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진 칼럼] 고희 맞은 한은에게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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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진 칼럼] 고희 맞은 한은에게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 교수
  • 승인 2020.06.12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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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 교수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 교수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 교수] 한국은행이 창립 70주년을 맞았다. 기쁜 일이다.

한국은행은 우리 역사에서 세 번째 중앙은행이다. 1903년 고종 황제가 러시아의 도움으로 세우려던 ‘대한중앙은행’은 법을 만들어 놓고도 일본의 방해로 설립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식민통치 직전인 1909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제안에 따라 ‘(구)한국은행’이 세워졌다. 하지만 이듬해 일제강점이 시작되면서 조선은행으로 개명되었다. 그 조선은행을 폐지하고 설립된 것이 지금의 한국은행이다.

설립된 지 보름 만에 한국전쟁이 터졌고, 전쟁의 포연과 폐허 위에서 한국 경제가 우뚝 서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그 은행의 고희(古稀)를 축하한다.

한국은행법은 미 연준법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한은법은 중국, 일본의 중앙은행법이나 국내 다른 법률보다 훨씬 진취적이다.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라는 합의제 의결기구는 동양 사회에서 생각하기도 힘든,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그래서 한은법이 위헌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그렇다면 한은의 통화정책도 진취적이고 파격적일까? 이 글에서는 그 질문을 화두로 삼아서 몇 가지를 제안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은은 좀 더 진취적이어야 한다. 코로나19 위기를 맞아 흔히 ‘D의 공포’니, ‘R의 공포’니 하는 말을 한다. 그러나 한은이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L의 위험’이다. 노곤하거나(languorous), 힘이 빠진(languid) 모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과거에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경제발전의 엔진 역할을 맡았지만, 최근에는 역동성과 진취성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준다. 우리 경제가 코로나19 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 한은의 노익장이 절실하다.

사진=연합뉴스

중앙은행의 활동은 위기에 더 빛난다

영란은행은 현존하는 중앙은행 중 두 번째로 오래된 중앙은행이다. 프랑스와 전쟁(9년 전쟁) 중이던 1694년, 국가적 위기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공급하기 위해서 설립되었다. 태양왕 루이14세가 영국에 전쟁을 선포했을 때 영국은 고립무원이었다. 프랑스는 가톨릭 세계의 정신적·군사적 수호자임을 자처한 반면 영국은 일찍이 성공회를 설립하면서 가톨릭 세계에서 이탈했고,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 왕까지 축출했으므로 영국을 돕겠다는 이웃이 없었다. 

그때 설립된 것이 영란은행이다. 부자들에게서 전비를 조달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서 영란은행법은 “선박세, 주세 등 각종 조세수입을 담보로 프랑스와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150만 파운드의 전비를 자발적으로 융통하는 애국자를 우대하는 법”이라는 서문으로 시작한다.

이렇게 탄생한 영란은행이 국가적 위기에 어떤 활약을 했는지는 명목 GDP대비 자산비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유난히도 전쟁이 많았던 18세기 초, 유럽 대륙 전체가 전쟁(나폴레옹 전쟁)으로 홍역을 치렀던 19세기 초, 그리고 세계대전 중에는 그 비중이 20%까지 올랐다. 

21세기가 평화 속에서 시작될 때는 그 비중이 사상 최저 수준에 가까웠다. 그런데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19 위기를 맞으면서 역사상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높게 뛰었다. 21세기의 영국은 18세기와 19세기 초 프랑스와 전쟁을 치를 때처럼 영란은행의 자산팽창에 의존한다. 

자료=영란은행

과거 한은의 국민경제 기여도는 압도적

국가채무의 적정성과 지속가능성을 평가할 때 보통 국가채무비율(국가채무/명목 GDP)을 따진다. 그러나 그 비율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단점이 무척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시할 수 없는 지표다.

중앙은행 자산비중(중앙은행 자산/명목 GDP)도 마찬가지다.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지만, 중앙은행이 국민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몫을 측정하는 데 무시할 수 없는 지표다.

그 기준으로 볼 때 한국은행은 엄청나다.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2013년까지 한은의 자산비중은 세계에서 제일 높았다(양적완화를 하는 일본은행이 2014년 한은을 추월했다). 경제가 잘 돌아가게 하는 데 한은의 역할이 그만큼 컸다는 말이다. 수출이 늘어날 때 달러를 사들여 환율을 안정시키고, 대출을 통해서 성장과 투자를 유도했기 때문이다.

