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등의 불빛이 대한민국 깨달음의 계기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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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등의 불빛이 대한민국 깨달음의 계기가 되기를…
  • 강낙규 기술보증기금 이사
  • 승인 2015.12.08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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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와 함께한 연등축제③> 기존의 것들을 깨뜨려 밝음으로 이끌다

강낙규 (기술보증기금 이사)

7월1일부터 시작한 강낙규 기술보증기금 이사의 ‘철학, 축제에 빠지다’ 연재 시리즈가 이번 회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6개월간 매주 게제된 연재물은 ①연천 구석기축제(들뢰즈) ② 도자기축제(공자· 장자) ③춘천 마임축제(니체) ④무주 반딧불 축제(칸트) ⑤보령 머드축제(헤겔) ⑥화천 산천어 축제(맹자), ⑦함평 나비축제(장자) ⑧연등축제(붓다)의 순으로 전개됐습니다. 그간의 연재물은 「오피니언뉴스」에서 볼수 있습니다. /편집자주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 공(空)론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는 부파 불교의 사상적 특징을 보여준다. 영원한 실체에 대한 갈망으로 형이상학적 실체를 도입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3세에 걸쳐 법의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75가지 종류의 법(法 다르마)이 근본적 실체다. 75가지 법들이 서로 연관되어 드러난 것이 현상계이다. 현상계의 모든 존재들은 실재가 아니라 실재들의 결합으로 생긴 가상에 불과하다. 현상계의 사물들을 가능하게 하는 75법은 실체로서 존재하며 생성소멸(生成消滅) 되지 않고 항상 존재하는 항존적(恒存) 실제이다. 현상적 존재들은 불생불멸하는 무자성(無自性)의 존재이다. 자성이란 만들어지지 않고 다른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성립된 것을 말한다.

반면 현상적 존재들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존재로서 75법은 생성소멸하지 않고 본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실체이다.

따라서 모든 것이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적 존재들만 연기할 뿐 현상적 존재들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 실체로서 75법은 자성을 지닌 존재가 된다.

 

나가르주나(Nagarjuna 龍樹 150~250)는 모든 것은 연기(緣起)하는 것이며 자성(自性)을 지닌 불변하는 존재는 없다며 설일체유부를 비판한다. 나가르주나가 주장하는 공(空)이란 자성을 지닌 존재란 어떤 것도 없고 오직 연기를 통해서 형성된 현상적 존재들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설일체유부의 실재론과 나가르주나의 공(Sunyata 空)론은 세계를 구성하는 불변적 존재가 있느냐 없느냐의 논쟁이 된다. 따라서 공론은 고정된 실체를 부정하며 모든 것은 인연화합(因緣和合)의 연기에 의해서 형성되었음을 주장한다. 나가르주나는 5온 - 색, 수, 상, 행, 식(色, 受, 想, 行, 識)도 공하다고 주장한다. 집착을 낳는 불변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세상을 집착 없이 바라보라고 한다. 주장이나 이론에 의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중도에 맞게 적절하게 바라보면서 잘못된 것을 깨뜨리고 올바른 것을 드러낼 수 있다고 한다.(破邪顯正) 모순을 수용하고 포용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의 삶의 방식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와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에서 모순적 언어를 통해서 자신의 의도를 상대에게 올바로 전달할 수 있는 역설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말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항상 말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으며 이러한 역설과 모순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인연으로 발생하지 않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일체의 존재는 공(空)아닌 것이 없다. 인연으로 생겨난 존재는 공하다. 또 그것은 임시로 시설된 것(가명 假名)으로 이것은 또한 중도(中道)의 이치다.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空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중론 中論>

그러므로 나가르주나는 어떤 존재도 인연에 따라 생기지 않은 것은 없으므로 모든 존재는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

현상적 존재의 본질이나 근원으로서 실체가 없다는 것은 현상세계를 인정하되 그것의 실체성과 자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경험적, 현상적 존재는 불생불멸, 불상부단(不常不斷)하는 무자성(無自性)의 존재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이런 존재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방편이나 수단에 집착하게 되면 진리를 볼 수 없고, 방편이나 수단을 통하지 않고서는 진리를 드러낼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의식구조다. 나가르주나는 이러한 모순이나 역설을 통해서 근원적 진리를 말하고 있다. 인간의 언어는 한계이면서 동시에 초월과 탈주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Heidegger)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듯이 언어가 없이는 진리를 드러낼 방법이 없다.

