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낙규의 “철학, 축제에 빠지다” - 칸트와 '무주 반딧불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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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낙규의 “철학, 축제에 빠지다” - 칸트와 '무주 반딧불 축제'
  • 오피니언뉴스
  • 승인 2015.09.09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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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칸트

칸트의 3대 비판서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이다.

‘순수이성비판’은 대상의 객관적 법칙의 인식 문제(진·眞) 즉 우리가 자연을 지각, 인식함에 있어서 어떠한 법칙에 따라, 어떠한 능력에 의해 수행하는지를 논한다.

인간의 감성을 배제한 순수한 이성의 세계, 엄밀한 과학 법칙이 적용되는 합법칙성으로서의 감성계의 세계, 예를 들면 돌멩이의 행로는 포물선 법칙에 의해 예측된 길을 필연적으로 따라간다는 자연 법칙에 대한 원리를 밝힌다.

우리가 무엇을 인식할 때 공간형식, 시간형식, 사고형식인 범주가 작동한다. 그래서 ‘감성 없이는 대상이 주어지지 않고, 지성 없이는 대상이 사유되지 않는다. 내용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고 표현한다.

‘실천이성비판’은 올바른 행위 법칙의 인식 문제(선·善)를 다룬다. 우리의 바람직한 행위법칙이란 어떠한 것이며, 또 그러한 법칙을 인식해 그러한 법칙에 따라 판단하는 능력은 무엇인지를 논하고 있다.

‘모든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고, 내가 행하는 바가 언제나 보편적인 도덕법칙에 타당하도록 행위하라’고 명령한다. 이 행위법칙을 정언명법(定言命法)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절대적인 자유의지(Free Will)에 따라 행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유로서의 인간이기에 인간은 존엄하다고 할 수 있다.

‘판단력비판’은 어떤 것이 아름다운 것은 자연의 합목적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연의 체계는 어떤 통일된 방향에 따라 만들어진 것인데 아름다운 것은 그 통일된 방향에 상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떤 대상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자유로운 상상력이 지성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상상력이 자유로이 활동하는 능력이라면 지성은 개념 및 법칙을 생각하는 능력이다. 숭고의 마음은 상상력과 이성이 합치할 때 발생한다.

칸트는 상상력과 지성의 통일 작용에 의해 아름다움을 느끼는 마음이나, 상상력과 이성의 통일 작용에 의해서 숭고의 마음을 느끼는 것이나 모두 하나의 궁극적 이념에 합치한 마음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하나의 궁극적 이념이라는 목적이 이 세계를 통제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법칙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도덕법칙을 따르는 자유개념의 이원적 존재이다. 이를 매개할 어떤 요소가 필요하다. 그 매개 역할을 아름다움, 숭고, 합목적성의 의미에서 찾은 것이다.

따라서 미는 진과 선을 매개 내지는 통일하는 더 높은 차원의 요소인 것이다. 미와 숭고의 마음은 감성과 이성이 만나는 하나의 통일적 현상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예다.

 

▲ 축제장의 송어 잡기 행사에서 아빠가 잡은 송어를 건네받고는 기쁨과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들어 어쩔 줄 몰라하는 소녀. /사진=강낙규

 

비판은 비난과는 다른, ‘능력들에 대한 올바른 사용의 한계를 규정한다’는 의미다. 어디까지가 정당하고 어디까지가 부당한지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칸트를 비판해보자.

칸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규칙적인 생활’, ‘철학을 어렵게 만든 사람’ 등 요즘 말로 ‘범생’ 이미지다. 하지만 인간 칸트는 또 다른 면이 있다. 154㎝의 작고 깡마른 체구에 안으로 굽은 가슴과 초롱한 갈색눈을 가졌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칸트의 손을 잡고 함께 들로 나가 자연의 대상과 생성에 대해서 그리고 하늘의 체계와 구조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자연에 대한 감명을 열어주고 선에 대한 씨앗을 심어준 첫 번째 사람이었다.

