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동헌 칼럼] 채무비율의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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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동헌 칼럼] 채무비율의 경제학
  • 주동헌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 승인 2020.06.10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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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정 채무비율의 이론적, 논리적 근거는 없어
인위적 국가채무비율 설정은 '자승자박'
주동헌 한양대 교수
주동헌 한양대 교수

[주동헌 한양대 ERICA 경제학부 교수] 지난해 이미 경기 부진에 대응한 확장적 재정정책의 필요성을 논의하면서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국가채무비율 40%가 코로나19에 대응한 긴급 재난지원 자금 대상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다시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채무비율 '적정한 수준' 있을까

정부와 여당이 사상 최대 규모의 3차 추가경정 예산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야당은 21대 국회 1호 법안으로 국가채무비율을 45%로 제한하는 재정준칙 법안을 발의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와 같은 국가채무비율에 대한 치열한 논의 가운데서 한 가지 분명해 진 것은 국가채무비율 40%라는 수치에 뚜렷한 논리적, 이론적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국가뿐만 아니라 기업이든, 은행이든, 또는 가계든 채무비율과 관련해서는 부채비율 100%니, BIS 비율 8%니 하는 특정한 수치가 제시되지만 이들 수치에 대해서 논리적, 이론적 근거가 제시된 일은 없다. 기업의 경우 업종별로 경영 방식이 달라 일률적 수치를 제시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 더러 밀러-모딜리아니(Miller-Modigliani) 정리는 오히려 기업의 적정 채무비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론적 결론을 제시한다.

은행의 경우 BIS 자기자본비율이라는 최저 자기자본 비율, 즉 최대 채무비율이 감독 당국에 의해 제시되고 있지만 이것도 국제 결제 기구인 BIS가 경험적으로 제시한 수치일 뿐 논리적, 이론적 근거는 없다. 가계 부채비율도 급격한 상승에 대한 우려는 있지만 어느 수준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론에 근거한 선험적 기준은 없다.

그럼에도 채무에 대한 일반적 원칙을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채무는 금전의 대차 계약이다.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 계약이 지켜지지 않으면 신용 또는 신뢰라는 사회적 자산이 붕괴된다. 그러므로 채무는 계약이 지켜지는 수준에서 유지하면 된다.

채무는 소비의 평탄화 과정에서 발생...국가도 마찬가지

가계의 채무는 왜 발생하는가? 개별 가계로 보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경제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소비의 평탄화를 위해서 채무가 발생한다고 본다. 개인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가능하다면 전 생애에 걸쳐 큰 기복 없이 소비 수준을 유지하기를 바란다. 반면 개인의 일반적인 소득 패턴은 청년에는 소득이 적다가 중장년에 소득이 증가하고 노년에는 소득이 줄어든다.

이에 따라 개인은 청년기에는 차입을 하고, 장년기에는 채무를 상환하고 나아가 저축을 하며, 노년기에는 채권을 소진하여 소비에 충당한다. 이렇게 가계는 차입을 통해 청년시절에 장년기 소득을 당겨 옴으로써 소비를 평탄화 하면서 일정한 소득 대비 채무비율을 유지하게 된다.

기업의 채무는 왜 발생하는가? 기업은 생산 활동을 통해 차입 비용, 즉 이자율보다 높은 이윤율의 기회가 있다면 차입을 늘리게 된다. 그런데 기업의 차입이 가계의 차입과 다른 점은 기업은 개인과 달리 수명이 유한하지 않으며 이에 따라 이자를 초과하는 이윤이 발생하는 한 채무를 상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물론 특정 채권자가 필요에 따라 채무를 회수할 수도 있으나 기업이 금융시장에서 다른 대여자를 찾아낼 수 있다면 채무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이는 이론적으로 미래 이윤의 현재가치의 총합이 총 채무 규모의 상한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이윤이 이자를 초과하는 경우 기업은 채무를 늘리면 늘릴수록 좋다. 물론 이윤율 저하와 미래의 불확실성은 기업의 채무 증가를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은행은 어떨까? 은행은 기업과 달리 생산 활동으로부터 이윤을 얻지 않는다. 은행은 가계의 저축을 기업에 중개하면서 이윤을 얻는다. 은행 입장에서는 많이 차입해서 많이 대출하는 것이 이익이다. 단, 대출 회수에 문제가 없다면 말이다. 은행의 이와 같은 인센티브 구조는 은행 스스로 신용량 증대 유인을 제어하지 못하게 하여 자산시장에서 거품 형성과 붕괴의 배경이 된다. 금융 감독 당국의 감시와 개입이 필요한 이유다.

그러면 국가의 채무는 왜 발생하는가? 생산 활동 측면에서 보면 국가는 국방, 행정, 안전 등의 공공 서비스를 생산하는 기업과 유사한 경제주체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활동을 위한 자원은 세금을 통해 조달하게 된다. 이 경우 국가 재정은 기업과 달리 이윤을 추구하지 않으므로 수입과 지출이 일치해 채권과 채무가 발생하지 않는 경제주체여야 한다. 즉 균형재정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현대 경제에서 국가 재정은 서비스 공급자 이상의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국가는 경기변동을 완화하기 위한 거시경제 정책의 주체다. 가계가 후생 증대를 위해 소비를 평탄화할 필요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도 경기 변동에 대응하여 국민의 소비가 평탄하게 유지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

가계 소득이 위축된 경기 침체기에 국가 재정은 세입은 줄이고 지출은 늘려 채무를 증가시켜서라도 가계 소득 증가를 유도해야 한다. 재정수지의 균형은 경기 회복기에 도모할 수 있다.

경제침체 극복위한 재정 역할 갈수록 커져

1980년대 중반 이후 세계 경제는 이른바 ‘대안정기(Great Moderation)’를 경험하면서 국가 재정의 경기 안정 기능 보다는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복지국가로서의 역할에 대한 요구가 커졌고 이에 따라 재정 규모가 확대되면서도 균형 재정의 필요성도 설득력을 가졌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최근 코로나19 사태는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재정의 적극적 역할을 다시 소환하고 있다.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연금을 비롯한 복지 분야에서 향후 재정 지출 확대를 우려하는 정부의 입장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균형 재정을 지속적으로 구축해 가야하는 재정의 영역이 있고 상황에 따라 동태적 균형재정을 운영해 가야 하는 재정의 영역이 따로 있다.

경기변동성이 커지면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인 국가채무의 확대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 국가채무 규모를 불필요하게 제한하여 경기 안정화를 위한 거시경제정책 수단의 손발을 스스로 묶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 주동헌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1996~2011년 한국은행 자금부, 금융시장국, 조사국 등에서 근무했다. 2009년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학(어바나샴페인 소재)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18년부터 금융위원회 경쟁도평가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2011년부터 한양대에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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