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품 스토리] ⑫ 구찌의 '롤러코스터'는 다시 정상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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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명품 스토리] ⑫ 구찌의 '롤러코스터'는 다시 정상을 향해
  • 김서나 패션에디터
  • 승인 2020.02.01 12: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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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재갈의 모티브와 레드, 그린의 배색 라인 등으로 구찌 시그니처 확립
창업 가문의 몰락 후, 톰 포드가 되찾아준 구찌 브랜드의 명성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활약 속에 현재 가장 핫한 럭셔리 라벨로 등극
구찌 2020 크루즈 컬렉션 광고 캠페인
구찌 2020 크루즈 컬렉션 광고 캠페인

[오피니언뉴스=김서나 패션에디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명품 브랜드로서 세계적 명성을 떨치고도, 창업 가문의 드라마틱한 운명에 휘말렸던 구찌(Gucci).

'위기의 구찌'는 다행히 톰 포드(Tom Ford)의 섹시 글래머 스타일로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었고, 포드가 떠난 후 다시 하락한 인기는 알레산드로 미켈레(Alessandro Michele)를 만나 상승세로 돌아섰다.

그리고 지금 구찌는 재미있는 SNS 컨텐츠로 디지털 세대를 공략하며 패션 팔로워를 늘려가는 중.

 

◆ 이탈리아 명품의 탄생, 하지만 스캔들로 얼룩진 구찌 가문

파리와 런던의 호텔에서 벨보이로 일하던 어린 시절, 구찌오 구찌(Guccio Gucci)는 상류층 고객들의 고급스러운 여행 가방들을 보고 사업을 구상했다.

고향 이탈리아 피렌체로 돌아와 1921년 비냐 누오바 거리에 매장을 열고 최고급 가죽 제품들을 판매한 그는 가죽 장갑과 부츠 등 승마 관련 용품을 찾는 고객들이 많아지자 말 재갈을 모티브로 ‘홀스빗(horse bit)’ 장식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고 , 두 개의 G를 겹친 로고를 내세워 구찌 브랜드를 차별화시켰다.

밀라노와 로마에도 매장을 오픈하며 사업을 키워가던 구찌는 하지만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좋은 자재 확보가 어려워졌는데, 이때 구찌는 새로운 디자인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일본에서 구한 대나무를 백 핸들로 제작해 ‘뱀부(Bamboo)백’을 내놓은 것.

어디에도 없었던 모습, 이국적인 매력의 뱀부백으로 전화위복의 결과를 만들어낸 구찌는 이후 다양한 소재와 문양으로 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그린-레드-그린의 삼색 라인 ‘웹(web)’으로 스포티한 느낌도 가미하면서 인기를 더해갔다.

1953년 구찌오 구찌가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의 일을 돕던 4형제가 가업을 물려받았다.

장남 알도 구찌(Aldo Gucci)의 주도 아래 뉴욕에 진출한 구찌는 홀스빗 장식을 부착한 로퍼와 더블G 로고를 반복 배열해 직조한 모노그램 캔버스, 로맨틱한 꽃 프린트의 실크 스카프 등 브랜드를 상징하는 아이템들을 추가로 탄생시켰고, 영화배우들의 사랑을 받으며 1950~60년대를 풍미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도 계속해서 해외 매장을 세우고, 시계, 주얼리, 타이, 아이웨어와 향수까지 상품 라인을 확대하던 구찌의 성공 스토리는 하지만 3세대의 경영체제로 전환되는 시점부터 갑자기 막장 스토리로 반전되었다.

경영권을 두고 의견이 부딪혔던 알도 구찌의 아들 파올로 구찌(Paolo Gucci)는 결국 자신의 이름 ‘파올로 구찌’로 브랜드를 따로 런칭하면서, 앙금이 남아있던 아버지 알도 구찌를 탈세 혐의로 고발해 결국 감옥에까지 보냈다.

구찌의 경영권은 알도 구찌의 동생 로돌포 구찌(Rodolfo Gucci)의 아들인 마우리찌오 구찌(Maurizio Gucci)에게 쥐어졌지만, 이미 기세가 꺾인 브랜드를 되살리기에 역부족이었다. 결국 1993년 바레인의 투자회사 '인베스트코프(Investcorp)'에 지분을 넘기고 만다.