학창시절엔 친구들과 당구와 카드놀이를 즐겼으며 파이프담배를 즐겨 피웠다. 커피와 홍차를 즐겼으며 와인도 즐겨마셨다. ‘요리기술의 비판’이란 논문까지 쓸 정도로 요리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친구와 함께 바닷가도 구경하였으며 필라우에서 쾨니히스부르크까지 배를 타고 여행하면서 배멀미로 고생도 했다. 러시아 경계지방에 거주하는 프리드리히 폰 로소프 장군을 방문하기도 하는 등 여행을 즐겼다. 비록 강의와 논문 준비로 많은 여행을 하지는 못했지만 여행을 좋아해서 물리지리학이란 강의를 하기도 했다.

15년 간 강사 생활을 하면서 가난에 시달렸지만 빚을 지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저고리와 바지 색깔을 맞추어 세련되게 양복을 입었으며 작고 세모난 모자를 착용하고 흰빛이 도는 금발의 가발을 착용했다. 금장이나 비단으로 장식한 단추를 달았으며 유행하던 은색 칼 모양의 죔쇠로 청결하게 묶은 구두를 신고 등나무 지팡이를 들고 다녔다.

당시 살롱은 차를 마시고 교양을 나누는 문화공간이었는데 칸트는 화려한 언변과 부드러운 매너 그리고 애교있는 농담으로 살롱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칸트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귀족부인들은 번호표를 받았다고도 전한다.

신의 존재는 알 수 없지만 있다고 치고, 세계 너머의 세계는 절대적인 선으로 설정하자는 칸트의 윤리철학이 문제가 되었다. 위기상황에 빠진 칸트를 구한 건 다름 아닌 살롱의 귀족부인이다. 그들이 남편들을 졸라준 덕분에 칸트는 위험에서 벗어난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독신주의자는 아니었다. 친척집에서 온 미망인과 베스트팔렌에서 온 소녀를 보고 결혼에 대해서 생각했지만 수입과 지출 즉 자금 문제로 우물쭈물하다가 둘 다 떠나고 만다.

1795년 폴란드가 프로이센과 러시아 그리고 오스트리아로 분할되어 사라지자 ‘영원한 평화’라는 논문을 통하여 국가도 인격체로 자결에 맡겨야지 강대국의 강제적 합병은 안된다고 주장한다. 국제평화를 위해서는 국제연맹이 필요하며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다. 윌슨이 이를 계승했고 우리나라에서는 이 결과로 3·1운동이 일어났다. 칸트로 인해 우리는 3·1절과 유엔데이(10월24일)를 한때 국경일로 정해 쉬기도 했던 적이 있다.

노년에는 친구 자녀를 손자처럼 대하면서 선물을 주고 할아버지처럼 귀여워했다. 칸트 사후 시인 코제가르텐(Kosegarten)은 “칸트는 이 세상의 빛이 아니고 이 세상을 완전히 밝히는 태양 그 자체입니다”라고 칭송했고, 덴마크의 바게센(Baggesen)은 “제2의 메시아”라고까지 했다.

“보다 용기있는 자는 불행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에 대해서 용감히 맞선다.” 칸트의 좌우명이다. 칸트는 옹졸한 학자나 안방샌님이 아니었다.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판단력 비판’에서)

영화 ‘해운대’를 보면 2004년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쓰나미의 영향으로 인도양에서 조업하던 원양어선이 거대한 파도에 침몰할듯 말듯 이리저리 휘둘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을 보는 순간 우리는 거대한 자연의 힘에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영화라는 것을 깨닫고는 안도하게 된다. 인간이 감내할 수 없는 역동적인 힘을 이성으로 종합함으로써 마음을 안도하게 하는 것을 ‘숭고’(The Sublime)라고 한다.

쓰나미같은 거대한 힘은 상상이 안되고 감성적인 능력을 초월하여 스스로 자신의 무능력함을 알게 됨으로써 불쾌한 감정이 생기게 하지만 곧 이성으로써 무한한 전체를 생각하는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이러한 불쾌감은 쾌감으로 바뀌며 숭고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역동적 힘에 의한 숭고를 ‘역학적 숭고’라고 하는 반면, 피라밋이나 쾰른대성당 같은 거대한 대상과 마주쳤을 때 한눈에 이 대상이 다 들어오지 않아 그 크기에 상상력이 좌절되어 나의 왜소함을 일깨워 줌으로써 숙연함을 느끼게 하는 것을 ‘수학적 숭고’라고 한다.

