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테러…십자군 전쟁의 앙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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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테러…십자군 전쟁의 앙금인가
  • 김인영 발행인
  • 승인 2015.11.15 17: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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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전쟁, 땅 가르기…역사의 반복을 중단시킬 화해는 없을까

 

이슬람 극단세력인 IS가 프랑스를 표적으로 삼는 이유는 1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교황의 지시로 중세유럽의 국가들이 기사단을 구성해 십자군 전쟁(1096~1291년)을 일으켰을 때 현재 프랑스의 전신인 프랑크 왕국이 십자군의 주력부대를 형성해 중동의 지중해 연안을 공격했다. 그 전쟁의 앙금이 1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뼛속 깊이 남아있는 것이다.

파리 테러참사가 발생한 직후 IS의 공식선전매체는 "8명의 형제가 자살폭탄 벨트와 자동소총으로 '십자군' 프랑스 수도의 여러 곳을 공격했다"며 "프랑스와 이들을 추종하는 자들은 IS의 표적으로 남아있다"고 위협했다. IS가 프랑스를 공격한 명분으로 천년전의 십자군 전쟁을 거론한 것이다.

▲ 시리아에 남아있는 크락 드 슈발리에 요새. 프랑스 기사들이 만든 이 요새는 십자군 전쟁 기간에 140년동안 한번도 함락되지 않았다.

 

프랑스 기사가 주역인 십자군 전쟁

카놋사 굴욕등의 사건을 거치며 세속군주와 싸운 로마 교황은 우르바노 2세에 이르러 십자군 전쟁을 제창한다. 갈라진 교파를 통합하고 세속군주를 지배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예루살렘은 이슬람국가인 셀주크 투르크가 점령하고 있었다. 그는 1096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이렇게 연설한다.

“기독교를 위해 싸우는 자는 의복에 십자가를 표시하라. (중략) 가는 곳마다 명성을 떨치고 겁쟁이들의 나라를 정복하라. 선봉에 선 프랑스인의 용병, 그 뒤를 따르는 나라들의 용맹은 단번에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하리라.”

농민군으로 구성된 십자군은 허무하게 패했다. 그해 하반기에 부용의 고드프루아, 그의 동생인 볼로뉴의 보두앵, 툴루즈의 레몽, 블루아의 스테판, 타란토의 보에몽등 주로 프랑스 출신 영주들이 이끄는 군대가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넜다. 십자군은 지중해 연안을 따라 남하, 이슬람의 투르크군을 무찌르고 1099년 6월 예루살렘 성벽에 도달했다. 한달간에 걸쳐 치열한 공성전이 벌어졌다. 그해 7월 마침내 프랑크 군을 주력으로 하는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그리고 대학살이 벌어졌다. 이슬람은 물론 유태인들도 십자군의 칼에 쓰러졌다. 이교도는 남녀노소 불문이었다. 1주일에 걸친 광란의 학살극은 끝났지만, 살아남은 몇백명의 생존자는 수만구의 시체를 치운뒤 쓰러졌다. 후에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은 십자군을 “광신에 따른 야만행위”라고 평가했다.

예루살렘 대학살이 벌어진후 이슬람 세계에는 신의 이름으로 이교도를 물리치자는 의식이 꿈틀거렸고, 다마스커스와 바그다드 사이의 토후(에미레이트)들은 성전(지하드)을 부르짖었다. 쿠르드족 출신의 살라딘은 시라아와 이라크를 병합해 중동을 제패했다. 그는 지중해연안의 십자군 영토를 공격했다. 1187년 10월 2일 살라딘의 군대는 마침내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그러나 살라딘은 항복한 기독교인들이 자유롭게 도시를 떠나게 두었다. 다행히 88년전의 학살에 대한 보복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후에도 교황은 몇차례 십자군을 제창했지만, 지중해 연안의 우트르메르(‘바다 건너의 땅’이란 뜻으로 십자군 점령지)를 회복하지 못했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후에도 프랑스 기사단이 건설한 크락 드 슈발리에(‘기사들의 성’이라는 뜻) 요새는 1271년까지 함락되지 않았고 버텼다. 이 요새는 지금 이라크의 주요 관광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1차 대전후 프랑스, 시라아와 레바논 영토 나눠먹기

1914년 1차 대전이 발발하고 주축국으로 참전한 오스만 투르크의 패색이 짙어지자, 영국은 중동 일대를 장악하려고 시도한다.

