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5 오늘] 카를 대제, 신성로마제국 황제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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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5 오늘] 카를 대제, 신성로마제국 황제 되다
  • 김인영 에디터
  • 승인 2018.12.24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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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 군주와 교회 수장의 이해 일치…왕국 분열로 중단되었다 오토 1세때 부활

 

카를 대제만큼 각국 언어로 달리 표현되는 황제도 없을 것이다. 프랑스어로 샤를마뉴(Charlemagne), 독일어로 카를(Karl), 이탈리아어로 카를로(Carlo), 라틴어로 카롤루스(Carolus)다.

서로마가 멸망한 후 프랑크족이 지금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을 차지하며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프랑크족이 건설한 프랑크 왕국은 현재 유럽 10여개국의 원조이기 때문에 각국이 자국어로 번역하고 있다. 영어로는 찰스(Charles)다. 여기서는 카를 대제라고 한다.

카를 대제는 서기 800년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 로마에서 교황 레오 3세(Leo III)로부터 로마황제 황제관을 머리에 얹는다. 역사가들은 이때를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eror)의 기점으로 본다.

 

▲ 르네상스 시대인 16세기에 라파엘로가 그린 카를 대제 대관식 /위키피디아

 

카를 대제는 황제가 되기 이전에 프랑크 왕으로 수 차례의 전쟁을 치르면서 왕국의 영토를 두배로 늘렸다. 서유럽에서 영국, 이베리아 반도, 이탈리아 남부를 제외한 전부가 그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게르만족 지역을 대부분 장악했고, 아시아계 훈족과의 전쟁으로 헝가리 지역까지 정복했다. 이탈리아에서 롬바르드 왕국과 전쟁을 벌이고 베네벤토를 공격하고, 로마를 원정했다. 그때마다 교황에게 최대의 예우를 보였다.

▲ 위 그림의 일부

카를 대제가 로마 황제가 된 것은 속세의 군주와 교황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카를은 사방에서 전쟁을 벌이면서 교회의 권위와 옛 로마제국의 권위를 빌리고 싶어 했다. 이에 비해 로마 교회는 동쪽의 그리스 정교와 주도권 다툼에서 이기기 위해 강력한 세속 권력의 지지가 필요했고, 이탈리아 내의 안정을 원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황제는 로마에 인접한 롬바르드 왕국을 부추겨 교황을 공격하게 했고, 로마교회 내 성직자들과 접촉해 교황에 도전했다. 교황은 생존을 위해서도 서유럽에서 가장 힘이 센 카를왕의 지원이 절실했던 것이다.

카를이 로마 황제에 오르자, 고대 로마의 후계임을 자처하는 동로마제국의 황제가 분노했는데, 카를은 동로마황제에 깍듯이 예의를 표해 충돌하지 않고 무마했다. 동로마의 미카엘 1세는 812년에 카를을 황제로 인정했다.

짧은 기간이나마 카를 황제 기간에 서유럽에선 팍스로마나의 평화가 형성되었다. 카를이 죽고 나서 황제 제위는 자손들에게 이어진다. 하지만 제국이 분열되면서 황족간의 갈등이 커지자 924년 제위는 단절되었다.

그러다가 동프랑크 왕국의 오토 1세가 962년에 황제 칭호를 받아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는 이어진다. 하지만 이때부터 제위는 독일 지역에 한정되는 지위로 굳어지고, 신성로마제국의 역사는 독일의 역사로 좁혀진다.

 

▲ 프랑크 왕국의 영토 변화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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