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시흑역사30년]②경영진-투기꾼 결탁 '사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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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시흑역사30년]②경영진-투기꾼 결탁 '사기극'
  • 김솔이 기자
  • 승인 2019.03.10 12: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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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주 노려 수백차례 시세조종 주문...대부분 벌금형 '솜방망이 처벌'
▲ 셋방살이 하던 증권감독원이 1994년 6월 20일 현재의 금감원 빌딩으로 이전, 준공식을 가졌다/사진=금융감독원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1988년, 그해 4월 증권감독원(금융감독원의 전신)은 최초로 상장기업의 내부자거래를 적발했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금융감독원이 얼마 전 펴낸 '자본시장 불공정거래 조사'는 자본시장 30년의 역사를 담았다. 금융감독원의 도움과 다방면의 취재를 통해 30년간 적발된 불공정거래 주요사건을 정리한다. 이 연재 시리즈의 목적은 자본시장의 건전한 발전과 자원의 효율적 배분에 일조한다는 데 있다. [편집자 주] 

1988년 ‘광덕물산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자 불공정거래를 단속하기 위한 활동 기반을 제대로 갖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증시에서는 내부자거래, 시세조종 등 다양하고 불공정거래 행위가 공공연했지만 이를 금지한다는 규제조항만 있었을 뿐 사건을 조사, 처벌할 근거가 미약해 범죄를 방치하다시피 했다.

불공정거래 행위는 1962년 증권거래법 제정 당시부터 규제 조항으로 마련됐다. 시세조종의 금지 조항(제91조)과 부정행위의 금지 조항(제 33조)을 규정했고, 이에 대해 징역형 또는 벌금형으로 처벌할 수 있다고 명문화했다. 하지만 불공정행위의 조사 주체가 불분명했고, 조사 절차를 따로 두지 않아 이같은 금지 규정은 선언적 조항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실제 불공정거래 혐의에 대한 감독당국의 조사도, 조치도 취해진 적이 없었던 것. 

정부가 마냥 손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단계적 조치를 통해 시장 투명성 제고와 신뢰 확보를 위한 기반을 마련해왔다. 1976년 12월 7차 증권거래법 개정을 통해 상장법인의 임직원, 주요주주의 공매도 금지조항, 단기차익 반환조항 등 내부자거래의 제한 규정을 도입하고, 10% 이상 대량 소유에 대한 소유주식비율 변동시에는 증관위에 보고하도록 규정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내부자거래를 직접 금지하는 조항은 마련되지 않아 '유명무실하다'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내부자거래 이익의 박탈이라는 간접적 제재 대신, 미공개정보 이용 금지를 명문화하는 한편 형사처벌이라는 직접적 제재가 도입된 것은 1988년 제9차 증권거래법 개정에서다. 이때 형사처벌은 3년이하 징역형 또는 2천만원이하 벌금형으로 중죄로 다스리도록 하는 근거도 마련됐다.

조사당국의 활동도 구체화됐다. 그해 8월 증권감독원 직제에 불공정거래 조사전담부서인 검사4국이 신설됐고 ▲예비조사제도의 도입을 통해 정보사항에 대한 인지조사가 가능하게 되고 ▲위법행위 적발시 국세청에 통보하는 근거규정도 마련됐다. 특히 불공정거래 정보 제공자에 대해 포상금을 지급할 수 있는 근거도 개정된 <증권관리위원회의 조사에 관한 규칙>에 도입됐다. 그러나 '2%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우지는 못했다.

◆ 상장사 대표가 직접 시세조종 나서...최초 적발

그 즈음에 광덕물산 사례같은 회사 내부정보를 이용한 불공정거래가 잇달아 적발됐다. 급기야 상장사 대표가 증권회사 직원, 전문투기꾼 등 외부세력과 결탁해 주가를 조작한 사건까지 드러났다.

당시 증감원은 1990년 2월부터 7월까지 총 6차례에 걸쳐 6개 기업에 대한 예비조사를 실시하고 있었다. 대상은 증권거래소로부터 불공정거래 혐의를 받는 진영산업·삼성신약·경일화학공업·고려포리머·코리아써키트 5개사와 상장법인 임원·주요주주의 소유주식비율 변동보고 내역 검토 과정에서 불공정거래 혐의가 있는 것으로 지목된 도신산업이었다.

조사 결과 기업 내부자들의 혐의가 확실해졌고 증감원은 9월부터 수명(受命)조사(기동성 있는 조사권을 발동하기 위해 증관위 상임위원 중 수명위원을 지정해 실시하는 조사)에 착수했다. 조사에 따르면 당시 상장사였던 삼성신약 민병린 대표와 진영산업의 임병구 대표는 전업투자자인 양회성씨, 한신증권 압구정지점 투자상담사인 송순덕씨와 함께 시세조종을 공모했다.

