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is] 90세까지 배우하겠다던 윤정희...병마 이기고 은막에서 다시 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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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90세까지 배우하겠다던 윤정희...병마 이기고 은막에서 다시 보길
  • 김이나 컬쳐에디터
  • 승인 2019.11.25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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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츠하이머 투병중...영화 `시` 이후 작품에서 매력 볼수 있을까
1966년 신인배우공모에서 1200대 1 경쟁률 뚫고 주연배우로 뽑혀
시골 아낙부터 세련된 신여성까지 연기...'스펙트럼 넓은 배우'로 알려져
영화 '시' 에서 단독주연 맡아 칸 레드카펫 밝고 소원 이루기도
안개1967 작품. KMDb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원작인 영화 '안개'(1967).사진=KMDb

 

[오피니언뉴스=김이나 컬쳐에디터]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영화 '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자가 완성한 시의 한 구절.

영화 '시'의 주연배우로 데뷔 45년만에 처음으로 칸 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은 뒤 다시 관객을 만날 것을 약속했던 배우 윤정희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

한국 영화 100년사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한국 영화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에 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던,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배우 윤정희.

뼛속까지 배우였던 윤정희, 알츠하이머를 극복하고 다시 깨어나 우리를 만날 수 있을까.


◆12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배우로

본명 손미자. 1944년 7월 30일 전라남도 광주광역시 태생. 예명 윤정희는 본인이 지었다. 배우가 되더라도 조용히 살고 싶다는 생각에 ‘고요할 정(靜)’에 ‘계집 희(姬)’로 이름을, 조선의 마지막 황후 윤비를 생각하며 성을 ‘윤’으로 했다.

부산에서 성장하다 다시 광주로 돌아와 전남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조선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중퇴하고 우석대학교(고려대학교 전신) 사학과를 졸업한 후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연기 생활 중에도 틈틈이 학업을 겸해 ‘영화사 측면에서 본 한국 여배우 연구'로 1971년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한창 전성기에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제3 대학교에서 예술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배우의 길로 들어선 것은 조선대학교 재학중이던 1966년 합동영화사 주최의 신인배우공모에 참가해 1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주연배우로 뽑힌 것이 계기였다. 이듬해 1967년 영화 ‘청춘극장’으로 데뷔했다. 이 영화로 대종상 신인상과 청룡영화제 인기상을 수상하며 단숨에 스타의 자리에 오른다.

청춘극장 윤정희
데뷔작 '청춘극장'에서 윤정희(왼쪽)와 신성일(오른쪽). 사진=KMDb

그 후 '강명화', '안개', '장군의 수염', '독 짓는 늙은이', '지하실의 7인', '분례기', '무녀도', '궁녀', '만무방' 등 데뷔 후 7년동안 약 30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전성기때는 주연작품 5개가 동시에 극장에서 상영되기도 했다고. 

1976년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한 후에도 은퇴하지 않고 2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해 주요 영화상에서 여우주연상만 스물 네차례나 수상했다. 유현목 감독의 ‘분례기’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정진우 감독의 ‘석화촌’과 신상옥 감독의 ‘효녀 심청’으로 2년 연속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차지하며 연기파 배우로서의 명성을 구가했다. 

특히 윤정희는 문희, 남정임과 함께 60~70년대 한국 영화계에 여배우 '트로이카'로 유명했다. '세 필의 말이 끄는 썰매 혹은 마차'(일명 삼두마차)란 뜻인 '트로이카’(troika)'라는 이름으로 한국 영화사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다. 50~60년대 여배우들이 정숙한 현모양처 아니면  팜므파탈로 양분돼 있던 반면, 이들 세 사람은 각자의 개성에 따라 고정된 틀을 깨고 다양한 여성상을 연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화 데뷔는 세 배우중 가장 늦었지만 영화에 대한 집념과 열정 만큼은 단연 으뜸이었던 윤정희. 여배우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1973년,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수상 소감 중에 그동안 꿈꿔왔던 프랑스 유학을 발표한다.

분례기
가난한 농삿군의 딸로 열연한 영화 '분례기'. 사진=KMDb


결혼 후 은퇴한 문희, 남정임과 달리 윤정희는 1973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뒤에도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자유부인'(1981), '위기의 여자'(1987),' 눈꽃' (1992) 등 20여편 영화에 출연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94년 '만무방'을 끝으로 차기작이 없다가 2010년 이창동 감독의 작품 '시'에 주연으로 캐스팅됐다. 이 작품으로 배우생활 45년만에 처음으로 프랑스 칸 영화제에 초대돼 레드카펫을 밟기도 했고, 2010년 생애 두 번째 대종상 여우주연상의 영광을 안게 된다.

윤정희는 작품들을 통해서 매우 다양한 배역을 맡아 연기했다. 일본 유학중인 신여성(청춘극장), 성악을 전공한 음악교사(안개), 가난한 농사꾼의 딸(분례기), 불륜을 저지른 아내(자유부인) ,전쟁통에 남편을 잃은 비운의 여인(만무방) 등을 맡아 열연했으며 역할뿐만 아니라 멜러물, 문예물, 액션, 사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빛나는 배우였다.

윤정희는 작품 선정에 있어서도 매우 신중했한 배우였다. 때문에 그가 출연한 영화들 대부분이 한국영화계의 대표적인 작품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였다. 석사학위를 지닌 뛰어난 배우였지만 촬영현장에서 거드름 피우지않는 성실한 배우였으며, 평소 영화배우를 천직으로 생각하며 진지하게 연기했다고 전해진다.