역동적인 힘이나 어마어마한 크기가 감성능력의 한계를 능가할 때 감성은 상상이 안되고 신체능력은 감당이 안되어 자신의 무능력을 알게 된다. 동시에 무한한 전체를 생각하는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면서 숭고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대상이 숭고한 것이 아니라 그런 대상을 숭고하다고 판단하는 판단자의 정신이 숭고한 것이다. 어떤 대상에 대하여 이러한 숭고를 느끼지 못하는 자들은 신(神)이나 갓난아이 또는 모자라는 사람들이다.

이런 상상을 해보자.

반딧불이 생태조성지역이 무한히 넓다고 가정하고 거기에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수많은 반딧불이들이 마치 가창오리떼의 군무처럼 밤하늘을 날아다니는 장면을 보는 순간 우리는 엄청난 감동을 느낄 것이며 그런 감동을 숭고라고 할 수 있다.

 

▲ 무주 반딧불 축제 '사랑의 다리'는 수많은 꼬마 전구로 반딧불이를 형상화했다. /사진=강낙규

 

현대 추상미술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숭고미와 시뮬라크르(복제의 복제)다.

숭고미를 표현하는 그림들은 먼저 크기가 엄청나다. 그렇지 않다면 관람객이 작품을 한눈에 볼 수 없도록 그림과 관람객의 거리를 좁혀서 전시한다.

상상력이 좌절되도록 하는 장치다. 어느 순간 그림에서 이야기가 사라지고 이어서 대상성이 사라지고 형과 색의 유희만이 남았다가 모든게 사라지고 단색의 모노크롬만이 남는다. 텅비어 있으면서도 뭔가가 있는듯 하는 순간 사람들을 열광시킨다. 이것이 숭고미 계통의 작품들이다. 버넷 뉴먼의 ‘누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하랴’, 마크 로스코의 ‘무제’ 등을 들 수 있다.

반면에 시뮬라크르 계통의 작품은 현대인들의 이미지 지각방식을 표현한다.

아름다움의 실재인 이데아 즉 원본이 사라지게 한다. 작품에서 아우라를 파괴하는 것이다. 인상파 화가인 모네는 ‘루앙 대성당’ 시리즈를 그리면서 어느 것이 루앙 대성당의 참모습인지를 묻는다. 아침, 정오, 저녁 혹은 맑은 날과 흐린 날 어느 시점에서 본 성당이 진짜 루앙 대성당일까? 수많은 시뮬라크르의 총체가 루앙 대성당의 참 모습이 아닐까?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서 현대 다원주의적 인식론을 이미지로 볼 수 있다. 작품의 진정한 의미는 개념으로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을 통해서 생성되는 것이다. 앤디 워홀의 팝아트와 하이퍼 리얼리즘 그리고 미디어아트 계열의 작품들이다.

반딧불이의 군무를 보면 칸트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아마 “아름답다”고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칸트는 ‘판단력비판’에서 아름다움(美)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란 첫째로 무관심한 관심에서 생겨나고, 둘째로 주관적이지만 보편적이고, 셋째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지니며, 끝으로 법칙 없는 필연성을 가진다.”

아름다움의 제1계기인 ‘무관심한 관심’이란 의미는 대상이 지닌 미(美)에만 관심을 가질 뿐 그 이외의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예를 들면 누드화를 감상할 때 작품의 예술적인 면에만 관심을 가지면서 작품을 감상할 뿐(관심) 누드화를 보며 감각적 욕구 따위는 느끼지 않고(무관심) 저 그림의 가격이 얼마인가? 하는 등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때 비로소 아름다움에 대하여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관심한 관심’이란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의 척도(미적 판단) 이외에 정치, 사회, 노동, 법률 등 여러 분야에서도 유용한 판단의 기준이 된다.

