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진 칼럼] 한은의 최종대부자 역할, 보다 정교하고 신속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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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진 칼럼] 한은의 최종대부자 역할, 보다 정교하고 신속해야
  •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 교수
  • 승인 2020.07.21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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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 코로나위기 대책, 시장 안심시키기에 충분하지도 정교하지도 않아
4월 '금융안정특별대출', 대출신청 한건 없어...정책 절실함 없는 탓
구두 약속 대신 '보증행위' 통해 금융시장 진정시켜야
한은의 위기대응능력 제고를 위해 한은법 개정도 필요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 교수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 교수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 교수] 지난 금요일(17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는 상당히 중요한 결정을 했다. 저신용등급 회사채·CP 매입을 목적으로 특수목적기구(SPV)에 총 8조원을 대출키로 한 것이다. 두 달 전에 예고했던 일이 굉장히 늦게 실행되는 것이지만, 의미는 있다. 한은이 영리기업에 대출하는 것은 외환위기 이후 처음이다(코로나19 위기 직후 한은은 증권사·보험사 등에도 대출할 의사를 밝혔으나 아직 집행실적이 없다).

같은 날 미 연준은 정반대로 움직였다. ‘기간산업 대출 프로그램(Main Street Lending Program)’를 통해 영세한 비영리단체까지 지원하기로 했다. 미 연준은 이제 종업원 10명 이상의 사립학교, 병원, 교회, 정당, 양로원, 자선단체 등에도 대출한다. 경제위기 속에서 중앙은행은 영리기업과 비영리단체 중 어떤 쪽을 구제해야 하는가?

모든 정책에는 철학과 원칙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금융위기에 중앙은행이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해 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앙은행이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아무 일이나 벌이면 위험하다. 한국은행은 교회, 정당, 학교까지 대출하는 미 연준을 흉내 내서는 곤란하다. 그러나 좀 빨리 움직여야 한다. 저신용등급 회사채·CP를 매입하기로 해 놓고, 두 달 씩 시간을 끄는 것은 곤란하다. 아울러 모든 대책들은 좀 더 구체화해야 한다.

끝으로 한은의 업무범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상업은행은 보증업무까지 할 수 있는데, 한은은 그것이 금지되어 있다. 주요국 중앙은행들처럼 한은이 보증업무를 할 수 있다면, 유동성을 직접 공급하지 않고서도 금융시장을 안정시킬 수 있다. 그래서 한은법 개정이 필요하다.

최종대부자 개념이 흔들려서는 곤란

경제위기를 헤쳐 나가는데 재정의 여력이 부족하다보니, 중앙은행에 대한 기대가 크다. 그와 함께 오해도 커지고 있다.

중앙은행의 역할에 대한 오해 중의 하나가 ‘최초투자자’라는 개념이다. 금통위가 SPV에 대출하기로 의결한 날, 김용범 기재부 차관은 “과거 중앙은행의 역할이 ‘최종대부자’였다면, 이번과 같은 위기에서는 ‘최초투자자’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한은을 칭찬하려는 의도였겠지만, 그 말은 틀렸다.

최종투자자(market maker of last resort)라는 말은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국채뿐만 아니라 회사채나 MBS, MMF 시장까지 살린 것을 두고 생긴 말이다. 그러나 ‘최초투자자’라는 말은 없다. 민간 채무증서를 중앙은행이 앞장서서 매입하면, 재무건전성이 악화되고 도덕해이가 생기기 때문이다.

자금회수 가능성이 의심스러운 민간 채무증서를 중앙은행이 매입할 때 가장 큰 문제는 '도덕적 해이'다(그래서 한은법에서는 이를 엄격히 제한한다). 그것은, 태풍을 만난 농사꾼을 도울 목적으로 땅에 떨어진 과일을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농사꾼은 불량 과일을 처분할 생각만 할 것이고, 그런 투자는 백해무익하다.

위기에 처한 농사꾼을 제대로 도우려면, 불량 과일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영농자금을 대출해야 한다. 그리고 다음해 좋은 과일이 수확될 때까지 농사꾼의 재배를 부지런히 감시하고 독려해야 한다. 그것이 농사꾼과 대출자가 함께 성공하는 비결이다. 중앙은행의 그런 일을 ‘최종대부자’라고 한다.

