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1 오늘] 영국 제국주의 첨병 동인도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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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 오늘] 영국 제국주의 첨병 동인도회사
  • 김인영 에디터
  • 승인 2018.12.30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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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 군대도 보유하고, 세금도 부과…영토 전쟁 벌이다 세포이 항쟁으로 마감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버마, 쓰리랑카, 네팔, 부탄….

이 방대한 영역을 통치한 나라가 영국이었다. 하지만 1874년 영국이 직접 통치하기 이전에 이 땅은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라는 주식회사가 통치하고 수탈했다.

기업이 군대도 보유하며, 전쟁도 했다. 기업이 식민지인들을 대상으로 세금도 걷었다. 투자를 늘리기 위해 주식회사 형태를 취했다. 주주들의 회사였다.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장악한 영토는 지금 인구로 계산하면 18억명이 넘는다. 세계인구 50억으로 치면, 동인도회사는 지구인의 20% 정도를 지배했다. 중국 인구 14억보다 많다.

주식회사에 의한 식민 경영은 네덜란드도 했다.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통치하면서 동인도회사를 만들어 자카르타(바타비아)에 본부를 두었다. 프랑스도 동인도회사를 만들었다. 영국은 남아프리카와 로디지아로 식민지를 확대할 때 ‘남아프리카 회사’(BSAC: British South Africa Company)를 통해 지배했다.

 

▲ 런던의 동인도회사 본부 /위키피디아

 

영국 동인도회사가 공식적으로 설립된 시기는 1600년 12월 31일이다. 이 회사는 이날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특허장을 받았다. 네덜란드가 동인도회사를 만들어 인도네시아에 거점을 두고 향료 무역에 나서자 영국인들이 경쟁심을 느껴, 인도를 중심으로 아시아 진출을 위해 만든 주식회사다.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 4척이 런던을 떠난 것은 1601년 2월이었고, 이 선단은 이듬해인 1602년 9월 영국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 선단이 가져온 것은 103만 파운드의 후추였다. 당시 영국 국내 후추 소비량은 25만 파운드였기 때문에 영국의 후추값은 폭락했고, 유럽의 다른 나라로 수출해야 했다.

▲ 동인도회사의 깃발 /위키피디아

초기에는 개별 항해 때마다 투자금을 받아 수익률을 주주에게 배당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배가 무사귀환하지 못하면 투자자들은 배당금을 한푼도 받지 못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리스크가 높은 해외무역의 시대였다. 하지만 신대륙 개척기에 무역회사는 대박이 났고, 투자자그 끊이지 않았다.

1656년 청교도혁명의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은 항해조례를 개정해 동인도회사를 상시적 주식회사로 만들고, 아시아 무역에 독점권을 주었다.

향료와 후추의 시대가 끝나고, 동인도회사는 인도산 면직물을 수입했다. 당시 캘리코(calico)라 불리웠던 인도산 면직물은 영국산 모직물에 비해 가격도 저렴하고 빛깔도 좋았다. 영국인은 물론 유럽에서 인기를 끌었다.

동인도회사가 아시아 무역을 시작한 초기에는 면직물, 비단, 차, 향료, 도자기등 아시아의 제품이 유럽의 것보다 우수했다. 아시아 물자가 대량으로 영국에 유입되자, 영국은 무역적자가 발생했다. 영국의 수공업은 아우성쳤고, 의회를 압박했다. 특히 영국의 모직물 산업이 타격을 받아 의회에서 캘리코 사용금지 법안이 채택되기도 했다.

동인도회사는 독점기업이었기 때문에 수익률과 배당률이 높았다. 1671~1681년 사이에 연평균 배당률은 21.8%였고, 1670년대엔 그 두배인 45%의 고액 배당을 받았다.

투자자도 몰렸다. 크롬웰의 조치로 1659년 재출발할 때 동인도회사는 출자금 37만 파운드였지만, 1664년엔 49만 파운드로 늘어났고, 1671년 61만 파운드, 1685년 170만 파운드로 팽창했다. (이사다 미노루 ‘동인도회사’)

수익률과 배당률이 높자 동인도회사 주식 투자도 투기성을 띠었다. 동인도회사에 대한 비난이 높아지자 1698년에 별도의 동인도회사를 만들어 경쟁을 시켰는데, 오히려 부작용이 커 결국 1709년 신구 두 개의 동인도회사는 하나로 합병하게 된다.

동인도회사는 중국 차를 수입해 영국에 차 열풍을 일으켰다. 막대한 양의 중국차 수입은 무역역조를 심화시켜 결국 벵골만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팔다가 아편전쟁을 일으키는 비도적적인 행위도 일삼았다.

 

▲ 동인도회사의 최대영역 /위키피디아

 

1765년 동인도회사는 무굴제국 황제로부터 벵골, 비할, 오리사 등 세지역에서 징세권을 확보했다. 회사가 주민들을 대상으로 세금을 걷어 수익을 만들게 된 것이다. 영토는 무굴제국의 것이되, 세금은 동인도회사의 것이 되는 이상한 형태의 통치가 이뤄진 것이다.

회사와 국가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게다가 인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동인도회사는 세포이(sepoy)라는 인도인 용병을 고용해 진압했다. 1750년 3,000명으로 시작된 동인도회사 군대는 1763년 2만6,000명, 1778년 6만7,000명으로 증원되었다. 자체 해군도 보유했다.

 

▲ 동인도회사 소속 네메시스호가 1841년 아편전쟁에 참여해 청나라 정크선을 파괴시키고 있다. /위키피디아

 

동인도회사는 각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승리해 벵골지방을 확보했고, 인도 동부, 남부, 버마(미얀마)로 회사의 영토를 넓혀 나갔다.

동인도히사에 대한 영국 정부의 개입이 갈수록 심해졌다. 기업과 국가의 영역이 모호해지고, 영국은 동인도회사 지배영역에 총독을 파견한다. 동인도회사에 대한 감독권한도 강화했다.

마침내 1857년 동인도회사의 용병인 세포이들이 반란을 일으켜 무굴제국 황제와 연합하자 영국 군대가 투입된다.

영국 정부는 군대를 파견해 세포이 항쟁을 진압한 이후 더 이상 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를 지배할수 없다고 판단해 해체를 결정한다. 1858년 8월 영국 의회는 인도통치법을 가결해 동인도회사의 통치권과 특허권을 영국여왕에게 반납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그해 11월 1일부터 인도는 영국 정부의 직접 지배에 놓이게 된다.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해체하고, 무굴제국 황제를 폐위시킨 다음 영국 여왕을 인도 황제로 옹립해 인도제국을 성립시킨다. 동인도회사는 주주들에 대한 배당금 지불등 잔무처리를 위해 1874년까지 청산법인 형태로 존재하고 명줄을 놓는다.

 

▲ 동인도회사 간부의 호화 생활. (1760년 그림)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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