예를 들어 선출직 의원이나 단체장이 자기 지역이나 국가적으로 중요한 문제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히려 무관심해야 할 개인 사업이나 친족 등 이해관계인의 이익만을 대변하기 위해 법률을 개정한다든지 압력을 가한다든지 하는 데 관심을 가지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나쁜 경우는 무관심해야만 하는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관심 있는 분야에는 무관심한 ‘관심 있는 무관심’이다. 이러면 그 지역시민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 힘들어진다. 우리는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관심 있는 관심’ 또는 ‘관심 있는 무관심’한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무관심한 관심’이 건강한 공동체의 주요 덕목이어야 할 것이다.

아름다움의 제2계기인 ‘주관적 보편성’이란 반딧불이의 군무를 보고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것은 나만의 주관이지만 동시에 남들도 나와 동일하게 아름답다고 판단할 것이기 때문에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타인이 아름다움에 동의하지 않을 때에는 다른 욕심이 있든지(관심), 편파성이 심한 야만인이든지, 아니면 이상한 사람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제3계기인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란 도시의 야경과 같이 전체로서의 야경을 만들 목적은 없었지만(목적없음) 각각의 대상들이 조화를 이루어(합목적성) 아름답게 보일수 있다는 것이다. 꽃밭이나 밤하늘의 별무리 등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따라서 칸트는 인공미(人工美) 즉 예술작품은 의도와 관심 그리고 목적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단지 예술가가 영감을 받아(본인은 영감을 받는 순간 무엇을 받았는지 몰라야 됨) 그것을 완성한 경우에는 예술미도 아름다울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칸트의 예술미는 그 범위가 지극히 좁다.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은 주어진 보편이나 법칙이 있는 것(규정적 판단력)이 아니라 보편이 주어져 있지 않아 새로운 보편을 찾아서 특수를 보편에 포섭하는(반성적 판단력) 것이다. 예를 들면 공동체를 정의로운 공동체와 아름다운 공동체로 나눌 때 정의로운 공동체는 정의라는 규범이 미리 주어져 있어 이 규범에 따라 살아가는 공동체인 반면, 아름다운 공동체는 인간관계를 맺어주는 어떤 목적이나 의도, 기획등이 없이 쌍방간의 고유한 자유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공동체이다.

2007년 12월 태안 기름 유출 사건 때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원봉사활동을 왔는데 주차장에는 주차 관리하는 사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줄은 좀 삐뚤었지만 질서있게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고 버려진 쓰레기도 없었다. 반면 여름 피서 철의 주차장에는 여러 명의 주차관리인이 있었지만 관리인의 감시가 조금만 느슨해도 주차를 함부로 하거나 쓰레기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전자가 아름다운 공동체라고 한다면 후자는 정의로운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다움의 제4계기인 ‘법칙 없는 필연성’은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필연성이나 도덕법칙의 필연성이 아닌, 감성적이고 주관적인 필연성을 말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은 공통감(common sense·상식)이라는 인간의 보편적이고 선천적인 구조에 근거하기 때문에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런 공통감이 없는 야만인이거나 어떤 욕구를 가지고 대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칸트가 반딧불이 생태조성지역에서 반딧불이의 군무가 “아름답다”고 했을 이유를 다시 정리하자면,

첫째로 반딧불이의 아름다운 군무에만 관심을 가질 뿐 반딧불이에 대한 다른 욕구(예를 들면 반딧불이를 잡아서 화학물질을 추출한다는 등의)에는 무관심하며(무관심한 관심),

둘째로 반딧불이의 군무를 칸트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아름답다고 판단할 것이며(주관적 보편성),

셋째로 반딧불이들의 군무는 반딧불이들이 어떤 지시나 목적을 위해서 날아다니는 것이 아니라(목적 없음), 그냥 짝을 찾기 위해 날아다니지만 조화롭기 때문에(합목적성) 아름다운 것이다(목적 없는 합목적성).

끝으로 반딧불이의 군무에 대하여 사람들은 상식적으로(공통감)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것이다(법칙 없는 필연성). 아름다움이란 개념 없이 필연적으로 만족대상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강낙규·기술보증기금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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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2015-09-11 17:29:22
글을 통해 칸트와 반딧불이의 아름다운 조우를 경험했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