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동열의 콘텐츠연대기] ②"초창기 영화는 마술이었다" 첫 SF영화 '달세계 여행’(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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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열의 콘텐츠연대기] ②"초창기 영화는 마술이었다" 첫 SF영화 '달세계 여행’(上)
  • 문동열 레드브로스대표
  • 승인 2020.02.11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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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마술사 조르쥬 멜리에스 작품
118년 전 특수효과·장치 첫 사용
문동열 레드브로스대표.
문동열 레드브로스대표.

[오피니언뉴스=문동열 레드브로스대표] 21세기가 디지털의 시대라면 20세기는 과학의 시대였다. 특히 20세기의 시작인 1900년대 초반의 사람들은‘과학만능주의’에 심취해있었다.  

기름이 필요없는 등불이라든지, 하늘을 나는 기계라든지, 먼 곳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다는지 하는 지금까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과학을 통해 하나 둘 이루어지자, 당시의 과학에 대한 사람들의 자신감은 넘치다 못해 폭발할 지경이었다.

마치 지금 시대의 사람들이 디지털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과학의 발전이 가져다준 다양한 기술과 장치들은 인류를 마법과 신화의 시대에서 과학과 이성의 시대로 끌어올렸고, 사람들의 상상력도 과학의 날개를 달고 다양한 방면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콘텐츠 비즈니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과학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콘텐츠 장르인 사이언스 픽션 (science fiction) 흔히 SF라고 부르는 장르가 콘텐츠 비즈니스에 자리 잡은 것도 이때의 일이다.

SF장르의 역사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쥘 베른(Jules Verne)이라는 걸출한 모험 소설가도 이 시기의 인물이다. 그는 <해저2만리>나 <인도왕비의 유산> <80일간의 세계일주>같이 지금도 수많은 콘텐츠에 영감을 주는 소설을 썼고, 당시의 인기는 바다 건너 저 멀리 동양에 있는 구한말 대한제국까지 퍼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번안 소설로 알려진 이해조의 <철세계>는 바로 쥘 베른의 <인도왕비의 유산>을 번안한 작품이다. 이렇게 글로벌한 트렌드로 자리잡아가던 쥘 베른류의 과학 모험 소설들은 자연스럽게 막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영화 콘텐츠에도 영향을 끼치게된다.

영화 제작자가 된 마술사

세계 최초의 SF영화로 볼 수 있는 영화 <달세계 여행> (Le Voyage Dans la Lune)은 1902년에 개봉된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éliès)라는 마술사 출신의 영화 제작자가 만든 영화이다.

조르주 멜리에스는 1895년 뤼미에르 형제의 첫 영화 상영회를 본 고객들 중 한명이었다. 그는 뤼미에르 형제의 상영회를 본 직후 곧바로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에서 형용할 수 없는 돈 냄새(?)가 나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뤼미에르 형제에게 1만 프랑에 기계를 팔 것을 제안한다.

멜리에스는 자신의 마술 공연에 이 기계를 쓰면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멜리에스의 그 제안을 뤼미에르 형제는 거절한다. 멜리에스가 뤼미에르 형제에게 제안한 그날 멜리에스 말고도 이 흥미로운 기계에 관심을 가진 사업가들은 또 있었다. 다른 사업가들이 5만 프랑까지 불렀지만, 뤼미에르 형제는 결국 시네마토그라프를 팔지 않았다.

1902년 제작된 세계최초의 SF영화 '달세계여행' 개봉 당시 포스터.  출처=레드브로스DB.
1902년 제작된 세계최초의 SF영화 '달세계여행' 개봉 당시 포스터. 출처=레드브로스DB.

그들이 판매를 거부한 이유에 대해서는 그냥 독점을 유지하고 싶었다는 ‘독점설’과 영화라는 게 처음에 다들 신기해서 볼 뿐이지 그냥 일시적인 유행에 그칠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팔만한 물건이 아니어서 안팔았다는 ‘양심설’이 있다. (기록에는 후자였다고 알려지고 있지만, 전자는 속 마음이고 후자는 명분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다....) 

어쨌든 거절당하긴 했지만 이미 영화의 매력에 푹 빠진 멜리에스는 이 장치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체품을 찾아 당시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악기 제작자인 로버트 폴(Robert W. Paul)이 만든 씨어트로그라프(Theatrograph)라는 시네마토그라프와 유사한 장치를 구매한다.

애니마토그라프로도 알려진 이 씨어트로그라프는 시네마토그라프보다는 기술적으로 뒤처진 것이었지만, 멜리에스의 새로운 사업 기획을 만족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멜리에스는 이 기계와 함께 추가적으로 단편 영상들이 담긴 필름을 몇 개 사 가지고와 곧장 자신의 마술 공연의 일부로 영화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관객들의 반응은 좋았다. 마술과 결합된 새로운 콘텐츠는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영화 사업이 흥행이 되는 것을 확인한 멜리에스는 다른 사람의 영상을 가져다 상영하는 배급업자에서 본격적인 영화 제작자로서의 길로 나선다.

