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의 섹시함... 지예 칼럼 ‘Blurred Lines’
상태바
수치심의 섹시함... 지예 칼럼 ‘Blurred Lines’
  • 오피니언뉴스
  • 승인 2015.09.03 11: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섹스는 섹시하다. 그러나 모든 섹스가 다 섹시한 것은 아니다. 수치심이 도려내어진 섹스는 절대 섹시하지 않다. 그러한 섹스는 건강하며, 균형이 잡혀 있고, 경쾌하며, 자극적이지 않다. 자극이 없는 섹스란, 그저 ‘베이비 메이킹’(baby making)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섹스라면 이런 저출산 국가에서라도 평생에 몇 번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얼마간의 제약은 있기는 하다만, 이제는 입 밖으로 ‘섹스’(sex)라는 단어를 내뱉는 것에 더 이상 수줍어하지 않게 되었다. 사실 ‘섹스’라는 단어를 수면 위에서 많이 쓰는 나라일수록 오히려 성범죄나 낙태율이 낮은 경우가 더 많다. 이것은 남녀 불문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섹스라는 단어가 섹시함을 조금 잃어버린 것도 사실이다. 물론 기분 탓이지만.

사람마다 섹스에 대한 판타지가 있다. 대부분 아주 다양하다. 포르노 카테고리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정말 초보자(?)라면 이렇게까지 하다니, 싶을 만큼 깊게 하드코어(hardcore)인 것들도 많다.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성 취향을 굳이 내비치지 않고 살아간다. 영화 ‘셰임’(shame)에 나오는 브랜든 역시 그러하다. 겉으로는 성공한 뉴욕 여피(yuppie)이지만 섹스 중독자에, 점점 더 큰 쾌락을 탐닉한다. 영화에서뿐만이 아니다. 그저 평범하게만 보이던 당신의 직장 상사가 알고 보니 스와핑(swapping) 클럽 죽돌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선호하는 섹스 스타일은 정말 가지각색이며 종류도 무진장 많다. 그것들 대부분의 공통점이라면, 그저 정상위뿐인 섹스보다 수치심을 많이 동반한다는 것이다.

 

흔히들 수치심과 죄의식을 잘 연관지어 이야기한다. 네덜란드의 심리학자 기어트 홉스테드에 따르면, 수치심은 사회적이며 죄의식은 개인적이라고 한다. 노상 방뇨로 예를 들어 보자. 내가 여기에 오줌을 누어도 된다, 안 된다를 고민하는 것은 죄의식이다. 그러나 내가 오줌을 누고 있는데 옆에서 누가 지켜보아서 느끼는 부끄러움은 수치심이다. 즉, 수치심은 타인으로부터 느끼는 정서인 것이다.

 

수치(羞恥)를 한자로 풀어보면 부끄럽고 부끄럽다는 뜻이다. 상대방에게 부끄러운 것이 많을수록 우리는 더 스릴 있는 섹스를 즐길 수 있다. 더 하드(hard)한 자극을 원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이미 정상적인 섹스에서는 수치를 느끼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내가 수치심을 느끼길 원하는지 혹은 상대방이 수치스러운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길 원하는지는 개인적인 성향 차이가 크다만, 대부분 여성의 경우 본인이 느끼길 원한다. 하지만 남녀 모두, 우리는 궁극적으로 체면 따위는 벗어던지고, 조금 더 원초적으로 즐기길 원하는 것이다.

 

거부되고, 조롱당하고, 노출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한다는 고통스런 정서를 가리키는 용어로서, 여기에는 당혹스러움, 굴욕감, 치욕, 불명예 등이 포함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수치심[SHAME](정신분석용어사전, 2002.8.10, 서울대상관계정신분석연구소[한국심리치료연구소])

 

누군가는 섹스 도중에 배설을 요구하기도 하며, 모욕적인 말을 듣기 좋아하고, 거울을 통해 흥분해 매달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자 하기도, 쓰리썸을 통하여 상대방 선택에 의해 버려지는 경험을 하기도, 또는 스와핑을 즐기며 누군가가 섹스하는 내 모습을 봤으면 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어찌 보면 대단히 수치스러운 경험이다. 그리고 이런 섹스를 원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자존감이 높은 경우도 있다. 웬만한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뱀의 꾀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은 하와는 부끄러움에 대하여 알게 된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을 가리고 아담의 앞에 나타나 그에게도 선악과를 먹으라고 권한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었더라면 인류도 없었을 것이요, 섹스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부끄러움을 느끼기에 서로에 대해 궁금해할 수 있었으며, 그렇기에 수치심은 여태껏 인류를 이끌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전쟁의 역사까지도. 세기의 모든 전쟁의 중심에는 단단한 남자를 주무르는 여자들이 있었다. 경국지색 그녀들 다리 사이 속살의 수치스러운 틈은, 오로지 승리한 남자만이 독차지할 수 있었다.

 

수치심(shame)의 반대말은 뻔뻔스러움(shamelessness)이다. 뻔뻔스러움은 심리적으로 수치심에 대한 방어라고들 한다. 뻔뻔스러운 표정을 한 누군가와의 섹스는 상상해보면, 그리 섹시하지 않을 것이다. 나 혼자 이 사람의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감정적 커넥션이 그다지 이루어지지 않을 테니.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파괴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다. 하지만 대부분은 파괴라는 측면보다, ‘사회’ 안에서 자신을 탈피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큰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으로 진화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감추고만 살아야했다. 사회에서 금기시하는 상대방과의 섹스를 통해 느끼는 죄의식과, 누군가에게 나의 성기는 물론이요, 황홀경의 젖는 표정까지 들켜버리고 싶은 수치심에서 오는 쾌락을 생각한다.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드는 상대 혹은 상황은 분명 유혹적이다. 눈만 보아도 볼이 빨개지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첫눈에 심장을 쿵쾅거리게 하고 설레서 부끄럽게 만드는 그런 사람. 그는 분명 당신을 흥분시킬 것이다.

 

반대로 수치심이 전혀 들지 않는 상대방이 있다. 난 그런 사람들에 대하여 ‘만만하다’라고 표현한다. 그런 사람을 보면 마음 속으로, ‘저 사람은 만만해보이기 때문에, 내가 저 앞에서 똥을 싸도 전혀 창피하지 않을 것 같아!’ 라고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여성이 보내는 수줍음은, 가장 유혹적인 신호일지도 모른다. 본인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가장 원초적인 행동으로서 말이다. 거부되고, 조롱당하고, 노출되고, 존중받지 못하는 순간,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질 테니까. 그러니 남자들이여, 여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어라. /지예<칼럼니스트>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