2년뒤인 1995년 마우리찌오 구찌가 밀라노 자택 앞에서 이혼한 전처가 고용한 살인 청부업자의 권총에 피살되면서 화려했던 가족의 역사는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구찌 1950년대 광고, 1990년 광고 2컷, 1973년 광고, 1988년 광고, 1970년대 광고, 1989년 광고 이미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구찌 1950년대 광고, 1990년 광고 2컷, 1973년 광고, 1988년 광고, 1970년대 광고, 1989년 광고 이미지

◆ 뉴욕에서 온 디자이너 톰 포드, 무너져가던 구찌를 살려내다

세계적으로 이름은 알렸지만 점차 쇠퇴하면서 흘러간 브랜드로 전락하게 된 구찌.

그렇게 되기까지 ‘파올로 구찌’ 브랜드의 라이선스 남발도 한 몫 했다. ‘구찌’라는 이름의 가치를 떨어뜨려버린 파올로 구찌는 상표권 분쟁을 통해 정리되었지만, 마무리되기까지 구찌는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구찌가 명성을 되찾을 수 있었던 데엔 도미니코 데 솔레(Domenico De Sole)의 역할이 컸다.

구찌 가문의 변호사였던 그는 구찌 미국지사의 운영을 맡아 신임을 얻으면서 1995년 본사 업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구찌의 CEO로서 그가 내린 가장 결정적인 판단은 32세의 톰 포드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승격시킨 것.

미국 텍사스 출신의 톰 포드는 뉴욕 파슨스(Parsons)에서 건축학을 공부하던 중 ‘끌로에(Chloe)’의 홍보 인턴을 경험하며 패션 분야에 흥미를 느꼈고, 결국 디자이너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하지만 실용성을 추구하는 미국식 디자인에 싫증을 느낀 톰 포드는 유럽에서 일할 기회를 찾았는데, 이때는 바로 구찌가 침체의 늪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디자인 팀을 재정비하던 시기. 1990년 밀라노로 날아가 구찌 여성복 팀에 합류한 그는 재능을 인정받으면서 남성복, 슈즈로 담당 아이템을 늘려갔고, 1994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까지 올랐다.

첫 컬렉션에서 구찌 특유의 플로럴 패턴과 광택 소재를 조화시키며 변화를 예고한 그는 바로 다음 시즌인 1995년 가을 컬렉션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단숨에 구찌를 최고의 인기 브랜드로 등극시켰다.

특히 아쿠아 컬러의 실크 셔츠와 벨보텀 실루엣의 벨벳 팬츠를 매치시킨 구찌 룩은 팝스타 마돈나의 레드카펫 패션으로도 선택 받으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고, 이를 기점으로 구찌는 새로운 구찌 팬들을 흡수하며 막대한 수익을 쓸어 담았다.

한편 톰 포드의 활약으로 구찌의 위상이 높아지자 명품 대기업 LVMH는 구찌의 주식을 사들이며 인수합병을 노렸는데, 이를 감지한 구찌 측은 대신 ‘PPR(Pinault-Printemps-Redoute)’에 주식 일부를 넘기는 전략적 제휴를 추진해 LVMH 에 맞섰다.

이후 ‘케링(Kering)’으로 사명을 변경한 PPR은 구찌 외에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 ‘발렌시아가(Balenciaga)’,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등을 추가로 인수하며 LVMH의 아성에 도전하는 명품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1999년부터 같은 지붕 아래의 ‘이브 생 로랑’의 디렉터까지 겸하면서도 구찌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톰 포드는 이국적인 프린트와 관능적인 디자인을 펼쳐 보이며 2004년까지 팬 관리를 훌륭히 해냈다. 그러나 그의 재계약 조건을 맞춰주지 못한 구찌는 톰 포드가 CEO 데 솔레와 동반 사직한 후 함께 ‘톰 포드’ 브랜드를 런칭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톰 포드, 구찌 1995년 광고, 1996년 광고, 2000년 광고, 1999년 광고, 2001년 광고, 2003년 광고 캠페인 (광고 외 사진=톰 포드 인스타그램)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톰 포드, 구찌 1995년 광고, 1996년 광고, 2000년 광고, 1999년 광고, 2001년 광고, 2003년 광고 캠페인 (광고 외 사진=톰 포드 인스타그램)

◆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새로운 구찌, SNS통해 Z세대 공략

톰 포드의 빈 자리를 알레산드라 파키네티(Alessandra Facchinetti)로 채운 구찌는 하지만 기대와 다른 모습을 보이자, 톰 포드의 디자인 팀에서 2년 경력을 다진 프리다 지아니니(Frida Giannini)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교체했다.