이때 영국은 이중 정책을 취했다. 정보국 장교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를 이슬람 성지 메카로 보내 아랍인의 수장 후세인 이븐 알리에게 접근케 했다. 로렌스는 후세인에게 투르크에 맞서 봉기한다면 과거 이슬람 제국의 영토를 되찾게 해주겠다고 유인했고, 그의 말을 믿은 아랍 족장과 토호들은 투르크에 대해 무장독립운동을 벌였다. (로렌스의 스토리는 나중에 데이비드 린 감독이 연출한 영화로 제작된다.)

다른 한편 영국은 프랑스와 협상을 벌였다. 아랍인들에겐 영토를 돌려주겄다며 투르크에 대해 봉기를 일으키라고 해놓고, 프랑스와는 영토 나누기 협상을 벌인 것이다. 속임수였다.

1916년 5월 영국의 외교관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 외교관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가 비밀협정을 체결했다. 이른바 '사이크스-피코 협정'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두 대표는 비밀리에 만나 오스만 투르크가 패망하기도 전에 중동지역을 '나눠 먹기'하는 협상을 벌였다.

그때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을 달라고 했다. 그 지역은 1천년전에 프랑스 선조들이 피를 흘린 지역이고, 그 후손이 아직 이어오고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지금도 프랑크족의 후예들이 시리아와 레바논의 지중해 연안에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협상 결과 영국(B구역)은 지중해와 요르단강 사이 해안 지역 일부와 지금의 이라크, 요르단을 가져가고, 프랑스(A구역)는 이라크 북부 일부와 시리아, 레바논을 차지하기로 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종파 갈등이나 부족성이 강한 아랍 무슬림의 역사·문화·종교적 요인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영국과 프랑스의 이해관계에 따라 국경은 자를 대고 일직선으로 그어졌다. 비밀 협상이었으므로, 당사자인 아랍 세력은 배제됐다.

수니파가 살던 알레포는 시아파가 지배하는 시리아와 묶였고, 수니파 중심 도시 모술은 시아파 대도시 바그다드와 한 나라가 됐다. 여기엔 1910년 중반 발견된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석유를 차지하려는 영국의 노림수가 크게 작용했다.

이 비밀 협정의 내용이 공개되자 영국을 철석같이 믿었던 아랍인의 배신감은 컸다. 아랍민족에게 주기로 약속했던 팔레스타인 땅도 1차 대전에 전쟁 자금을 제공한 유대 세력에 양보했다. 영국은 1917년 팔레스타인을 유대인에게 돌려준다는 내용의 벨푸어 선언을 발표했다.

독일 슈피겔지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두고 "참으로 낯부끄럽고 뻔뻔한 땅따먹기"라면서 "현재 시리아 내전과 이라크의 극단주의 세력, 레바논의 종파·민족 충돌은 제국주의 열강이 멋대로 그은 국경선 때문"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역사의 앙금 남아

프랑스는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적극적으로 IS에 대한 미국의 공습에 참여하고 있다. 프랑스는 시리아에서의 IS 대상 공습이 알아사드 시리아 정권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우려로 그동안 이라크에서만 공습에 참여해오다가 지난 9월부터 공습에 동참했다.

IS는 "프랑스가 무슬림을 공습하고 예언자 모하마드를 모욕하는 데 앞장섰다"며 이번 테러가 프랑스가 지난 9월부터 시리아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IS 대상 공습에 동참한 데 대한 보복과 경고의 의미임을 밝혔다.

테러 참사가 발생하자,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즉각 테러의 배후로 IS를 지목하고, 이번 사건을 프랑스에 대한 '전쟁 행위'로 규정했다.

화해 과정을 거치지 않는한 역사의 앙금은 남아 반복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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