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스, 배상문, 그리고 하스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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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스, 배상문, 그리고 하스 부자
  • 황헌
  • 승인 2015.10.12 09: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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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문 마지막날 마지막홀의 실수는 좋은 약이 될 것

 

 

(mbc 황헌(사진) 앵커가 11일 '2015 프레지던츠컵'을 관전하고 쓴 평입니다. /편집자주)

 

 

 

10시50분쯤 잭 니클라우스 골프클럽 1번 홀 티잉 그라운드로 이어지는 곳에 선수들만이 연습할 수 있는 그린이 있었다. 빗방울이 계속 떨어졌고 찬바람이 불어 선수나 갤러리 모두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는 기상 조건이었다. 골퍼에겐 비보다 바람이 더 무서운 변수다.

그곳 연습 그린 주변에서 두터운 파카를 입은 채 계속 어프로치 샷 연습을 하는 선수가 있었다. 병역 문제로 마음고생이 많았던 배상문이었다. 인터네셔널 팀 단장 닉 프라이스는 한국에서 열리는 프레지던츠컵에 한국 갤러리를 끌어모으고 관심과 흥미를 높일 선수가 없어 고심을 했었다. 한때 부단장인 최경주 선수를 단장 지명 선수로 천거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프라이스는 배상문을 선택했다. 나머지는 미국과 유럽 선수를 제외한 전세계 랭킹 상위 선수 11명으로 자동 선발되었다. 메이저 타이틀을 거푸 챙기며 올 시즌을 가장 성공적으로 마친 제이슨 데이는 세계 랭킹 2위. 그를 제외하곤 매스터즈 우승의 전력을 가진 같은 호주의 아담 스코트 정도가 눈에 띄는 선수였다. 일본의 마쓰야마 히데키도 최근 상승세였지만 미국의 쟁쟁한 랭커들에 비하면 인터네셔널 팀의 전력은 한 수 아래로 보였다.

 

배상문은 자신을 지명한 단장에게 보답하듯 전날까지 혼자 2승 1무승부를 기록, 2와 1/2 승점을 얻었다. 대니 리와 한 조로 나간 포섬에서 마지막홀 극적인 버디퍼팅으로 승점 1을 챙긴데 이어 다음날인 토요일엔 일본의 히데키와 유창한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하며 1승 1무를 합작해 인터네셔널 팀의 반전 토대를 만들었다.

▲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가운데)이 8일 인천 잭 니클라우스 GC에서 열린 2015 프레지던츠컵 첫 날 경기 개회식에서 닉 프라이스 인터내셔널팀 단장(왼쪽), 제이 하스 미국팀 단장과 우승 트로피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닉 프라이스 단장은 파이널 데이 싱글매치 12 경기의 마지막 주자로 배상문을 지명했다. 미국팀 단장 제이 하스는 자신이 지명한 대표이자 아들인 빌 하스를 배상문과 맞붙을 최종 주자로 지명했다. 참으로 운명의 장난이 아니면 불가능한 조합이자 매치가 펼쳐지게 된 것이다. 마지막 조인 배상문과 빌 하스는 10월 11일 일요일 오전 11시 27분 출발 예정이었다. 그 티오프 시간 직전까지 비바람 속에서 배상문은 묵묵히 칩샷만을 연습하고 있었다. 오르막 그린 앞에서 공을 스무 개 서른 개 계속 핀으로 보냈다. 마치 이날 경기의 마지막 승부처 상황을 예측이라도 한 듯 배상문은 그렇게 어프로치 연습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침내 1번홀 티잉 그라운드로 이동하는 배상문에게 갤러리들은 “배상문 파이팅!”을 연호했고 그는 웃음으로 답했다.

▲ 11일 인천 송도 잭 니클라우스 GC에서 열린 2015 프레지던츠컵 마지막날 싱글 경기에 출전한 배상문이 1번홀에서 벙커를 탈출하고 있다. /연합뉴스

 

단체 경기는 선수 개개인의 기량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팀웍이 결정적인 승부의 변수가 되곤 한다. 지난달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렸던 유럽과 미국 여자 골프의 단체전에서 수잔 페테르센이 컨시드 논란을 일으켜 미국팀 선수 전원의 투지를 불태우게 하였고 결과 미국이 대역전극의 드라마를 쓰게 된 것이 단적인 예이다. 세계 랭킹 1위 미국의 조던 스피스가 졌고 인터네셔널 팀 중 최고 랭커인 세계 랭킹 2위 호주의 제이슨 데이도 졌다. 랭킹과 무관하게 결과가 이어지고 있었다.

