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선박8 - 울릉도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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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선박8 - 울릉도 상황
  • 이효웅
  • 승인 2015.11.21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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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사부 함대(異斯夫艦隊)의 전선(戰船)과 우산국 복속과정
  1) 이사부 함대의 제작 준비
   505년, 이사부 장군이 실직군주로 있으면서 512년 하슬라군주가 되기 직전까지 실직에서 전선을 만들었다고 본다. 물론 기록이나 확실한 유적은 아직 없지만 6-7년이라는 기간이 설명해 주고 있다.  
 선박의 유물은 대부분 서해안과 같이 뻘 속에 있던 것이 발굴되는데 아쉽게도 동해안 특성상 뻘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선박 유물은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나 일본에서와 같이 도자기나 고그림에서 단서를 찾아야하는데 이것 또한 쉽지 않다.
 지증왕 3년(502)에 신라에서는 순장을 금지하는 제도가 생겨서 부장품들이 많이 간소화되었을 것으로 본다. 김부식,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지증마립간 3년
  
 앞장에서 설명하였듯이 삼국시대의 주형토기들은 대부분 가야지방에서 발굴되는데, 고대선박의 발달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가야 주변이라고 본다. 가야는 가야철을 수출도하였지만 가야철을 이용하여 각종 무기나 도구 매일신문 특별취재팀, 『잃어버린 왕국 대가야』120-121, 268-269
들을 제작하여 수출하였을 것이다. 당시의 가야철을 이용한 무기와 철갑옷 등을 보아 다양한 도구들이 개발되어 나무를 절단하거나 가공하는 방법을 개발하였다고 본다.
 이후 신라의 선박은 법흥왕19년(533년) 금관가야의 항복과 함께 당시 최고의 기술자들을 영입하면서 부터 전선 및 중형구조선들이 발달되었을 것이다.
  우산국 정벌을 계획할 당시인 505년에는 유능한 선박제작 기술자들은 주로 울산·포항 지역에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데, 이들을 모집하기 위하여 왕께 주청하여 지증왕 6년(505) 11월 주즙이용에 관한 제도를 제정하였다. 나라에서는 전국 또는 가야국까지 유능한 기술자들을 모집하여 실직의 외딴섬에 보내어 506년부터 전선과 비밀병기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육향산에 본부를 설치하고, 보안을 위하여 고성산과 광진산에 망대를 설치하고, 외딴섬에 선박을 제작할 터를 닦고, 기술자들의 숙소를 짓고, 갑자평 김진원, 육향정, 속표지
에 둔전을 개간하여 식량을 확보하고, 실직성으로부터 기타 보급품들을 지원받았을 것으로 예상한다.             

2) 우산국의 상황
  우산국을 정벌하기 위하여서 함대 규모를 어느 정도로 할까? 에 대한 해답은 우산국에 대한 정보일 것이다.
 첫째, 우산국에 대한 정보는 당시 가야는 왜와 교류를 하였고, 대마도는 우산국과 교류 하였다. 그러므로 우산국에 대한 소문이나 기초 정보는 얻을 수 있었다.  
 둘째, 실직군주로 있는 동안 첩보선 3대 정도를 띄워 우산국을 정탐(偵探)하였다. 적을 알아야 적을 이길 수 있다는 가장 기초적인 병법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둘째 방법인 첩보선을 띄웠다고 본다. 삼국사기 권 제44 이사부조에 나와 있듯이 ‘그 나라 사람들이 어리석고 사나워서 위세로 항복 받기는 어렵지만 계략으로 복속시킬 수 있다고 여겼다.’ 김부식,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지증마립간 13년
그러므로 이것은 직접 가보거나 믿을 만한 부하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본다.
 
 울릉도를 배에서 내리지 않고도 울릉도의 정보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울릉도는 사방이 경사가 심한 산이라 대부분 해안 가까이에 거주하므로 아침·저녁으로 선박으로 한 바퀴 돌면서 밥 짓는 연기를 세어 보면 주민들의 위치와 수를 짐작할 수 있다.
 
 김인우(金麟雨)는 무릉등처안무사(武陵等處安撫使)로 파견되어 울릉도에 들어가 몇 개월 있으면서 울릉도 거주민을 조사하였는데, 가구수가 15호에 86명이 거주하고 있었고 이중 3명을 데리고 왔다. 손승철, 이사부출항지 규명 의의, 이사부 삼척출항과 동해비젼, 한국이사부학회, 2010