신발 공장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기계에 익숙했던 멜리에스는 런던에서 구입한 씨어트로그라프를 연구한 후 필름 카메라 역할을 할 수 있게 기계를 개조했고 여러 시행착오 끝에 직접 필름을 개발하고 프린트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멜리에스는 최초의 영화 제작 스튜디오 중 하나인 스타필름 컴퍼니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1896년에만 한해에만 78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장편영화가 아닌 1~2분 내외의 단편 영화였기에 가능한 숫자이긴 하지만, 1913년까지 멜리에스가 제작한 영화는 총 500편이 넘는다.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éliès).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éliès).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멜리에스의 영화 중 그의 첫 번째 영화는 1896년에 공개한 <Une partie de cartes (카드놀이)>라는 작품이다. 초창기 그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뤼미에르의 영화의 리메이크 작품들이 많았다. <카드놀이> 역시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 <Partie d'écarté(에카르트 놀이·에카르트는 네덜란드의 32장으로 구성된 카드)>의 리메이크다. 당시 영화계의 1인자였던 뤼미에르 형제들과 경쟁하기 위해서였다.

1970년대 게임이라는 새로운 콘텐츠가 나타날 때도 비슷한 상황이 일어나긴 했지만, 지금까지의 콘텐츠 산업 초창기에는 기술(하드웨어)만 있을 뿐, 콘텐츠 (소프트웨어)를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노하우가 전무한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멜리에스와 비슷한 시기에 영화산업에 뛰어든 많은 후발 주자는 우선 선발 주자인 뤼미에르 형제를 베끼는 데에 주력했다. 하지만 멜리에스는 조금 달랐다. 그도 처음에는 뤼미에르 형제의 리메이크 제작(이라 쓰고 표절이라 읽는다)을 우선시하긴 했지만, 이미 오랜 기간 무대 마술과 흥행사로서의 경험이 있던 그는 본능적으로 뤼미에르 형제 방식의 영화 제작의 한계를 느끼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언가가 영화에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상영회가 끝나자 마법이 일어났다

영화가 처음 발명되었을 당시, 영화는 순수한 ‘움직이는 사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진이라는 건 그림과는 달리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초창기 영화 역시 사진들이 움직이는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뤼미에르 형제의 첫 영화들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단순한 영상 클립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필름 길이 등의 문제로 인해 우선 러닝 타임은 1분에서 길어야 2분 정도로 그렇게 긴 편은 아니었다.

이러한 한계로 인해 영화라는 콘텐츠 비즈니스를 처음 시작하긴 했지만 영화라는 새로운 콘텐츠의 가능성을 알아채지 못한 뤼미에르 형제는 주로 단순한 일상이나 상황, 열차가 역에 들어오는 장면 등 스토리가 있는 극영화보다는 지금의 영상 클립과도 같은 단일 시퀀스의 장면들을 위주로 영화를 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영상들은 처음에야 신기해서 보겠지만, ‘재미’는 없었다. 

1895년 뤼미에르 형제의 첫 영화들 중 하나인 <Démolition d’un mur (벽 철거)>같은 작품도 그렇다. 1분 남짓의 이 영상은 몇 명의 노동자들이 벽을 무너뜨려 철거하는 단순한 영상이다. 이 영상 자체가 그렇게 ‘재미’있는 영상은 아니었지만, 실제 상영회에서 정말 마법같은 일이 생긴다. 상영이 끝난 필름을 돌리는 과정에서 무너진 벽이 마법처럼 다시 생겨나는 장면을 본 것이다. 영화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 건 영화를 만든 뤼미에르 형제가 아니라, 바로 관객들이었다.

 

필름이나 비디오를 리와인드하면 사람들이 거꾸로 가고 차가 거꾸로 가는 지금이야 인상에도 남지 않는 장면이지만, 당시에 이를 봤던 많은 사람들은 일상적인 광경이 마법같은 일루젼(환상)으로 바뀌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너졌던 벽이 땅에서부터 우뚝 솟아나고 자욱히 퍼져갔던 먼지가 다시 벽으로 돌아가는 이 장면을 보고 마술사였던 멜리에스가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상상이 간다. 멜리에스는 발명가도 사업가도 아닌 마술사였다. 이미 마술사로서 내러티브가 있는 마술 공연에 익숙했던 그는 영화를 자신의 마술쇼의 일부분으로 생각했다.

화려한 기술로 관객을 현혹하고, 놀라게 한 다음, 다시 즐겁게 만드는 마술쇼의 통상적인 패턴을 영화에도 접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다양한 마술의 기법들을 영화에 접목하기 시작했다. 바로 영화에 처음으로 영상 트릭을 포함한 특수효과라는 것을 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후대의 영화사가(史家)들은 영화를 처음 상업화 시킨 것은 뤼미에르 형제이지만, 그들이 영화를 과학과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보았고, 그러다보니 움직이는 사진으로서의 ‘기록’에만 주력했다고 평가했다. 반면 멜리에스는 마술사로서 영화를 일종의 무대 공연의 측면에서 보았기 때문에, 관객들의 관점에서 흥미와 즐거움을 느끼기 위한 다양한 장치들을 고려할 수 있었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기존의 단순한 영상이 재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멜리에스가 시도하기 시작한 다양한 ‘마술적’ 아이디어들은 단순히 움직이는 사진에 불과했던 영화라는 콘텐츠가 21세기 인류 최대의 엔터테인먼트 산업 중 하나로 거듭날 수 있게 만드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멜리에스를 근대 영화의 가장 위대한 개척자 중 한 사람으로 꼽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편에 계속)

●문동열 대표는 일본 게이오대학 대학원에서 미디어 디자인을 전공하고, LG인터넷, SBS콘텐츠 허브, IBK 기업은행 문화콘텐츠 금융부 등에서 방송, 게임,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 기획 및 제작을 해왔다. 콘텐츠 제작과 금융 시스템에 정통한 콘텐츠 산업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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