고인이 되신 박성상 한은 총재(제16대)가 '성장과 발전'이라는 책을 썼을 정도로 과거 한은은 자산팽창을 통해 경제성장의 디딤돌이 되는 것을 보람으로 여겼다(박성상 총재 자신이 소재부품육성을 위한 대출제도를 제안·도입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자료=한국은행, 세계은행
자료=한국은행, 세계은행

최근 한은의 국민경제 기여도는 하강 중

지금까지 한국은행 자산비중이 추세적으로 하락한 것은 두 번이다. 첫 번째는 1980년대 중반이었다(박성상 총재의 퇴임 직후다. 이처럼 이 비중은 총재의 철학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당시 미국 정부는 무역적자 축소 노력의 일환으로 한국에게 통상 압력을 가했다. 한은이 발권력을 동원해서 수출산업을 지원함으로써 불공정 무역을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은이 대출 상한(1994년 총액한도대출제도 도입)을 정하고, 이어 문민정부 때는 외환시장 개입을 자제했다. 그 결과 8년 동안 명목 GDP대비 한은 자산의 비중이 추세적으로 하락했다.

두 번째 비중 하락은 현재 진행 중이다. 2014년부터 6년째 매년 1% 포인트씩 하락하고 있다. 그 속도가 노태우·김영삼 정부 때와 똑같다. 우리 경제의 성장이 크게 둔화되어서 걱정이 많은데, 한은의 자산팽창은 그보다 더 힘이 없는 것이다. 혹시 한은의 자산팽창 둔화가 기운 없는 경제를 유발하는 것은 아닐까?

자료=한국은행
자료=한국은행

한은의 자산비중이 낮아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대출을 늘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금은행의 대출은 실물경제 활동에 맞추어 꾸준히 증가한다. 그런데 한은은 대출의 상한선을 정해 놓고 그것을 좀처럼 늘리지 않았다. 코로나19 위기를 계기로 최근 대출금 상한선을 10조원 늘렸을 뿐이다. 그 결과 실물부문을 향한 한은의 대출은 예금은행의 대출과 따로 움직인다. 실물경제를 향한 통화신용정책의 효율성을 스스로 저하시킨 것이다.

자료=한국은행
자료=한국은행

한국은행은 이런 결과를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할지 모른다. 대출활동을 “순수 유동성 조절기능을 발휘하는 대출제도로 가는 과도기적 형태”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우리나라의 통화정책(2005년, 편집인 이주열)', 100쪽). 그런 생각은 실물경제와 관계를 끊고 채권거래를 통해 금융기관들만 상대하는 통화정책을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대주의에 불과하다.

그런데 지금 선진국 중앙은행들은 실물경제를 최우선시 한다. 예를 들어 코로나19 위기를 맞아 미 연준은 ‘급여보호 프로그램(PPPLF)’을 통해 정부의 지급보증도 없이 6590억 달러를 쏟아 붓는다.

전통적인 시각에서 보면, 이것을 통화정책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재정정책의 영역이다. 한은의 모델이 되어왔던 중앙은행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제를 살리는 일에 악착같이 달려들고 있는 것이다(오죽하면 영란은행 대출제도 중에는 ‘수단과 방법(Ways and Means Facility)’라는 이름도 있다).

그래서 한국은행은 할 말을 잃는다. 평소 흠모했던 스승들의 외도와 일탈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위기를 계기로 한국은행은 사대주의를 깨고 환골탈태해야 한다. 

한은, 양적완화를 주저할 이유 없어

어느 성인 영화의 제목처럼 크기는 중요하다(Size matters). 그것을 버냉키 연준 의장은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 QE)라는 고상한 말로 표현했다. 다시 강조하건대, 2013년까지 명목 GDP대비 중앙은행 자산의 크기가 가장 컸던 것은 한국이다. 한은은 일찍이 양적완화(QE)가 아닌 자산팽창(AE, assets expansion)을 정책수단으로 활용해 왔다. 그런데 한은 자신은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기 것(대차대조표)의 ‘팽창’을 부끄러워했다. 이상한 사이즈 콤플렉스였다.

자료=한국은행, 미 연준,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그런데 2014년에는 일본은행이, 2016년에는 ECB가 한은을 추월했다. 올해부터는 명목 GDP 대비 자산비중 면에서 미 연준과 영란은행도 한은을 추월할 전망이다. 그런 상황에서 한은이 자기 것을 팽창시키는 일에 노곤하거나(languorous), 힘이 빠지면(languid) 곤란하다. 상대적으로 크기가 왜소해지는 것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코로나19 위기를 맞아 지금 한국 경제는 70세 된 한은의 노익장을 기대하고 있다. 일흔 살에 불과한 한은은 다른 중앙은행에 비하면 여전히 ‘탱탱하게’ 젊다.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기준금리의 추가인하에 어려움을 느끼면서 새로운 정책수단을 갈구하는 한은이 명심할 말이 있다.

“Size matters.”

 

● 차현진 교수는 한국은행에서 36년째 근무하고 있는 금융전문가다. 한국은행 조사부, 자금부, 금융시장국 등 정책관련 부서를 거쳤고 워싱턴사무소장, 인재개발원장, 금융결제국장, 부산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대통령비서실과 미주개발은행(IDB) 등에서도 근무했다.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 '숫자 없는 경제학', '금융오디세이', '중앙은행 별곡', '법으로 본 한국은행' 등 다수의 저서를 집필한 금융 에세이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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