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에 미친 사람들(중) - 외도 끝에 다시 찾은 농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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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 미친 사람들(중) - 외도 끝에 다시 찾은 농촌
  • 박범준
  • 승인 2015.09.30 15: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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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공장도 하고 유통사업도 했지만, 결국은 농민 속으로

1987년 노태우 후보 당선으로 막을 내리고, 1988년초 농번기에 들어가기 전에 ‘엄다면 청년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1989년 ‘엄다면 농민회’로 규모가 무지하게 커졌다.

그리고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출범하게 된다. 나는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남도연맹’ 초대 정책실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광주에 나상기 선배님이 책임을 지고 운영하던 ‘농민문제연구소’에서도 일을 하게 되었다.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필요로 하는 내용을 파악하고, 자료를 제작하여 신속하게 전달하는 일과 점증하는 수입개방에 대응하여 농민투쟁을 조직하기도 하고, 시시때때로 시, 군 현장을 다니며 회의를 하고, 참으로 바쁜 일들의 연속이었다.

노태우 정권이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민주진영은 민주정부 수립에 대한 기대를 품고 대정부 투쟁을 보다 가열차게 전개하였다. 1990년 9.7일 농민대투쟁, 1990년 11월 광주전남민중대회 등 크고 작은 싸움속에 하루가 너무도 짧게 흘러갔다.

▲ 강원 평창군 대관령의 고랭지 무밭에서 농민들이 무 수확을 서두르고 있다. /연합뉴스 (이 사진은 기사와 직접 연관이 없습니다.)

 

아버님 돌아가신후 집안 일 맡아 두부공장 경영

1991년 1월 불과 59세의 나이에 화병으로, 지병으로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학자의 길을 가리라 믿었던 장남이 삶의 진로를 ‘농민속으로’ 결정한 것에 대해 홧술을 드시고, 지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버리신 것이다. 선배들과 의논한 결과 농민단체에서 활동도 중요하지만 최우선적으로 가정을 안정시키는게 좋겠다고 하여 서울로 돌아와 아버님이 하시던 두부공장을 운영하게 되었다.

아버님이 많이 아프셔서 그랬는지, 두부공장은 참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다. 임금은 보통 2~3개월 밀려 있었고, 은행 부채가 1억 4천만원 정도, 그리고 미수금도 상당히 많았다.

참으로 막막하고 막막할 따름이었다. 기업 경영에 ‘ㄱ’자도 모르는 내가 두부공장을 그것도 다 쓰러져가는 두부공장을 맡아서 운영한다는 것은 엄청난 시련이었다.

주변의 지인 특히 삼성에 다니던 큰처남께 도움을 요청했고, ‘품질 제일주의, 민주적인 기업 운영, 회계의 투명성’의 3대 원칙을 지키면 웬만한 중소기업은 성장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셨고,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녔다.

두부의 원료인 콩에 대한 자료와 두부에 대한 자료를 얻기 위해 서울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식품공학과, 도서관을 이 잡듯 뒤지고, 식품개발연구원, 연식품연합회, 콩연구회, 특허청 등등 모조리 쫒아다니며 자료를 얻고 밤새 뒤척이며 하나하나 읽고 메모하고, 메모된 내용을 공장에 적용시키고, 그러면서 품질이 서서히 개선되는 것을 느꼈다.

아울러 월요일 간부회의 수요일 부서회의, 매월 1주 금요일 직원전체 회식등을 통해 민주적인 의사결정시스템을 마련하여 ‘한 마음 한 뜻’이 되도록 노력하였고,

매월 전체회의에서 전월 수입과 지출 그리고 이익을 공표하고, 이익금의 일정부분을 직원 상여금으로 내놓게 됨에 따라 두부공장은 활력을 찾고, 매월 이익 규모가 커져갔다. 불과 1년여 만에 매출액은 3배로 뛰었고, 직원들의 급여는 4차례 인상을 통해 업계 최고 수준의 급여를 보장했다.

 

유통회사 설립

식품회사의 경험을 갖고, 농산물 유통이 우리 농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거라 믿으며, 그리고 서울에서 농민들을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 일의 하나로 ‘한우리 유통’이라는 농산물 유통회사를 설립했다. 맨 주먹으로 시작한 농산물 유통, 사업자금을 모으기 위해 설명절을 앞두고 집중적으로 영업을 하여, 불과 45일 만에 매출액 4억5천만원 순이익 5천만원 정도를 벌수 있었다.

