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언론이 딴지 거는 광개토대왕…왜군 궤멸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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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언론이 딴지 거는 광개토대왕…왜군 궤멸시켜
  • 김인영 에디터
  • 승인 2019.01.23 12: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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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군 5만명, 남해안 침입한 왜군 항복 받아…일본 주간지, “반일 DNA” 비아냥

 

일본 잡지에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다.

‘주간신조’(週刊新潮)는 일본에서 제법 잘 나가는 주간지로 알려져 있는데, 이 잡지는 최근호에서 요즘 한일간에 전개되고 있는 레이더 갈등을 소재로 다뤘다. 잡지는 ‘위기(危機, Crisis)라는 기사에서 한국 군함 이름에는 반일(反日) DNA가 새겨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 예로, 지난달 20일 한국 동해와 일본 사이 바다에서 조난한 북한 어선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일본 해상자위대 초계기를 확인하기 위해 레이더를 발사한 광개토대왕함을 들었다.

이 잡지는 광개토대왕함의 이름은 한반도 남부의 지배를 둘러싸고 일본과 싸웠다는 고구려의 왕에서 따왔다고 소개했다.

 

그러면 일본 잡지가 한국 해군함정 이름을 거명하며 예민한 반응을 보인 광개토대왕이 어떻게 일본을 무찔렀는지를 살펴보자.

중국 길림성 지안시(集安市)에 우뚝 서 있는 광개토대왕비에는 대왕이 한반도 남부를 침입한 왜군을 추격해 항복을 받아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0년 경자(庚子)에 보병과 기병 오만을 보내 신라를 돕도록 하였다. 남거성(男居城)에서 신라성(新羅城)에 이르기까지 왜(倭)로 가득 차 있었다. 관군이 도착하니 왜적이 물러났고 (...) 뒤를 급히 쫓아 임나가라(任那加羅)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즉각 귀순하여 복속하였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住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背急追 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은 고구려의 영토를 최대로 넓힌 정복왕으로,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사용한 임금이다. 영락 10년(서기 400년) 왜군이 새카맣게 한반도 남부에 몰려오자, 신라가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광개토대왕이 5만의 군대를 보내 왜군을 쫓아내고 임나가야 종발성에서 마지막으로 저항하던 왜군의 항복을 받아냈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의 치적을 비석에 새겨 놓으면서 드러났다.

 

▲ 광개토대왕함 /위키피디아

 

당시 고구려가 한반도 남쪽에 파병한 5만의 기병과 보병은 당시로선 엄청난 병력이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멸망 당시 전체 인구가 69만호였는데, 1호를 5명으로 잡으면 350만명 정도가 된다. 고대에는 인구 증가율이 극히 낮았기 때문에 이 인구를 광개토대왕 당시의 인구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중 남자 성년 인구를 100만으로 보면, 신라를 돕기 위해 파병한 5만의 고구려군은 당시로선 엄청난 병력이었다고 할수 있다.

서기 400년 고구려는 이웃 연(燕)나라의 모용(慕容)씨와도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한 셈이다. 광개토대왕은 서쪽 강국인 모용씨의 나라와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 신라를 구원하고 이 땅을 침범한 왜군을 몰아내기 위해 동원할수 있는 최대 병원을 파병한 것이다.

종발성(從拔城)이 어디인지에 대해선 역사학계에서도 논란이 있다. 금관가야가 위치한 김해시라는 설, 부산이라는 설등이 있다. 어찌했든 압록강에 본거지를 둔 고구려군이 한반도를 종횡무진하여 남해안을 가득 메운 왜군을 쫓아 냈으니, 우리로선 통괘한 역사였다. 역으로 일본의 후손들은 불쾌한 과거였을 것이고, 그 대왕의 이름을 건 광개토대왕함에 딴지를 걸고 있는 것이다.

 

광개토대왕의 원정으로 왜와 가락국은 궤멸적 타격을 입은 것으로 확인된다.

6세기 이전에 신라를 가장 괴롭힌 나라는 왜(倭)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왜와 관련한 기사는 수십차례 나온다. 대개가 침략 기사다.

삼국사기에, 왜는 네차례나 신라의 수도 금성(金城)을 포위하고, 백성 1천명을 끌고 가는 침략 세력이었다. 임금의 동생을 볼모로 잡았고, 툭하면 대신의 딸을 왜왕에게 시집오라고 했다.

왜의 공격에 고대 신라는 속수무책이었다. 수도인 금성 성내에서 농성하고, 왜군이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역습하는 수세적인 방법을 취했다. 초기 신라는 수전(水戰)에 약했다. 임금도 이를 인정했다. 바다를 건너가 선제 공격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관문을 지켜 왜병이 수도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마냥 당하기만 하던 신라는 5세기 들어 해상 전략을 강화해 나갔다. 자비 임금은 즉위 6년(463년)에 담당관에 명해 전함을 대대적으로 수리케 하고, 지증왕 6년 (505년)엔 '선박이용의 제도(舟楫之利)'를 정비했다.

그리고 이제는 내륙이 아니라, 해안에서 왜의 침공을 저지했다. 실성 14년(415년), 신라 수군이 풍도(風島)에서 싸워 이겼다.

512년 신라장군 이사부가 바닷길을 건너가 우산국을 정벌한 것은 물을 두려워 하던 신라 수군으로선 엄청난 발전이며, 신라군에 바닷 싸움(해전)에서 자신감을 얻게 한 전투였다. 이사부는 울릉도를 복속시켜 동해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고구려와 울릉도, 왜의 연결고리를 차단했다. 아울러 금관국을 합병해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오가던 왜선의 해상로를 끊어버렸다.

 

고대 역사에 왜는 두단계를 거쳐 한반도 침략에 손을 뗀다. 그 첫 번째가 광개토대왕의 파병이고, 둘째가 신라의 수군 강화다.

한반도에서 왜를 첫 번째로 타격한 인물은 단연 고구려 광개토대왕이다. 광개토대왕은 서기 400년 보병과 기병으로 무려 5만 병력을 보내 신라를 구원했다. 고구려군이 서라벌에 가득한 왜군을 쳐 퇴각시키고, 임나가야 종발성까지 진군해 항복을 받아냈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반도 왜는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두 번째 타격은 신라의 제해권 확보다. 신라가 남해안의 제해권을 확보하자, 열도와 반도 왜 사이에 수송로가 끊기고, 이에 따라 한반도 왜는 퇴로 차단에 앞서 열도로 넘어갔다고 추정된다.

‘삼국사기’에서 왜와 관련한 기사는 신라 소지왕 19년(497년), 백제 비유왕 2년(428년) 이후 사라진다.

160년간 우리 사서에서 사라졌던 왜가 662년에 다시 나타난다. 백제가 멸망하고, 일본열도의 왜는 백제부흥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5만 수군을 동원해 상륙하려다 백마강(금강) 어귀에서 전멸했다. ‘삼국사기’는 백제본기 의자왕조에 “백강 어귀에서 왜국 병사를 만나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 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덮고 바닷물도 붉게 되었다”고 적었다.

 

일본잡지 주간신조는 한국 해군의 세종대왕함, 이순신함, 독도함, 안중근함 등에 대해서도 반일 DNA가 숨어있다고 비아냥거렸다. 세종대왕은 쓰시마섬을 복속시켜 마산현에 편입시켰고,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격퇴한 장군이다.

참고로 신라를 괴롭히던 왜는 당시 야마토(大和) 시대였는데, 그 이름을 딴 야마토함은 2차 대전 당시 일본 해군의 최대전함이었다. 이 배는 1945년 4월 7일 미군에 의해 격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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