톰 포드가 남겨놓은 유산과 지아니니의 무난한 리드로 체면은 유지되었지만 차츰 과거의 인기와 멀어지던 구찌는 2014년 새로운 CEO 마르코 비자리(Marco Bizzarri)의 등장으로 반등의 기회를 잡았다.

경영 컨설턴트 출신인 비자리는 케링 그룹 내에서 ‘스텔라 맥카트니(Stella McCartney)’와 ‘보테가 베네타’의 경영을 맡아 능력을 인정받은 인물.

우선 방만하게 운영되던 매장들을 정리하는 작업에 들어가면서 비자리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후보를 물색했고, 알레산드로 미켈레(Alessandro Michele)의 파격 승진으로 결론을 내렸다.

로마에서 태어나 아카데미아 디 코스튬 에 디 모다(Accademia di Costume e di Moda)에서 패션 수업을 받은 미켈레는 ‘펜디(Fendi)’에서 경험을 쌓은 후 2002년 구찌의 런던 디자인 팀에 합류했다. 그리고 팀 내에서 다양한 디자인 작업을 이어가던 그는 마침내 2015년 가을 시즌부터 구찌의 수장으로 나서게 되었다.

히피였던 아버지로부터 자유 분방한 기질을 물려받은 미켈레는 복고풍 스타일에 스트리트 패션을 결합시킨 괴짜스러운 매력의 구찌 컬렉션을 발표해 패션계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그의 발탁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켰다. 하지만 변혁을 가져오면서도 그는 구찌의 전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조금 비틀었을 뿐.

더블 G 로고는 두 개의 G가 마주하지 않고 나란히 놓인 모습을 추가했고, 모노그램 캔버스 위에는 커다란 자수나 아플리케를 넣어 팝아트의 느낌을 가미했다. 또한 삼색의 웹 라인은 기존의 레드, 그린 외에 레드, 블루의 매치를 선보여 세련된 감각을 어필했다.

구찌 클래식인 홀스빗 로퍼를 가지고는 뒤축이 없는 슬리퍼 버전을 만들어내 뜨거운 반응을 일으킨 미켈레는 기세를 몰아 뒤축을 접어 신을 수 있는 슈즈를 발표하기도.

이렇듯 미켈레에 의해 달라진 구찌는 오랜만에 눈부신 성장을 기록하게 되었는데, 이는 구찌가 디자인과 함께 SNS 마케팅에도 공을 들인 결과.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Z세대에 가까워지기 위해 웹사이트를 리뉴얼하고 인스타그램과 스냅챗 등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한 구찌는 기발하고 유머러스한 패션 컨텐츠를 생산하고 공유하며 어린 구찌 팬들을 키워가고 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알레산드로 미켈레, 구찌 2018년 광고, 2016년 광고, 2015년 광고, 울트라페이스 스니커즈 이미지 컷, 2016년 광고, GG 마몽 백 이미지 컷 (광고 외 사진=미켈레 인스타그램, 구찌 홈페이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알레산드로 미켈레, 구찌 2018년 광고, 2016년 광고, 2015년 광고, 울트라페이스 스니커즈 이미지 컷, 2016년 광고, GG 마몽 백 이미지 컷 (광고 외 사진=미켈레 인스타그램, 구찌 홈페이지)

폭발적 상승세에 고무된 구찌는 2018년 이탈리아 피렌체에 레스토랑 ‘구찌 오스테리아(Gucci Osteria)’를 열었다.

미슐랭 스타 셰프 마시모 보투라(Massimo Bottura)를 영입해 메뉴를 준비한 구찌 오스테리아는 이탈리아 전통 요리에 즐거운 요소를 가미해 극찬을 받고 있는데, 과연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구찌 스타일 역시 신선한 맛을 계속 유지하며 인기를 지킬 수 있을지 관심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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