미 연준은 회사채, CP, MBS MMF의 투자자가 아니다. 한국은행도 저신용등급 회사채·CP를 직접 사지 않는다. SPV에 대출한 뒤 SPV를 통해 회사채·CP 발행기관을 압박하고 채근한다. 이처럼 대출을 통한 중앙은행의 유동성 공급을 신용완화(CE, credit easing)라고 하며, 이는 부도가능성이 없는 국채를 단순 매입하는 양적완화(QE)와 다르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저신용 회사채· CP 매입을 위한 '금융안정특별대출'을 발표해놓고, 두달이 지나도록 매입을 위한 구체적 조건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저신용 회사채· CP 매입을 위한 '금융안정특별대출'을 발표해놓고, 두달이 지나도록 매입을 위한 구체적 조건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미 연준은 이제 모범생 자격을 상실

최종대부자인 중앙은행이 대출채권의 회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기술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진짜 중요한 문제는, 최종대부자 역할이 남용되는 것이다. 예산을 통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중앙은행이 떠맡을 때 그런 일이 생긴다. 그럼으로써 통화정책이 재정정책에 종속된다.

오늘날 현대화폐이론(MMT) 지지자들은 그런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성장과 고용을 위해서라면,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정부가 세금으로 해야 할 일을 중앙은행이 맡게 되면, 입법부의 예산심의가 무의미해진다. 입법부와 행정부 사이에서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깨지는 것이다. 이는 삼권분립에 기초하는 민주주의의 와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사립학교, 병원, 교회, 정당, 양로원, 자선단체까지 미 연준이 지원하는 것은 대단히 우려스러운 일이다. 공익과 고용을 이유로 중앙은행이 학교, 병원, 교회, 정당, 양로원 등 비영리단체까지 돌보는 것은 과거 전체주의 국가에서 있었던 일이다. 지금의 북한이 그렇다. 과거 독립성이 낮았던 한국은행도 비영리단체를 지원하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연준이 그토록 자랑하는 독립성은, 그 빛이 바랬다.

경제위기를 맞아 중앙은행이 영리기업을 돕는 것이야말로 차라리 정상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그런 점에서 증권사·보험사·SPV 등에 대출하는 한국은행은, 학교·병원·교회·정당 등에까지 대출하는 미 연준보다 훨씬 떳떳하다. 한국은행은 영리기업 여신에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저신용등급 회사채·CP 매입을 위한 SPV 대출은 좀 더 서두르는 것이 좋았다.

한은은 비상대책들을 장기화하고 정교하게 설계해야

코로나19 위기가 시작된 이후 각국 중앙은행들이 쏟아낸 대책들은 엄청나게 많다. 그런데 주요 선진국 중앙은행과 한은의 조치 간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유념할 필요가 있다.

코로나19 위기를 계기로 한은이 마련한 대책 중에는 장기 대출이 별로 없다. 대출한도와 대상기관, 담보물 면에서 상당히 완화적 조치를 취했지만, 대출기간은 기본적으로 1년 미만이다. 앞으로 실행될 SPV 대출만 최장 지원기간이 3년이다. 그러므로 한은 대출금이 금융기관들을 안심시키기에는 충분치 않다.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각종 대출 프로그램들을 단기와 장기로 구분하고 장기 프로그램은 3~5년 동안 자금을 회수하지 않는 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한편 선진국 중앙은행과 한은의 가장 큰 차이는 비상대책에 담겨 있는 구체성과 전문성이다. 코로나19 위기 발생 직후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경쟁적으로 도입한 각종 프로그램들은 전부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다. 생소한 고유명사가 너무 많아서 파악하기가 어지러울 정도다. 각 프로그램은 대출이나 매입의 조건을 매우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으며 서로 차별화되어 있다.

그에 비해서 한은은 기존 유동성 공급 채널들을 그대로 두고 대출이나 매입 조건들을 조금씩 완화하는 방식을 취했다. 어떤 기관에게 어떤 조건으로 얼마나 지원할 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이처럼 정책의도가 계량화되지 않고 불투명하면, 정책효과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참고로 1992년 한은이 투신 3사에게 구제금융을 제공할 때와 1998년 외환위기 속에서 증권사·종금사를 지원할 때는 그 집행 내용이 구체적이었다. 정부가 미리 실행조건을 제시하며 요청했기 때문이다. 반면 한은 스스로 금융시장 안정대책을 마련할 때는 그렇지 않았다. 발표내용이 추상적이고 모호하다. 그 취지와 개요만 담겨있어서 건성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지난 4월 16일 임시 금통위 회의까지 소집해 도입한 「금융안정특별대출」 프로그램이 좋은 예다. ‘잔존만기 5년 이내 우량등급 회사채(신용등급 AA- 이상)’를 담보로 하는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특징은 신청 즉시 대출받을 수 있다는 대기성에 있다.

그 취지가 발휘되려면, '담보할인율(haircut)'이 정해져야 한다. 평소 한은과 대출거래가 없었던 증권사·보험사들에게는 그 정보가 특히 필수적이다. 그런데 한은은 이를 밝히지 않았다. 결정적 실수다. 담보할인율이 정해지지 않은 대기성 대출은 그림의 떡이요, 금융상품으로서는 '불완전상품'이다. 한은이 불완전 판매를 한 탓인지, 지금까지 대출신청이 한 건도 없다.