 

1995년 뉴욕에서 열린 라이더컵 파이널 데이. 당시 미국의 최종 주자는 이번 한국 프레지던츠컵 대회 미국팀 단장인 제이 하스였다. 1982년생으로 당시 13세였던 제이 하스의 아들 빌 하스는 아버지를 응원하기 위해 갤러리로 따라다녔다. 제이 하스는 무명이나 다름 없던 아일랜드 출신 필립 월튼과 17홀 현재 올 스퀘어로 비기고 있었다. 운명의 마지막 홀. 제이 하스는 파퍼트를 실패하며 아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유럽팀에 미국팀이 역전패 당하게 만든 주인공이 되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15년 가을 인천 송도에 승부의 신은 또 다시 제이 하스와 빌 하스 부자에게 커다란 압박을 주고 있었다. 바로 앞선 경기까지 14와 1/2로 미국팀과 인터네셔널팀이 비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이 하스는 랭킹이 못 미쳐 선수에 선발될 수 없는 자신의 아들 빌 하스를 단장 지명 선수로 합류시킨 데 대한 부담으로 얼굴을 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배상문이 1 다운, 한 홀을 진 채 18번홀 파 5 운명의 코스에 들어섰다. 먼저 티샷을 날린 빌 하스의 볼은 페어웨이 왼쪽에 안착했다. 이어 배상문이 드라이버로 공략한 볼은 하스보다 10야드 정도 더 날아가 페어웨이 한 가운데로 가볍게 자리를 잡았다. 뒤이어 하스는 아이언 3번으로 친 세컨샷 볼이 그린을 향해 굴러오더니 빠른 그린을 지나 벙커로 빠지고 말았다. 이제 배상문의 볼과 홀까지 남은 거리는 240야드. 배상문의 아이언샷한 볼은 그린을 향해 멋지게 날아왔지만 결국 그린에 살짝 못 미쳐 오히려 뒤로 10야드 이상 굴러내려오고 말았다. 뒷바람이 세게 불고 있었던 터라 아마도 배상문은 핀 오버해 버디 챤스를 잡지 못할 것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백스윙 하는 그 0.5초의 짧은 시간 그의 머리엔 지난 시간 병역 문제로 자신에 대해 쏟아진 국내의 비난 여론의 무게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물론 결정적으로 그의 근육을 경직되게 만든 건 팀 성적이 올 스퀘어라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날 경기 벙커에 자주 빠졌지만 배상문은 줄곧 결정적 벙커샷으로 위기에서 벗어났었다. 그걸 생각했다면 차라리 핀 옆 벙커로 빠져도 좋다는 생각으로 근육의 경직을 털고 시원한 스윙을 날렸더라면 가볍게 투온, 이글 찬스까지도 가능했던 상황이었지만 배상문은 최악의 중압감이라는 변수 앞에 무너지고 만다. 먼저 시도한 세 번째 샷은 정말 아무리 많은 연습 스윙을 했지만 중압감 그 자체였다. 필자는 네 시간 전 배상문이 1번홀 티잉그라운드로 가기 전 어프로치샷 연습에 얼마나 집중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비록 투온에는 실패했지만 배상문의 세 번째 친 볼이 핀 주변 2-3미터 안에 정지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거기서 배상문에겐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 연출되었다. 배상문은 포온에 그치고 말았고 빌 하스는 압박감에서 벗어난 선수가 흔히 그러하듯 맘 편한 상황에서 가볍게 벙커샷을 핀 옆에 붙였고 그걸로 승부는 끝이었다.

▲ 11일 인천 송도 잭 니클라우스 GC에서 열린 2015 프레지던츠컵 마지막날 싱글 경기에서 인터내셔널팀의 배상문이 18번홀에서 결정적인 세번 째 샷 실수를 한 뒤 아쉬워 하고 있다. /연합뉴스

 

닉 프라이스는 단장 추천 몫으로 배상문을 선택했고 배상문은 분명 앞선 두 날의 경기에서 그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하였다. 하지만 마지막 날 싱글 매치에 한국의 젊은 선수를 최종 주자로 배치한 것이 신의 한 수가 될지 아니면 패착이 될지는 미지수였다. 그리고 결과는 배상문의 패배로 끝났다. 그보다 더 부담스러운 사람은 하스 부자였다. 라이더컵이나 프레지던츠컵 같은 국가 대항전에서 아버지가 단장, 아들이 선수로 나온 최초의 조합. 그 부자는 20년 전 당시 단장인 아버지의 실패 중압감에도 불구하고 결국 최종 승리를 완성하는 신의 한 수를 합작해낸 셈이다.

배상문은 한창 기량이 물에 오른 때 군에 입대해야하는 상황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연기도 하고 소송도 했지만 그때마다 국민들 여론은 부정적으로 쌓여갔다. 프로 골프에서 자신의 명예와 돈을 위해 뛰는 선수에게 병역의 특혜를 줄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리고 배상문은 결국 이번 시즌을 끝으로 하고 군에 입대하기로 하였다. 어쩌면 닉 프라이스는 한국에서 열리는 대회이기도 해서 그랬지만 배상문에게 마지막으로 국가의 이름을 빛낼 기회를 주었는지도 모른다. 최경주 부단장도 그걸 힘썼을 것이다. 타이거 우즈조차 이번 한국에서 열리는 대회에 자신이 단장 추천 선수로 올 수 있도록 뽑아달라고 제이 하스에게 여러 차례 전화로 부탁을 할 만큼 누구나 출전하고 싶은 경기가 바로 프레지던츠컵이다. 배상문은 그런 영광스러운 추천에 멋지게 보답했다. 이제 그가 갈 길은 논산 훈련소다. 다 잊고 멋지게 병역 의무를 이행하기 바란다. 선수 자격 심사에 엄격하기로 유명한 미국 PGA 협회 조차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배상문 선수에게 풀시드를 주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마지막날 마지막 홀에서 있었던 실수가 배상문에게 좋은 약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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