 배고픈 나머지 병이 들어 이리 되었는가?

그리고나서 해골을 베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해골이 나타나 말했다.

"조금 전 당신은 마치 변사 같더군. 당신이 한 말은 모두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괴로움일 뿐, 죽어 버리면 그런 게 없어진다네. 죽음에 대한 이야기 좀 들어 볼텐가?"

"그럽시다."

"죽음의 세계에서는 위로는 임금이 없고, 아래로는 신하도 없으며, 또한 사계절의 변화도 없이 다만 천지와 수명을 같이 하는데, 임금 노릇하는 게 즐겁다고는 하나 이만 못 할 것이네."

" 내가 사람의 목숨을 관장하는 사명신에게 부탁하여 당신의 육체를 재생시켜 뼈와 살과 살갗을 갖추게 하고 당신의 부모 처자와 마을 사람들에게 돌아가게 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원하겠소?"

해골이 눈쌀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 어찌 임금 노릇하는 즐거움을 버리고 다시 인간 세상의 괴로움을 겪고 싶겠나!"

 

이제 죽음에 대한 장자의 생각을 정리해보면 음양의 조화에 따라 몸에 형체를 받아 사는 것은 사람이 죽으면 여러 물체로 유기물로 또는 무기물로 해체되어 버리는데 나란 실존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기독교나 불교 그리고 힌두교에서는 나의 죽음이후 영혼으로나 또는 윤회를 통하여 새로운 나란 주체로 다시 태어남과 비교해보면 장자에서의 죽음은 나란 주체가 완전히 해체된다는 점에서 현세에서의 나란 존재는 비장하리만큼 소중하다.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어느 것을 받아 들이냐는 본인이 선택할 문제다. 단지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생각이 들지는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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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민 2017-12-19 19:14:03
네번죽고 네번 태어남은 허구일까? 육신으로태어나 자궁에서 죽고, 육체의 율법행위에서 주고 세례로 거듭나 살며, 사망의 종에서 죽어 십자가에 못박혀 생명으로 부활하며, 지정의 혼의 죽음으로 성령의 전에 생명의 건축으로 지어져 주님과 연합할때 살며, 재림 싶판주 오실 때 구원으로 들려올라가 살며, 백보좌 심판에 벌아닌 상급받아 영생으로 살며 새하늘새땅을 누릴 것이라. 난 네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