이들은 삼성신약·진영산업뿐 아니라 경일화학공업, 고려포리머 등 소형 상장주식을 노렸다. 두 대표가 자금을 조달하면 양씨와 송씨가 계좌를 개설하고 시세조종 주문을 내는 방식이었다.

양씨 등 4명은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상호신용금고에서 48억원 가량의 주식담보대출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친인척 명의를 빌리고 사업자등록증의 등록번호 등 공문서를 위조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제일증권 명동지점 등 18개 지점에서 시세조종에 동원된 계좌는 192개였다. 

자금은 1989년 1월부터 1990년 4월까지 경일화학공업 등 6개 종목의 주식을 집중 매수하는 데 사용됐다. 이들은 이 기간 중 해당 종목들의 주식을 277억원 어치 사들이는 한편 209억원어치를 내다 팔았다. 월 평균 매수 비율은 최저 53.4%에서 최고 83.3%에 달했다. 특히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해 ▲고가의 동시호가 형성매매 12회 ▲체증식 고가매매 106회 ▲당일 최고가 형성 매매 216회 ▲고가의 종가 형성매매 13회 ▲통정매매 120회 등 총 467회의 시세조종 주문을 제출하는 방식을 이용했다.

▲ 1988년 5월 증권거래법 제128조 규정에 따라 불공정거래에 대한 조사기반이 마련되고 단속활동이 강화됐다. /사진=금융감독원

◆ 고려증권 청담지점에서 차명계좌 거래 증거 발견

증감원의 감시망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시세조종에 동원된 계좌가 개설된 고려증권 청담지점에서 양씨가 민 대표의 아들 등 9개 계좌의 반대 매매에 동의한다는 각서를 발견한 것이다. 양씨가 차명계좌로 거래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이들이 수시로 동일한 시기에 거래 점포를 특정 점포로 일괄 이동하면서 새로 개설한 계좌에 현금·주식을 대체(출고·입고) 하는 등 치밀하게 움직여온 정황도 밝혀졌다.

양씨와 송씨의 경우 시세조종 과정에서 진영산업 지분율이 각각 10%를 초과하는 등 주식의 대량소유 제한(10%) 규정까지 위반했다. 당시 임 대표보다도 지분율이 높았다.

특히 도신산업의 함인화 대표는 1989년 결산 결과 15억2000만원(자본금의 50.7%)이라는 대규모 적자가 발생하자 주가 변동을 우려해 1990년 3월 주주총회 전 두 달간 회사 주식 11만주(18.4%)를 대량 매도했다. 미공개정보 이용을 금지하는 규정을 위반한 것이다. 그러나 이중 6만6000주를 양씨 등이 시세조종 과정에서 집중적으로 매수하면서 주가가 오히려 상승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증관위는 시세조종 등 불공정거래의 금지위반으로 양씨 등 4명과 미공개정보를 이용한 함 대표를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또 증감원은 주식의 대량소유 제한을 위반한 두 명에게는 경고 조치를 취했다.

이들은 몰염치한 행동까지 보였다. 양씨, 송씨를 비롯해 이들과 공모한 혐의를 받은 투자자 이한영씨는 세 차례에 걸친 증관위의 출석요구에도 불응, 별도로 고발 조치를 당했다. 양씨는 시세조종 관련 계좌 조사 당시 증감원에 지속적으로 항의전화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 상장사 경영진의 모럴 해저드...투자자들 배신감 느껴

이 사건은 상장사 경영진이 직접 시세조종에 가담하다 적발된 최초 사례라는 점에서 파장이 컸다. 무엇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을 당시 투자자들이 느낀 배신감은 어마어마했다. 정상적인 기업경영을 통해 이익을 거둬야 하는 상장사 대표들이 자사 주가를 조작해 사익만을 추구하는 비도덕적 행태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에 대한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이었다.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양씨를 제외하고 나머지 혐의자들은 벌금형의 구약식처분만 받는 데서 사건이 종결됐다. 이로 인해 국내증시의 구조적 문제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주로 내부자거래를 제대로 적발하지 못하는 허술한 증권거래법과 공시제도를 연일 비판했다. 언제든 유사한 내부자거래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 사건 여파로 이듬해 12월 10차 개정된 증권거래법에서 내부자거래 규제 조항이 이전보다 크게 강화됐다. 기존에 시세조종 금지 조항에 포괄적으로 규정됐던 미공개정보 이용 금지 조항이 별도 조문화됐고 내부자와 내부 정보의 개념도 이전 보다 명확히 규정돼 규제 실효성이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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