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시흑역사30년]⑫ 2003년 크리스마스의 악몽…대호 ‘유령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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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시흑역사30년]⑫ 2003년 크리스마스의 악몽…대호 ‘유령주’ 사건
  • 김솔이 기자
  • 승인 2019.05.19 13: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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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말부터 2004년 초까지 대호, 중앙제지, 동아전기, 모디아 등 상장사들이 주금을 납입하지 않고 허위로 주식을 발행해 시장에 유통시키면서 '유령주 파동'이 발생했다.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1988년, 그해 4월 증권감독원(금융감독원의 전신)은 최초로 상장기업의 내부자거래를 적발했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금융감독원이 얼마 전 펴낸 '자본시장 불공정거래 조사'는 자본시장 30년의 역사를 담았다. 금융감독원의 도움과 다방면의 취재를 통해 30년간 적발된 불공정거래 주요사건을 정리한다. 이 연재 시리즈의 목적은 자본시장의 건전한 발전과 자원의 효율적 배분에 일조한다는 데 있다. [편집자 주] 

[오피니언뉴스=김솔이 기자] 2000년대 초반 주식시장에는 ‘유령’이 활개치고 다녔다. ‘진짜’ 주식이 아닌 ‘가짜’ 주식, 즉 ‘유령주’들이 잇달아 나타났을 때다.

회사를 설립하려면 기본적으로 자본금이 필요하다. 주식회사를 세우는 과정에서 신주를 발행할 때 주식 매입을 위해 해당 금액을 출자하는 일을 주금납입(株金納入)이라고 하는데 유령주란 이 주금을 납입하지 않고 허위로 발행한 주식을 뜻한다. 

일반적인 신주 발행 과정을 살펴보면 유령주의 개념을 좀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유상증자를 가정할 경우 신주를 배정받은 투자자들이 증자 대금을 회사 계좌에 납입하면 은행은 회사에 ‘주금납입보관증명서’를 발행해준다. 회사는 법원에 이 증명서를 비롯한 서류를 낸 뒤 등기를 마치고 등기 서류를 거래소에 제출해 신주를 상장한다.

2003년 말부터 2004년 초까지 시장을 혼란에 빠뜨린 사건이 바로 ‘유령주 파동’이다. 당시 상장사들은 주금을 아예 납입하지 않은 채 주식을 발행, 시장에 유통시키기에 이른다.

유령주 파동 당시 피해자 수는 1만5000명으로 추산됐다. 피해 규모 역시 500억원에 달했다. 사진=MBN 보도화면

대표적인 사례가 2003년 말 적발된 ‘대호 사건’이다. 앞서 같은해 2월 신원사업개발 대표였던 유모씨는 극심한 경영난에 시달리던 대호의 경영권을 인수했다. 그는 먼저 경영정상화를 위해 대호의 유상증자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출자자를 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유씨가 선택한 차선책이 바로 유령주였다. 주금납입보관증명서를 위조해 허위로 주식을 발행하기로 한 것이다. 대한당구연맹 회장으로 재직했던 그는 대한당구연맹 임원들과 평소 친분이 있던 건설업체 대표이사들로부터 유상증자 참여를 위한 명의를 빌렸다. 이어 2003년 9월부터 12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각각 250억원, 50억원, 35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실시했다. 그 결과 총 1억3000만주가 발행됐다.

유씨는 그중 1억2600만주를 담보로 사채업자에게 약 200억원의 자금을 차입, 신원사업개발의 부채를 변제하는 등 횡령을 저질렀다. 

그런데 2003년 12월 24일 금융감독원은 대호의 유상증자 관련 수상한 제보를 받는다. 제보자는 대호를 회계감사한 공인회계사였다. 그에 따르면 세 차례의 유상증자 과정에서 은행의 주금납입보관증명서가 모두 허위로 작성된 것이었다.

금감원은 크리스마스 이튿날인 26일, 증권거래소에 제보 내용을 통보해 즉시 대호의 매매거래를 정지시켰다. 이에 따라 대호가 같은달 30일 추진하고 있었던 5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 역시 무산됐다.

실제 금감원의 조사 결과 신주로 발행된 1억3000만주 가운데 주금 납입이 확인된 규모는 약 20억원에 불과했다. 나머지 630억원의 납입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즉 진짜 주식은 400만주뿐이었고 1억2600만주는 그야말로 유령주였던 셈이다. 

금감원은 2004년 1월 3일 유가증권신고서 허위기재 혐의로 대호를 고발했다. 대호는 같은달 12일 부도가 발생, 상장폐지에 이어 폐업 절차를 밟았다. 유씨 등 사건의 핵심 혐의자들은 증권선물위원회를 통해 수사기관에 통보됐다. 유씨에게는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로 최종적으로 징역 3년의 실형이 내려졌다.

심지어 유씨는 주식담보대출을 유리하게 받기 위해 증자 물량 상장일 직전 시세를 조종하기도 했다. 2003년 9월 24·25일 양일간 고가매수 주문 등 총 27회의 시세조종 주문을 통해 주가가 1305원에서 1690으로 올랐다.

또 유씨와 사채업자들은 담보주식을 대량 처분할 수 있도록 거래량을 늘리기 위한 시세조종을 공모했다. 이들은 2003년 10월 1일부터 10일까지 고가매수 주문 등 총 89회의 시세조종 주문을 내면서 주가를 900원~1000원대 수준으로 유지시킨 것이다. 같은달 20일에는 총 11회의 시세를 조종하면서 대규모 온천 관광단지 투자 등 호재성 재료를 허위로 공시했다.

사채업자들은 이 과정에서 주가가 회복되자 사채원금의 회수를 위해 담보로 가지고 있던 주식을 대량으로 처분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주가는 5일 연속 하한가를 기록했다.

대호, 중앙제지, 동아전기, 모디아 등 2004년 초 유령주 파동으로 피해를 본 소액주주들은 법적 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회사마다 사정이 좋지 않았던 데다 대주주 등이 도주·잠적해 실제 피해를 보상받기는 쉽지 않았다. 사진=YTN 보도화면

대호의 유령주로 인한 피해는 유상증자 전 주식을 보유하고 있던 투자자들과 유령주를 사들인 개인투자자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다. 대호뿐 아니라 유령주 파동으로 피해를 입은 투자자들은 모임을 결성해 법적대응에 나섰으나 역부족이었다. 회사마다 사정이 좋지 않았던 데다 주식 인수 매각 대금을 챙긴 대주주 등이 검찰 조사를 피하기 위해 이미 도주하거나 잠적한 상황이었다. 이로써 주식시장에 대한 신뢰도도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유령주 파동은 당시 거래소가 유상증자에 따른 신주 상장등록 신청 시 대상 주권에 대해 법인등기부등본만을 근거로 승인하는 규정을 악용한 것이었다. 이에 거래소는 연이은 유령주 사건 이후 신주 상장등록을 심사할 때 법인등기부등본과 함께 주금납입보관증명서를 추가로 요구해 증명서의 진위여부를 거래소에서 확인하도록 규정을 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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