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6 오늘] 시베리아에 버려진 데카브리스트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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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 오늘] 시베리아에 버려진 데카브리스트 봉기
  • 김인영 에디터
  • 승인 2018.12.25 16: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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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귀족들, 프랑스 주둔하며 시민 혁명 심취…공화제 반란 시도하다 실패

 

러시아어로 12월을 데카브리라고 한다.

1825년 12월 1일(러시아 구력으로는 11월 19일) 차르 알렉산드르 1세(Alexander I)가 흑해 연안 요양지 타간로크에서 급사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제위는 동생에게 넘어가는 게 순서다.

제위 계승 순서로는 바로 아래 동생인 콘스탄틴(Constantine)이 다음 황제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콘스탄틴은 카톨릭인 폴란드 백작의 딸과 재혼 한뒤 제위 포기를 밝혔고, 형 알렉산드르의 승인을 받은 상태였다. 따라서 제위는 그 다음 동생인 니콜라이가 계승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사실은 사전에 아무에게도 공표되지 않았다. 갑자기 차르가 사망하자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콘스탄틴이 제위를 이어나갈 줄 알았다. 원로원과 군대는 콘스탄틴에게 충성을 약속했다.

이때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던 콘스탄틴은 제위 포기를 거듭 확인했고, 앞서 선황 알렉산드르가 만들어 놓은 비밀칙서가 공개되었다. 다음 황제는 니콜라이에게 돌아갔다.

알렉산드르에서 니콜리아 계승까지 3주 동안 황제가 비어 있었다.

이 기회를 구제동맹(Union of Salvation)이라 불리는 귀족 비밀결사가 포착했다. 그들은 황제를 쫓아내고 공화제를 실시하자는 공화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뜻을 같이 하는 비밀결사들과 접촉했다.

그들은 동원 가능한 3개 연대에다 3개 연대를 더해 6개 연대로 반란을 일으키고, 새 황제 니콜라이를 체포하고 정부기관을 접수키로 했다. 니콜라이에게 제헌의회를 소집케 하고 임시정부의 수립을 선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825년 12월 26일(구력 12월 14일), 그날은 수도 성 페테르부르크에서 새 황제 니콜라이 1세(Nicholas I)에게 충성을 선서하는 날이었다.

주모자의 일원이었던 베스투제프 형제는 근위대 병사들에게 차르 니콜라이가 콘스탄틴의 권력을 찬탈했다고 선동하며 3,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원로원 광장으로 왔다. 다른 군대와 민간인이 합류했다. 시위 군인들은 전제정치 타도와 농노제 폐지를 주장하는 선언문을 발표하고자 했다.

그러나 최고 지도자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Sergei Trubetskoy) 공이 나타나지 않았다. 반란군은 우물쭈물하며 광장을 지키기만 했다. 반란자보다 3배나 많은 정부군 9,000명이 광장 주위를 포위했다. 양군은 몇 시간 동안 대치했다.

새 황제는 통치 첫날을 피로 물들이고 싶지 않았다. 황제는 대주교를 보내 반란군을 설득했다. 그러나 효과가 없었다. 설득에 나선 밀로라도비치(Mikhail Miloradovich) 장군도 반란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니콜라이는 드디어 발포명령을 내렸다. 한 시간 만에 광장은 깨끗이 정리됐다. 남부 지방에서 일어났던 일부 봉기도 진압되었다.

 

이 사건이 12월에 일어났기 때문에 주모자들은 데카브리스트(Dekabrist)라 부르고, 이날 미완의 혁명을 '데카브리스트 봉기'(revolt)라고 부른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해서 데카브리스트 혁명이라고도 한다.

 

사건의 주모자들은 러시아 귀족들이었다.

나폴레옹의 침공을 막아낸 러시아군은 1814년 프랑스 파리로 진격했다. 프랑스에 진주한 러시아 젊은 장교들은 몇 년간 그곳에서 보내면서 프랑스 혁명과 민주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젊은 장교들이 러시아로 돌아 와 전근대적 농노제도와 봉건주의 부정부패, 가난에 쩌든 농노들을 보면서 프랑스식 혁명을 꿈꾸게 된다. 그들은 알렉산드르 1세가 죽고 니콜라이 1세의 즉위식 날에 반란을 꾀한 것이다.

그러나 일반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지 못했기에 실패하고 말았다. 사전에 모의사실이 발각되어 혁명은 허무하게 좌절되고 만다.

 

체포된 600명의 장교들은 코카서스 전쟁에 노예병으로 투입된다. 그중 120명은 모든 재산과 권리를 박탈당한 채 노예 신분으로 전락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영하 40도의 강추위에 폭풍한설이 몰아치는 길을 발목에 쇠사슬이 감긴 채 1년을 걸어서 가는 길에 대부분이 죽고 일부만 살아서 이르쿠츠크에 도착한다. 이들은 강제 노동을 하다가 일부는 굶주림과 추위에 사망했으며, 1856년 황제의 특사로 해방되었을 때 절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45명은 귀환했지만, 모스크바와 성페테르부르그에 사는 것은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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