 

칸 영화제 시상식 당시 윤정희(가운데)와 이창동(오른쪽). 이 영화제에서 이창동 감독은 영화 '시'로 각본상을 수상했다.사진=연합뉴스
칸 영화제 시상식 당시 윤정희(가운데)와 이창동(오른쪽). 이 영화제에서 이창동 감독은 영화 '시'로 각본상을 수상했다.사진=연합뉴스

 

◆파리에서의 운명적 만남…납치 시도 당하기도

당대 최고의 영화배우와 피아니스트와의 만남. 윤정희의 러브스토리는 지금도 화제다.

1971년 뮌헨 문화올림픽에 ‘효녀심청’이 초청되어 윤정희는 신상옥 감독과 참석했는데, 당시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중이던 작곡가 윤이상 선생도 오페라 ‘심청이’를 뮌헨에서 공연 중이었다. 오페라 '심청이'를 보러 간 윤정희는 오페라 계단에서 착해보이는 한국 남자와 마주쳤고 그 청년은 자리를 찾지 못한 윤정희을 친절하게 안내했다. 오페라가 끝난 후 윤이상이 마련한 자리에서 윤정희는 그 청년이 피아니스트 백건우라는 것을 알게된다.

윤이상과 잘 아는 사이였던 백건우도 뮌헨에 연주 여행차 간 길에 '심청이' 오페라를 보러 갔던 것. 백건우는 윤정희에게 꽃을 선물하며 호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이 날의 인연은 여기까지였다.

윤정희는 2년 후 파리에서 유학을 시작했다. 어느 날 친구와 영화를 본 뒤 식당에 들어갔는데 그 곳에 백건우가 들어왔다. (후에 윤정희는 '천생연분'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동안 연락도 한 번 없었는데 우연히 2년 만에 만났던 것이다. 그 후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파리의 몽마르뜨 인근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아버지처럼 모시던 이응로 화백에게 둘의 결혼 계획을 알리는 바람에 국내에까지 소식이 전해졌다. 둘은 1976년 파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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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윤정희는 프랑스로부터 문화예술공로훈장을 수상했다. 훈장 수여식후 윤정희(왼쪽)가 남편 백건우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역경도 있었다. 결혼 이듬해 1977년 북한이 윤정희 부부를 납치하려는 시도를 했다가 미수에 그쳤던 사건이 있었다. 주목받는 피아니스트와 미모의 영화배우가 북한 공작원의 납치를 모면하고 탈출한 영화 같은 사건이었다. 원로 화백의 아내가 연주회 초청을 구실로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던 윤정희 부부를 유인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부부는 간신히 위기을 모면했다고 한다.

지금껏 부부는 늘 함께였다. 연주 투어를 다니느라 1년에 절반 이상을 집을 떠나있는 남편 백건우 옆에는 항상 윤정희가 있었다. 한 개의 휴대폰을 사용했다는 것으로 그들의 애정을 짐작할 수 있다. 걷기를 좋아하는 부부는 차 없이 생활하며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골목을 걸어다니며 대화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네이버
시를 쓰고 싶은 미자.그러나 세상은 그가 시를 쓰기엔 너무나 가혹한 것. 사진=네이버영화


◆시를 쓰고 싶었던 ‘미자’...그러나 시를 쓰기에 삶은 너무 가혹한 것

윤정희는 영화 '만무방' 이후 16년만에 영화에 출연하게 됐다. 영화 '시'는 이창동 감독이 처음부터 윤정희를 염두에 두고 각본을 쓰기 시작했던 작품이다. 윤정희의 45년 연기인생을 정리하는 작품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최근에 윤정희의 투병 소식이 알려지면서 영화는 다시 주목받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알츠하이머 환자 양미자 역할. 어쩌면 작품 ‘시’가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린다.

영화 '시'는 치매로 조금씩 기억을 잃어가는, 그러나 시처럼 아름다운 세상을 기록하고 싶어 하는 미자의 이야기다.

경기도의 작은 도시, 낡은 서민 아파트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손자를 키우며 살아가는 미자. 조손가정의 할머니로 또 요양보호사로 살아가지만 하늘하늘한 꽃무늬 의상에 모자, 세련된 머플러까지 꾸미는 것을 좋아하고 호기심도 많은 엉뚱한 여성.
 

위령미사에 참서개 마음이 어지러운 미자.사진=네이버영화
소녀의 위령미사에 참석하면서 마음이 혼란스러운 미자. 사진=네이버영화

미자는 어느 날 동네 문화센터에서 우연히 '시' 강좌를 수강하게 되며 난생 처음 시를 알게 된다. 시상을 떠올리기 위해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일상을 주시하며 아름다움을 찾으려 하는 미자. 지금까지 봐왔던 모든 것들이 마치 처음 보는 것 같아 소녀처럼 설레인다. 그러나 그에게 예기치 못한 사건이 찾아오면서 세상이 자신의 생각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손자가 관련된 한 소녀의 죽음. 합의금을 마련하라는 주변의 재촉.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도 딸에게는 걱정말라며 내색하지않는 미자. 미자는 시를 쓰기엔 이 세상이 너무 가혹하다고 느낀다.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봐야 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대한 인터뷰 중 윤정희는 16년간 영화 출연을 하지 않았지만 은퇴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한다. 90세가 넘은 나이의 배우에게도 매력 있는 역할이 주어질 것이라 기대한다고도 말했다.

영화 '시'로 이창동 감독은 칸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으며, 윤정희는 LA 비평가협회상 여우주연상, 카이로 국제영화제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상했고 국내에서는 대종상 여우주연상,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의 투병 소식에 많은 팬들은 안타까워하고있다. 그가 공언했던 것처럼 90세가 되려면  20년 넘게 남아있는데 말이다.

한국영화의 살아있는 전설 윤정희, 그가 환한 미소로 다시 스크린으로 돌아오길 팬들과 함께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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