앞으로 실행될 저신용 회사채·CP 매입도 마찬가지다. 관계기관들이 합동으로 배포한 보도참고자료에는 구체적인 매입조건이 없다. ‘적정 금리수준’이라는 말만 있다.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된 지 닷새 만에 여러 가지 특별 대출 프로그램들을 신속히 도입하면서도 각 프로그램의 매입조건들을 하나하나 아주 구체적으로 밝힌 미 연준의 접근방식과는 천지 차이다.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한국은행은 지난 5월에 계획을 발표하고 두 달이 지나는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을 연구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요컨대 우리나라 정책당국자들은 프로패셔널리즘이 부족하다. 새로운 금융상품을 설계한 당사자로서 마케팅한다는 생각이 없고, 기관의 입장을 홍보한다는 마음만 가득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구체성과 절실함이 없다. 그런 자세로 일하는 한, 위기극복은 요원하다.

중앙은행의 회사채 매입계획에 관한 한국과 미국의 보도자료.미국이 한국보다 훨씬 구체적이다. 따라서 정책의도가 분명하고 효과도 크다.
중앙은행의 회사채 매입계획에 관한 한국과 미국의 보도자료.미국이 한국보다 훨씬 구체적이다. 따라서 정책의도가 분명하고 효과도 크다.

한은의 보증 활동도 허용해야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그랬지만, 이번 코로나19 위기에도 한·미 중앙은행간 통화스왑계약이 큰 역할을 했다. 그 계약을 통해 국내 금융시장에 실제로 달러 자금이 공급된 것은 훨씬 뒤였지만, 효과는 훨씬 빨랐다. 계약이 체결되었다는 뉴스가 나오자마자 외환시장은 안정을 되찾았다.

지난 4월 16일 한은이 증권·보험사에 여신하겠다는 의도를 밝힌 것도 마찬가지다. 주가연계증권(ELS)과 관련한 마진콜 때문에 증권사의 자금수요가 급격히 증가하고 금융시장은 경색조짐을 보였다. 그때 한은이 증권사에게 직접 대출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은 증권사 입장에서 보험에 가입한 것과 같았다. 그 때문에 금융시장은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중앙은행 당국자의 약속이 신뢰를 얻으려면, 좀 더 구속력이 있어야 한다. 보증(guarantee)과 같은 법률행위로 연결되어야 한다.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금융위기 시 보증행위를 통해 금융시장을 진정시킨다.

예를 들어 영란은행은 1987년 10월 ‘블랙먼데이’라고 불리는 주가폭락사태 때 중요 증권회사들에게 풋옵션(put option)을 발행했다. 당시 증권사들이 많이 보유하고 있던 국영기업 BP(British Petroleum)사 주식이 일정 수준 이하로 폭락하면, 영란은행이 매입하겠다고 선언(매입보증)했다. 그 선언 또는 풋옵션 발행 덕택에 증권사들은 현금을 확보하려고 여기 저기 기웃거리던 것을 중단했다. 그럼으로써 금융시장은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미 연준도 1999년말 Y2K 대책의 하나로서 RP거래에 관한 콜옵션(유사시 연준에게 RP거래를 요구할 권리)을 발행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는 증권대차거래에 관한 콜옵션(유사시 뉴욕 연준에서 국채를 차입할 권리)도 발행했다. 그때 미 연준은 경쟁입찰을 통해 콜옵션을 팔았다. 돈을 받으면서 금융시장의 안전판을 마련한 것이다. 이처럼 미국은 미리 예상되는 위기를 시장메커니즘을 통해 극복한다!

한은도 대출과 자산매입 이외에 옵션거래가 가능하다면, 금융위기 시 직접 유동성을 공급하지 않고도 금융시장을 안정시킬 수 있다. 이 경우 은행·증권·보험사들은 한은과의 옵션거래에 따르는 비용과 편익을 면밀히 분석하게 된다. 금융기관들이 그런 합리적 행동을 취할수록 패닉 가능성은 낮아진다. 결과적으로 금융시장의 복원력(resilience)이 커진다.

이런 점에서 한은의 보증업무를 허용하고 정책수단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제21대 국회는 한은법을 개정해야 한다.

● 차현진 교수는 한국은행에서 36년째 근무하고 있는 금융전문가다. 한국은행 조사부, 자금부, 금융시장국 등 정책관련 부서를 거쳤고 워싱턴사무소장, 인재개발원장, 금융결제국장, 부산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대통령비서실과 미주개발은행(IDB) 등에서도 근무했다.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 '숫자 없는 경제학', '금융오디세이', '중앙은행 별곡', '법으로 본 한국은행' 등 다수의 저서를 집필한 금융 에세이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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