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호의 책이야기] 서울의 원형을 탐구하다...염복규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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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호의 책이야기] 서울의 원형을 탐구하다...염복규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8.08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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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945 도시계획으로 본 경성의 역사, 식민지 수도는 어떻게 메트로폴리스가 됐나
현대 서울은 일본 제국이 설계한 식민지 시기 경성의 기본 골격과 변화의 방향에서 기원
오래되고 낡아서 혹은 피식민의 흔적이라고 부수고 묻어버린 과거의 흔적 아쉬워
경성시가지계획 기본 구상도.'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중
경성시가지계획 기본 구상도.'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중

 

[오피니언뉴스=강대호 칼럼니스트] 서울이라는 도시의 과거가 흥미롭다. “내 고향은 어디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고부터 생긴 관심이다. 내 부모님과 형제들은 모두 경상도에서 태어났고 나만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래서일까 나도 한때 가족들의 고향인 경상도를 내 고향이라 말하곤 했다. 하지만 돌아가신 부모님 성묘를 하러 선산(先山)에 갈 때마다 문득 물 한잔 얻어 마실 친인척 한 명 없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가족들의 고향이 과연 내 고향이 맞을까 하는 의문이 든 것이다.

먼저 ‘고향’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디가 떠오르냐고 내게 물어보았다.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의 여러 동네가 떠올랐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 그 동네들의 모습은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 아주 달랐다. 어쩌다 저렇게 달라졌는지 궁금해서 그 동네들을 탐구하고 답사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서울의 예전 모습을 많이 알게 되었다.

지금 서울의 영역은 정부가 세운 도시 계획에 따라 조금씩 때로는 크게 확장되었다. 그 계획은 조선 시대에도 있었고 지금 서울이라 불리는 많은 지역은 일제의 조선 총독부가 편입한 곳이다. 이번 서울 답사 과정에서 서울 도시 계획의 원형이 궁금했는데 마침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이 있어서 많은 참고가 되었다.

이 책을 쓴 염복규는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이며 근대사와 도시 역사 연구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은 조선 총독부가 계획하고 실행한 경성 도시 계획의 흐름을 설명한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현재의 서울을 바로 보려면 식민지 시대의 경성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마주하는 “도시 개발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식민지 시기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이데아 펴냄.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이데아 펴냄.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의 많은 부분은 조선 총독부가 세운 ‘경성시구개수(京城市區改修)’의 개요와 그 진행 과정을 설명한다. 그중 ‘종묘관통선’ 부설이라는 “식민지 도시에서 전통적 상징과 근대적 도시 개발의 충돌”이 두드러진 사례를 자세히 소개한다. 또한 경성의 확대와 그 개발 과정 중에 발생한 여러 이익 집단들의 갈등도 살펴본다.

이 책은 오늘날에도 당시의 흔적이 남아 있는 청계천 복개 사업과 돈암동, 대방동, 이태원 등 교외 주거지역 개발 사업도 설명한다. 그 밖에도 서울로 몰린 도시 빈민에 대한 대책, 전쟁을 대비한 지역 정비, 그리고 병참 기지인 경인 지역으로의 경성 세력권, 즉 수도권 확대 계획 등을 다룬다. 어쩌면 오늘날 들어도 어색하지 않은 많은 정책이 조선 총독부 시절부터 시작되었다고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은 설명한다.

식민지 시기 경성은 수도로서 특별한 지위를 잃었다. 일제의 ‘외지’인 식민지 조선의 경기도 도청 소재지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 500여 년간 수도였던 서울의 ‘역사성’을 일제가 무시할 수는 없었다. 또한 조선 총독부를 비롯한 식민통치의 핵심 기구가 밀집한 도시로서 경성은 식민지 ‘수도’ 역할을 수행했다. 이런 가운데 일제는 경성의 도시 공간을 개조하기 위해 여러 시도를 지속했다. 도심개발을 위한 도로망 구축이 한 예다.

현재 안국동에서 이화동에 이르는 율곡로 일부 구간은 종묘와 창덕궁을 가로지르고 있다. 이 도로는 1932년에 완공되었다. 그 이전에는 창덕궁과 종묘가 한 몸이었다. 당시 창덕궁과 종묘 사이를 자르는 도로 부설을 두고 조선 황실(순종)과 전주 이씨종약소를 중심으로 한 구(舊) 지배세력과 일반 식민지 조선인의 시각은 달랐다. 일반 조선인들은 ‘종묘의 존엄’보다는 ‘교통의 편리’라는 근대적 개발의 필요성을 지지했다고.