운전자금 5천만원으로 본격적으로 농산물유통에 뛰어든 나는 유통회사에 다니는 후배의 요청으로 경기도 안산에서 처음으로 물산전을 기획하게 되었다. 물산전은 크게 성공을 하였다. 물산전 이후, 소문을 듣고 여기저기 큰 유통회사에서 같이 일하자고 연락이 왔다. ‘한우리유통’에 몸담고 있던 직원이 대략 50여명, 물산전만 갖고는 먹고살기도 빠듯하고, 그래서 아파트단지 알뜰장터를 구상하게 되었다. 마침 평촌아파트 단지 부녀회장을 맡고 계셨던 박남식 선배님의 도움으로 아파트 알뜰장터를 개설하게 되었다.

신규 아파트단지라 물가도 비싸고, 대개 대출을 받아서 집을 마련했기 때문에 인근 슈퍼마켓보다 거의 절반가격인 알뜰장터는 대인기를 누리게 되었고, 단지별로 돌아가면서, 월요장, 화요장, 수요장, 목요장, 금요장을 개설하였다.

농산물 유통을 직접해보니까, 정부관련 기관에서 발행하는 유통전문자료들이 실질과는 많이 다르고, 농민들에게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략 5년간 농산물 유통을 직접하면서 다양한 유통경험을 했다.

대규모 행사도 하고, 백화점 물산전도 하고, 아파트 알뜰장터도 하고, 명절날 선물기획 특판도 하고, 노조와 협의하여 생활협동조합내에 우리농산물 코너도 5개나 운영하게 되었고, 무역도 경험하였다.

농산물 유통에 대하여 어느정도 이해하고 나자, 1997년이 되었다.

나상기 선배의 요청으로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농어민특별위원회 사무국장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대략 1년동안 전국 방방곡곡의 현장을 돌아다니게 되었고, 현장의 목소리와 현실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현장의 목소리와 현실을 대선농업정책 공약에 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나상기 선배님을 도와서 기필코 김대중 선생을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다짐도 했다.

 

농민들의 힘을 결집시키고, 결집된 힘을 김대중 지지로 만들기 위해 나상기 선배님이 고군분투하였고, 나도 열심히 뒷바라지를 했다. 천우신조일까, 1997년 12월 18일 농민들의 압도적인 지지, 그리고 불과 20~30만표 차이로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 나상기 선배가 김대중 대통형 만들기의 일등공신이 되는 일이 발생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공을 다 차지해 버렸지만,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 공신이 바로 나상기 선배임을 나는 확실히 증언할 수 있다.

 

'한우리유통' 설립

1998년 김대중 정부하에서 가장 크게 해결해야할 과제로 ‘농산물유통개혁’이라 여기고 ‘농산물유통개혁 포럼’을 만들고, 청량리 동부청과 사무국장으로 자임해서 들어갔다. 농산물 유통 개혁을 위해 농안법을 손봐야한다고 생각했고, 제도개선에 치중했다.

‘농산물유통개혁포럼’ 활동은 11월초에 종료되고 나름 성과를 냈지만, 근본적인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농산물유통개혁]’ 성과가 과연 누구에게 돌아갔는가? “결과적으로 도매법인, 중도매인들간의 제밥그릇 챙기기에 놀아난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면서, 농산물유통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품목별로 생산자가 조직화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대외활동에 전념하는 동안 두부공장은 정부에 토지가 강제로 수용되면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매출액은 제자리에서 맴돌고, 지출은 늘어나고, 수익성은 떨어지고, 공장 이전에 따른 자금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보상금은 쥐꼬리만큼 적고, 결국 두부공장의 요청으로 1999년 두부공장으로 복귀했다.

두부공장에 와서 품질을 재차 확인하고, 대형거래처인 수도권의 40여개 대학에 납품을 하게 되었고, 8개월의 노력 끝에 풀무원에 OEM으로 생산 판매하면서, 월 1억 5천만원이었던 매출액은 불과 몇 달사이에 수직적으로 상승하여 월 5억에서 6억원에 이르게 되고, 두부 단일품목으로 년매출 70억에 이르게 되었다.

2년여동안 죽을둥 말둥 전력투구하던 두부공장은 동업자와의 갈등과 불화로 접게 되고, 농업관련 업무로 복귀하게 되었다.

한국농산물류 기획실장으로 물류에 대해 단기간이지만 집중적으로 공부하게 되었고, ‘지역재단’ 교육위원으로 활동하며 인재 육성방안에 대해 많은 의견을 교환했다.

2005년 대통령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자문위원이 되어, 강원도 홍천군의 인재육성 아카데미에 참여하게 되고, 연이어 전남 나주, 충북 보은, 강원도 양구와 인연을 맺게 된다. 몇 년간 여러지역에서 추진했던 활동이 2010년 강원도 양구로 거처를 옮기며, 강원도지역에서 주로 활동하게 된다.

