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is] 타계한 박용곤 두산 명예회장, `사람의 진심`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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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타계한 박용곤 두산 명예회장, `사람의 진심` 믿었다
  • 이성노 기자
  • 승인 2019.03.04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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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 뜻 따라 두산 아닌 한국산업은행서 사회생활 시작

향년 87세로 별세한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은 일반적인 총수가(家)와 다른 삶을 살았다.

해군에 자원 입대해 6.25전쟁 참전용사로 활약했고, 두산이 아닌 타사에서 사회 첫 발을 내디뎠다. 또한,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모든 결정의 중심에 있었지만 좀처럼 먼저 입을 열지 않는 '경청 리더십'을 보여줬다.

▲ 두산그룹은 박 명예회장이 지난 3일 저녁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4일 밝혔다. /사진=두산그룹

두산그룹은 박 명예회장이 지난 3일 저녁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4일 밝혔다. 

고인은 1932년 고(故)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했고,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자원해서 해군에 입대해 참전용사로 활약했다. 

군 제대 후 미국 워싱턴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고인은 지난 1960년 한국산업은행에 공채로 입사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두산그룹이 아닌 타사에 입사한 것은 "남의 밑에 가서 남의 밥을 먹어야 노고의 귀중함을 알 것이요, 장차 아랫사람의 심경을 이해할 것”이라고 강조한 선친 박두병 초대회장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3년 동안 은행 생활을 한 고인은 1963년 4월 동양맥주에 말단 사원으로 입사했다. 첫 업무는 공장 청소와 맥주병 씻기였다. 이후 한양식품 대표, 동양맥주 대표, 두산산업 대표 등을 거친 뒤 1981년 두산그룹 회장에 올랐다. 

고인은 두산그룹 회장 재임 시 국내 기업 처음으로 연봉제를 도입하고 대단위 팀제를 시행하는 등 선진적인 경영을 적극 도입했다. 1994년에는 직원들에게 유럽 배낭여행 기회를 제공했고, 1996년에는 토요 격주휴무 제도를 시작했다. 또 여름휴가와 별도의 리프레시 휴가를 실시하기도 했다.

▲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이 1996년 5월 두산그룹 신규 CI 선포식에 참석해 새로운 로고가 새겨진 그룹기를 흔들고 있다. /사진=두산그룹

그룹 회장을 맡은 이후 1985년 동아출판사와 백화양조, 베리나인 등의 회사를 인수하며 사업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1990년대에는 시대 변화에 발맞춰 두산창업투자, 두산기술원, 두산렌탈, 두산정보통신 등의 회사를 차례로 설립했다. 1974년에는 합동통신(연합뉴스 전신) 사장에 취임해 세계적인 통신사로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국제상업회의소 한국위원회 의장,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경영 성과를 인정받아 1984년 은탑산업훈장, 1987년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고인은 상대의 말을 끝까지 경청한 뒤 자신의 뜻을 짧고 간결하게 전했다. 사업적 결단의 순간 때도 실무진의 의견을 먼저 경청했고 입을 열어 방향을 정했다.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쓸데없는 말을 하게 된다"고 말했던 고인은 재계에서 모든 사람이 인정할 정도로 과묵했다.  

그는 "내 위치에서 무슨 말을 하면 그 말은 모두 약속이 된다"며 "그러니 말을 줄이고 지키지 못할 말은 하지 말아야 된다"고 자신이 말을 많이 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고인은 한 번 일을 맡기면 상대방을 신뢰하고 오래도록 지켜보는 ‘믿음의 경영’을 실천했다. 두산 직원들은 “세간의 평가보다 사람의 진심을 믿었고, 다른 이의 의견을 먼저 듣고 존중하던 '침묵의 거인'이셨다”고 말한다.

고인의 유족으로는 아들 정원(두산그룹 회장), 지원(두산중공업 회장), 딸 혜원(두산매거진 부회장) 씨 등 2남 1녀가 있다. 

빈소는 5일 오후 2시부터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다. 가족장이며 발인과 영결식은 7일이다. 장지는 경기 광주시 탄벌동 선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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