 
 울릉도는 산악지역으로 농토가 부족하고 산짐승도 없어 근본적으로 주민들이 많이 살 수 없는 지형이나, 기후가 좋고 화산섬이라 밭작물과 나무는 잘 자란다. 특히 겨울철에는 눈이 많이 오고 풍랑이 심하여 이동하기조차 어렵다. 지금은 온난화 현상으로 많이 따뜻해졌으나 과거의 겨울나기는 동물들의 겨울나기와 같았을 거라 본다.
 그러므로 당시의 우산국은 많은 집단의 주민이라기보다는 남양, 현포, 천부를 중심으로 적을 대비하여 두세 곳에 모여서 살았을 것이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언제부터 울릉도에 사람이 살았을까?’ 연구내용을 보면
 울릉도의 고분군은 현포리를 중심으로 하는 대집단과 남서리·천부리의 중집단, 그리고 나머지 소집단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또한 각각의 소집단들은 중집단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현포리 대집단을 중심으로 위계화된 상태였을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해석이 비록 정교하고 치밀한 고분 조사나 부장 유물과 같은 정보를 고려하지 않은 채 고분의 수나 규모만을 가지고 내린 추론이라고는 해도 당시 울릉도 사회가 내부적으로 상당히 위계화된 사회였음을 추론케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언제부터 울릉도에 사람이 살았을까 -울릉도의 고분군(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우산국의 주민은 많지 않아도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는 주민들은 자연적으로 사납고 무서워 질 수밖에 없고, 해적이나 왜구의 집단이 이주해왔을 수도 있으므로 많은 함선이나 군사 보다는 계략을 구사하는 방법이 피해를 줄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3) 우산국의 실체
  우산국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구려 동천왕 19년(245년)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옥저(부여의 한 부족)의 노인이 말하길 ‘국인이 언젠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다가 바람을 만나 수십일 동안 표류하다가 동쪽의 섬에 도착하였는데, 그 섬에 사람이 살고 있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았고 그들은 해마다 칠월이 되면 소녀를 가려 뽑아서 바다에 빠뜨린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김윤곤, 우산국·우산도인의 해상활동과 환동해문화권, 이사부 활약의 역사성과 21세기적 의의, 216-217


  동쪽의 섬에 대하여 두계 이병도는“우산국이 틀림없다”라고 하였다. 이병도,‘한국사’ 고대편 ‘탐라와 우산국’ 459
 
  우산국은 2-3세기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해도 지역 특성상 농토가 부족하여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기 어렵다. 농토가 가장 너른 곳은 나리분지 지역이나 배를 타고 이동해서 해발 400여미터의 고지를 넘어가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주로 어업이나 주변에서 밭작물을 심어서 생활을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살기 힘들다. 그런데 우산국의 우해왕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산국은 주민들이 많아서 하나의 왕국으로 성장한 것처럼 이야기 하는데,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우선 우해왕은 족보가 없다. 예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국가를 형성하여 살았다면, 다른 왕의 이름도 거론되어야 할 텐데 한 구절의 이야기도 없다. 이것으로 보아 우산국의 실체는 한때 잠깐 있었던 한 집단의 이야기이다. 이렇게 가정하면, 우산국은 왜구들의 본거지인 대마도의 한 집단이 분리되어 울릉도 원주민들을 제압하고 정착하였다고 보아진다.
 울릉도에 전해지는 설화를 보면,

 우산국이 가장 왕성했던 시절은 우해왕이 다스릴 때였으며, 왕은 기운이 장사요, 신체도 건장하여 바다를 마치 육지처럼 주름잡고 다녔다. 우산국은 작은 나라였지만 근처의 어느 나라보다 바다에서는 힘이 세었다.
 당시 왜구는 우산국을 가끔 노략질하였는데 그 본거지는 주로 대마도였다. 우해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대마도로 건너가서 대마도의 수장을 만나 담판을 하였고, 그 수장은 앞으로 우산국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항서를 바쳤다. 우해왕이 떠나 올 때 그 수장의 셋째 달인 풍미녀를 데려와서 왕후로 삼았다. ‘울릉문화원’ 제2호, 146-148
 

 설화에서 몇 가지를 유추해 보면,
 ‘우산국이 가장 왕성한 시기는 우해왕이었다. 우해왕은 기운이 장사요, 바다를 육지처럼 주름잡고 다녔다. 우산국은 작은 나라지만 근처의 어느 나라 보다 바다에서는 힘이 세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도 ‘우산국 사람들은 우매하고 사나워서 위엄으로 불러들이기는 어렵고 계책을 써서 굴복시킬 수밖에 없다’ 김부식,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지증마립간 13년