강원도청과 강원발전연구원의 지경배 박사의 요청으로 ‘강원도 권역별 농산어촌자원조사연구’, ‘마을기업’, ‘주민기업’, ‘사회적경제종합발전계획수립’, ‘농공단지특성화 고도화방안’ 등을 수행했다.

▲ 강원 평창군 대관령의 고랭지 무밭에서 농민들이 무 수확을 서두르고 있다. /연합뉴스 (이 사긴은 기사와 관련이 없습니다.)

 

'농업' 중시에서 '농촌' 중시로 전환

특히 이 시기 ‘마을기업’과 ‘주민기업’ 활동을 하면서 농촌마을을 심도있게 들여다 볼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이글을 쓰게 되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2000년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 농업 농촌 농민정책의 우선순위가 ‘농업’에서 ‘농촌’으로 전환되었다. 어쩌면 1994년 WTO의 체결과 연이어 추진되는 FTA로 인하여 수입개방의 파고가 더욱 더 거세질 것이고, 이러한 시대적 흐름속에서 한국농업은 회생의 가능성이 낮고, 따라서 정책의 방향이 ‘농업의 육성’아 아닌, 농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방향으로서 ‘농촌정책’으로 급선회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2000년 이후 지역균형개발정책과 함께, 무수히 많은 농촌정책이 수립되고 추진되었다. 중앙의 각 부처 사업도 있고, 광역자치단체에서 추진하는 농촌정책사업도 있었고, 기초자치단체 독자적으로 추진되는 사업도 있었다.

‘농업’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주목하던 나는 ‘마을기업’, ‘주민기업’ 육성 지원사업에 참여하면서, 그간 추진되었던 ‘농촌정책’의 현실을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수많은 예산이 투여되고 있는 농촌정책 사업의 최대의 수혜자는 누구일까? 당연히 농민이어야 했다. 하지만 정책 취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최대의 수혜자는 ‘농촌정책’ 사업을 지원하는 컨설팅회사와, 자칭 타칭 전문가들이었다.

‘농촌컨설팅 회사’의 임원과 자칭 타칭 전문가들은 각종 농촌정책 사업의 심사 선정위원으로 있으면서 사후 평가위원을 겸하고 있었다. ‘농촌정책 사업’은 마을에서 ‘사업계획서’를 제출하고나면, 심사 선정위원들이 최종 심사를 하고 선정한다. 그리고 년말이 되면 평가를 통해, 지원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또다른 ‘농촌정책’ 사업으로 연결을 시켜주던가를 결정한다.

문제는 ‘마을사업계획서’를 마을 주민들이 만들지를 못하니까, 자칭 타칭 전문가들이 대신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공짜로?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농촌정책 사업의 심사 선정위원들이 연고가 있는 마을 이장과 만나, “사업계획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작성해 드리면 됩니다. 그리고 제가 심사 선정위원이니까, 최종 선정되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그럼 저희 마을이야 좋지만, 저희 마을에는 돈이 없는데요?”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농촌정책 사업에 선정되면, 사업비에 교육 컨설팅비 항복을 넣어둘 테니, 사업자금을 받고나서, 그걸 저에게 주면 됩니다”

대개의 경우 이런 절차를 통해서 농촌정책 사업이 추진되다 보니, ‘마을계획서’에는 마을의 자원조사가 제대로 될 리가 없고, 마을사업의 추진도 전문가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게 된다. 사업내용도 다분히 전시적으로 진행되어, 체험관, 박물관, 마을회관 증개축 등 농민들의 소득을 높이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보게 되었고, 그 폐해가 날로 심해짐을 확인하게 되었다. 강원도에서 ‘마을기업’, ‘주민기업’ 육성 지원사업에 참여하면서, 어렵지만, 제대로만 하면 ‘살기 좋은 농촌마을’이 될 수 있다는 희망도 보았다.

그러면서 나름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마을지도자들에게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궁금한 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제공해 줄 필요를 절감하게 되었다.

 

박범준씨 이력
▲1981년 서울대 농과대 입학 ▲1986년 전남 함평군 엄다면 영농 ▲1989년 전남 농민문제연구소 연구실장 ▲1989년 전국농민운동연합 전남 정책실장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남 정책실장 ▲1991년 동양식품 상무 ▲1992년 한우리유통 대표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 농어민특별위원회 사무국장 ▲1999년 성환식품 전무 ▲2001년 (주)한국농산물류 기획실장 ▲2005년 대통령자문 국가균형발전위 자문위원 ▲2013년 강원도 인재개발원 심의위원 ▲2011년~현재 강원마을기업 및 주민기업 육성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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