“생겨나지도 소멸하지도 않으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다. 능히 이런 인연법을 말씀하시어 온갖 희론(戱論)을 잘 진별 시키시도다. 내가 머리 조아려 부처님께 예배하오니 모든 설법 가운데 제일이로다.” 팔불중도론(八不中道論)의 공(空)과 연기의 실체성을 비판한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부이(不一不異) 불래불출(不來不出)의 팔불(八不)은 대립된 두 주장을 다 부정하면서 공을 드러낸다.

모든 것이 공한 것이며 모든 것이 공하다는 주장자체도 공하다고 볼 때 비로소 모든 것이 공하다는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태도는 공공(空空)이 된다. 공이란 표현은 단지 진정한 뭔가를 지칭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의 방편으로서 공이라고 잠정적으로 불려지는 것이다.

공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뭐라고 부르는 순간 그것 자체를 지시하지 못하고 어긋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잠정적으로 공이라는 가명으로 부르는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모든 것을 팔불중도(八不中道)에 입각해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중론은 이론서가 아니라 실천행이다. 나가르주나는 현상적, 경험적 자아를 불생불멸하는 자성을 지니지 않은 존재로 파악한다. 따라서 자성을 지닌 고정된 대상이나 자아는 결코 존재하지 않고 모든 존재나 자아는 연기에 의해서 형성된 자성 없는 존재일 뿐이다.

“가는 자는 가지 않는다. 去者不去”

가는 자를 실체로 생각하면 오류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공하기 때문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아이가 엄마를 낳느냐 엄마가 아이를 낳느냐? 아이를 낳은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지, 엄마가 있어 아이를 낳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낳지 않은 여자를 엄마라 부르지 않듯이 인연에 따라 아이와 엄마가 동시에 탄생 할 뿐이다. (因果의 同時性) 이것이 공하다는 것이다. 공은 실체가 아니다. 무자성(無自性)이다.

나가르주나는 고통의 근원은 집착할 고정된 실체가 없음에도 마치 고정된 실체가 있는 듯이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집착할 고정불변의 대상이 없다는 것을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 적정열반(寂靜涅槃)을 인식하고 이를 공론과 연기법을 통해 실천하고 자신의 본성이 곧 불성임을 깨달을 때 고통으로부터 해탈과 자유를 얻게 된다.

절대적 존재를 부정하는 공론에 근거하여 철저하게 인간의 자율성을 중시한다. 인간 고통의 근원이 바로 자기 자신의 잘못된 인식에 근거함을 밝힘으로써 그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초월의 길을 제시한다.

나를 자유롭게 하고 안식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다. 우리 자신이 우리 삶의 주인이며 우리 스스로가 삶을 고통스럽게도, 편안하게도 만드는 것이다.

▲ 공연에 집중하고 있는 아이 / 사진=강낙규

 

바수반두와 유식(唯識)

 

바수반두(Vasubandhu 世親 320~400)는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은 허구적이며 모든 것의 집착은 이분법에서 생긴다(自他不二)고 주장한다. 오직 식(識)뿐이고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와 남이란 대상은 의식 속에서만 존재하며 무분별의 세계가 자유로운 상태라고 한다. 집착은 너의 의식일 뿐이다. 유식은 마음 자체에 대한 분석이다. 의식의 8개 층은 전5식인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감각기관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임)과 대상을 인식하는 6식(意), 7식인 마나스(manas 자의식으로 분별하고 생각하는 의식) 그리고 8식인 알라야식(Alaya vijnana 저장의식 무의식)이다. 알라야식은 저장된 의식, 심층기억, 무의식이다. 알라야식이 집착을 낳는 무의식이다. “인간은 과거의 노예”란 바로 알라야식을 말한다. 화엄경, 법화경은 유식계의 경전들이다. 명상수행을 통하여 의식의 흐름을 다듬어 간다. 집착을 끊으면 커다란 거울과 같은 인식(大圓鏡)이 시작된다. 원효가 해골물을 마시고 시원하다가 생각했다가 다음날 썩은 물인 것을 알고는 토하는 것도 의식의 한 형태이다. 유식사상은 공사상의 존재론적 기반 위에서 인간의 의식을 다룬다.