 
 두 글에서 우해왕의 모습이 해적이나 왜구의 모습으로 잘 나타나 있다.
 설화의 내용 모두가 대마도에 관한 이야기로 대마도애 대하여 잘 알고 있으며 언어도 통하였다. 풍미녀 왕후의 이야기도 부족 간의 침범을 빌미로 우산국과 대마도(쓰시마) 왜구간의 혼인동맹을 맺었다고 본다.
 대마도의 왜구는 큰 집단이라 신라의 명활성, 금성, 활개성, 삽량성, 장봉진 등을 공격하였지만, 실성이사금6년, 눌지마립간 15년, 24년, 소지마립간19년 등 동쪽 해안의 왜인 침범들은 대마도 왜구라기보다는 우산국의 왜구로 볼 수 있다.
 신라는 왜구의 본거지를 대마도와 우산국이라 믿고, 대마도 정벌은 당시의 신라로서는 무리여서 이사부 장군은 우산국 왜구를 공격하여 제해권을 얻는 것이 순서라고 보았다. 이후 우산국은 복속하였고 이사부 장군의 소문은 대마도에도 알려져서 성덕왕 30년(731)이레 219년 동안 왜구들의 침범이 없었다. 
 필자는 우산국의 실체를 울릉도에는 표류민 등의 원주민이 있었고, 대마도 왜구들의 한 집단이 울릉도 원주민을 제압하고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여 신라민들을 노획하여 우산국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많은 학자들이 좀 더 냉철하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4) 정보수집 자료 
 *우산국은 실직의 높은 곳에서 보인다.(삼척 원덕 일원 200m-300m 이상에서 가능) 
 *우산국은 실직의 동쪽에 위치하며 정방향에 있다.(92도 정동 방향)
 *우산국과의 거리는 배로 이틀거리에 있다.(삼척-울릉 태하 142km, 성인봉 높이 984m)
 *우산국을 가는 해로 가운데는 안개가 자주 끼고 기상이 변한다.( 장한상의 국왕께 복명 내   용 중에 ‘땅이 좁고 큰 나무가 많았으며 수종(水宗 바다 가운데 물이 부딪히는 곳)이 또한    평탄하지 못하여 오고 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손승철, ‘울릉도 수토와 삼척영장 장한상’ 이사부와 동해 5호, 47
 (필자도 보트 탐사 시 두 차례 경험)
 *우산국의 둘레는 백리정도로 하루가 걸린다.(해안선 길이 56.5km/6km=약10시간)
 *우산국은 가운데 산을 중심으로 산이 높고 나무가 많으나 농토는 보이지 않는다.
 *우산국에는 항구와 강이 없으나 산이 높아 바람이 불어도 반대쪽은 조용하여 피항 할 수     있다.
 *우산국의 큰 마을은 남쪽과 북쪽에 있으며 400-500명(최대) 정도의 주민이 살고 있고, 실제    전투력은 어린이 부녀자를 제외하면 250-300명 정도일 것이다.
 *우산국 주민은 사납고 무서워 가까이 갈 수 없다.
 *우산국을 왕복하는 데는 보름 이상 걸린다.(참고로 필자가 2002년 코스모스호로  울릉도·     독도탐사 시 기상을 살피느라 9일이 소요됨)
 
5) 어떤 계략을 쓸 것인가?
 우산국의 특성상 동물에 가까운 주민들을 복속시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결론적으로 이 과정에서 김이사부 장군이 선택한 목우사자(木偊師子) 김부식,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지증마립간 13년
는 기상천외한 방법이었다. 목우사자를 어떻게 알았느냐는 여기에서 논외하고 이 방법은 당시 부관 및 목공 등 관계자들을 매우 놀라게 하였을 것이다. 다행히 이 중요한 비밀병기를 만드는 곳은 실직에 외딴섬이어서 보안관리가 쉬웠다.       

   

▲ <도2-26> 삼척 이사부축제장의 목사자(2009년)

         

  

▲ <도2-27> 터키 이즈미르공항의 트로이목마(2015년)

여기서 잠깐 트로이전쟁의 트로이 목마를 살펴보자.
트로이목마(Trojan horse)일리아드 호메르스의 그리스 설화에 따르면, 트로이전쟁은 기원전 1200년경 고대도시 트로이에서 10년간 진행되었다. 미케네인들은 아가멤논 왕의 지휘 아래 헬레스폰트 해협 남서쪽의 터키 해안에 위치한 트로이를 공격했다. 그러나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자 미케네인들(그리스인)이 바퀴가 달린 커다란 목마를 만들어 놓고 뒤로 물러났다. 트로이에서는 이들이 남기고 간 목마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카산드라 공주를 비롯해 일부에서 목마를 받지 않을 것을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트로이인들은 목마를 성안에 들이기로 결정한다. 그날 저녁 목마 안에 숨어 있던 미케네군은 몰래 빠져 나와 성문을 열었고, 10여 년간 이어졌던 트로이 전쟁은 삽시간에 미케네군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트로이목마(Trojan horse)

 동양의 목우사자와 서양의 트로이목마는 전쟁사에서 영원히 신화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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