창덕궁·창경궁-종묘 통과 구간의 도로 부설에 대한 조선어 언론의 시각은 적어도 종묘의 전통적 위상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정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교통의 편리’라는 ‘근대적 기준’을 식민지 권력과 공유하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준에 따라 도로 부설이라는 ‘근대적 개발’에서 식민지민을 차별한 식민지 권력을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84쪽)

일제는 경성의 인구 급증에 대비하기 위해 주거지역 확대도 꾀한다. 그 목적의 하나로 근대적 도시 중산층을 위한 주거지역인 ‘돈암지구’와 전원도시인 ‘남산문화주택지’가 개발된다. 이 과정에서 택지 개발과 도로 부설로 인한 갈등도 생긴다. 21세기의 도시 개발과 마찬가지로 토지 수용 때문에 주변부로 밀려나는 원주민 문제와 철거민 발생으로 인한 빈민 주거의 문제도 함께 등장한 것이다.

새롭게 주택지로 조성된 안암정(지금의 안암동)에 새집을 지어 이사 온 (중략) 이들은 같은 넓이의 택지에 같은 형태로 지어진 집을 같은 시기에 구입한, 즉 연령대나 경제력이 비슷하고 분가한 핵가족인 것이다. (중략) 이들 “교원, 회사원, 음악가, 화가, 각기 그럴듯한 직업을 가진 젊은 아버지”들은 전차를 타고 시내로 출퇴근을 한다. 이들은 그전부터 이야기되던 “아츰밥만 먹으면 시내로 일을 하러 드러왓다가 오후 4, 5시가 지나야 비로소 잠자리를 찾아 돌아가게”되는 도시인,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식민지 시기 성장한 새로운 세대의 근대적 도시 중산층이었다. (278-279쪽)

‘팔보(八甫)’라는 필자가 1943년 ‘朝光’에 실은 ‘서울雜記帳’의 한 구절로 ‘안암정 돈암지구’의 모습을 그렸다. 지금의 돈암동과 동선동이다. 대학로에서 한성대를 지나면 보이는 오래된 주택들이 일제 말기에 조성된 신시가지였다. 위 인용문의 지명과 문체를 고치면 21세기 들어 개발한 어느 신도시의 풍경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깔끔히 개발된 신시가지에 사는 어느 중산층이 떠오른다.

 

토막민의 집. 1875년부터 1945년까지의 사회상을 볼 수 있는 사진집 '한일병합사'  중 한일병합 이후 토지를 빼앗긴 채 도시로 온 토막민들의 집. 사진=눈빛출판사 제공,연합뉴스
토막민의 집. 1875년부터 1945년까지의 사회상을 볼 수 있는 사진집 '한일병합사' 중 한일병합 이후 토지를 빼앗긴 채 도시로 온 토막민들의 집. 사진=눈빛출판사 제공,연합뉴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신도시를 개발하면 원래 살던 사람들을 밀어내는 건 같았나 보다. 개발 지역에는 오래전부터 터 닦고 살던 원주민도 있지만 집다운 집 없이 얼기설기 지붕과 벽만 지은 곳에서 사는 사람도 많았다.

식민지 시기 경성지역의 도시빈민층을 대표하는 명칭은 ‘토막민(土幕民)’이다. ‘토막에 사는 사람’이라는 명칭이 보여주듯이 토막민은 그 주거 형태를 특정한 지칭이다. (중략) 경성부는 1920년대 말부터 토막민 통계를 내기 시작했다. 통계를 낸다는 것은 ‘토막민은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기 시작했다는 뜻인데, 그것은 ‘토지의 불법 점유자’, 그리고 ‘도시 미관을 해치는 자’라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좀더 나아가면 토막민은 “사회에 대한 반항적 감정이 있는 무식한 빈민이 주이며 일부 좌경적 사상을 가진 자”, 즉 일종의 ‘위험 분자’로 인식되었다. (303쪽, 305쪽)

일제는 토막민 거주 방식 개선 방안도 도시 계획에 반영했지만 그들을 위한 정책은 아니었다. 다만 문제를 품고 있고 갈등을 일으키기 쉬운 토막민들을 관리하기 위해 세운 대책이었을 뿐이다. 토막민 혹은 도시 빈민을 위험하다고 보는 시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역사학자인 저자는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식민지 시기’와 ‘근대’의 흔적을 함께 발굴한다. 서울이 피식민을 겪으며 근대적 의미의 도시로 발전한다는 의미에서다. 그 실체를 “일본이 도입한 서구 혹은 일본을 경유한 서구”로 본다. “한국적 근대의 비밀은 서구와 직접 대면하지 못하고 일본을 경유한 서구와 대면했던 사정을 이해”했을 때 비로소 풀린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을 읽으며 식민지 도시의 역사성이나 탈근대 혹은 현대화 과정에 관심을 가지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과 같은 서울의 원형을 다룬 문헌을 통해 현재와 당시를 비교해 보는 것이 더 흥미롭다. 다만 오래되고 낡았다고 혹은 피식민의 흔적이라고 그냥 부수거나 묻어버린 그래서 지금은 찾기 어렵게 된 과거의 흔적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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