자신이 존재해야만 우주전체도 의미가 있다. 현재는 모든 것의 출발점으로 과거나 미래 보다 더 중요하다. 과거나 미래도 현재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 흘러간 과거를 쫒지 말고 오지 않은 미래를 기대하지 말라는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싯타르타는 8정도, 나가르주나는 공(空), 바수반두는 알라야식을 끄는 것이 깨달음에 이른다고 한다. 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내가 사는 것은 현재이지만 마나스나 알라야식은 과거를 산다.

 

마음은 세가지 양태를 가진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은 두루 따져서 집착하는 것으로 허망, 분별의 마음을 일컫는다.

의타기성(依他起性)은 다른 것에 의존해서 일어나는 것으로 모든 집착의 뿌리인 알라야식이 대표적이다.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것으로 완성된 마음을 말한다.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은 대상과 주체의 구분(변계소집성)에서 벗어나서 알라야식을 끊고(의타기성) 주체와 대상으로 보지 않는 공(원성실성)의 상태로 가는 것이다.

▲ 조계사 등불 /사진=강낙규

대승불교는 중관불교와 유식불교 그리고 선불교로 이어진다.

원효는 일심(一心 한마음)이 진리의 본체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명칭으로 두 개의 문이 있다고 한다. 해탈된 맑은, 집착이 없는 진여문(眞如門 바다)과 탐욕과 생성, 소멸하는 생멸문(生滅門 파도)이다. 출가하면 생멸문에서 해탈하여 진여문에 이르나(自利) 대중의 깨달음을 위해 다시 생멸문으로 나아간다(利他). 원효는 중관불교의 공사상과 유식불교의 알라야식을 결합한다. 실체가 없으면 집착이 소멸하여 맑은 거울과 같이 되며, 알라야식인 무의식을 끊으면 맑은 거울처럼 자유와 해탈을 얻는다고 한다. 현실과 본질이 다르지 않고 본래 둘이 아님을 밝힘으로써 결국 어느 하나로는 마음을 파악할 수 없으며 기존교학을 통합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인간은 누구나 불성이 있기에 본래 깨달은 존재라는 본각(本覺)과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깨달은 상태로 나아가는 시각(始覺)에 대해 일심이문(一心二門) 통합적 시각을 제시하며 당시의 중관과 유식사상을 결합한다.

 

선불교는 불교정신의 회복을 위하여 스승과 제자사이의 대화나 생활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殺佛殺祖)는 우상파괴 사상을 함축하는 법어는 임제(臨濟 ?~867)를 통해 중국 선불교의 파격성을 보여준다. 경전과 법문을 통하지 않고 깨달음을 구하는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선불교 전통은 어떤 절대적인 것을 용납하지 않고 일체의 권위나 관념에서 벗어나 스스로 깨달을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깨달음의 이야기를 공안(公案)이라고 한다. 다른 공안을 들어보자.

혜림사의 단하스님이 사리가 있는지 없는 지를 확인하기위해서 대웅전의 목불을 태우는데 부처는 절대로 불을 태우면 안된다는 분별의 세계를 깬다.

여기 몽둥이가 있는데 몽둥이가 있다면 3대를 때리고 없다고 해도 3대, 침묵을 해도 3대를 때린다고 할 때 몽둥이가 있느냐고 묻는다. 몽둥이에 집착하면 무조건 맞게 된다. 하늘에 흰 구름이 있다든지, 꽃이 아름답게 피었다든지 집착에서 벗어나는 수천가지의 것이 답이 될 수 있다.

 

한국 불교는 조선시대 이후로 선불교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해왔고 깨달음의 방법도 화두를 잡고 수행하는 간화선이 주류를 이룬다. 간화선이야 말로 고정된 틀을 일체 용납하지 않는 참다운 자유를 온전하게 구현할 방법이라고 한다.

 

붓다는 기존의 자명한 것들 예를 들면 법, 도덕, 윤리, 사상, 제도를 깨뜨려서 깨달음에 도달한다. 세상은 우리가 규정해서 보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화하면 안된다.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생각들이 자명하지 않다. 세상 모든 것은 인드라의 그물망으로 연결된 연기의 세계로 깨달음은 무명에서 밝음으로 이끈다.

 

연등은 등불과 빛으로 이러한 깨달음을 상징하며 붓다의 깨달음의 빛이 대한민국 백성 모두의 깨달음의 계기가 되고 나아가서 인류의 깨달음으로 나아가기를 기원해 본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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