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3 오늘] 소련군 끌어들였다 되레 죽은 아프간 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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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3 오늘] 소련군 끌어들였다 되레 죽은 아프간 아민
  • 김인영 에디터
  • 승인 2018.12.22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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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카불 점령후 아민 정권 공격…‘소련판 베트남 전쟁’의 시작

 

아프가니스탄은 오랜 역사 속에서 강대국 침략자들의 무덤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침략했다가 추위를 이기지 못해 물러났고, 영국군도 이 산악국가를 침공했다가 1명만 살고 전멸한 적이 있다.

동서냉전이 치열하던 1979년에 하피줄라 아민(Hafizullah Amin)이라는 아프간 정치인이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종족 중 대표 종족인 파슈툰족 출신으로 카불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대학원 공부를 한 후 귀국해 교사가 되었다. 이후 공산당 계열인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에 합류했다.

그는 1978년 4월 27일 바브락 카르말,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 등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 무함마드 다우드를 살해했다.

쿠데타 이후 타라키가 대통령이 되었다. 아민은 외무·국방장관을 두루 거쳤고, 아프가스탄 인민 민주당의 사무총장을 역임하며 권력 실세로 부상했다. 그는 소련을 끌어들여 미국과 유럽의 대사들을 추방하고 아프가니스탄 내의 정치 권력을 확보했다.

아민은 친소파였지만, 소련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 이념적으로도 모호했다. 마르크스주의자이기보다 민족주의자에 가까웠다. 소련을 등에 업고 미국과 유럽의 서방 세력을 쫓아냈지만, 언제라도 소련에 등을 돌릴 사람이었다.

 

소련은 냉전기간에 아프간을 자기 편으로 만드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아프간 정부도 역으로 소련에 접근하면서 많은 이익을 챙기려 했다.

아민이 외무장관이던 시절에 소련에게 "지금보다 더 많이 내놓지 않으면 우리는 미국을 선택하겠다"는 식으로 압박했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었다. 아민에게 소련은 경제적으로 뜯어내고, 군사력을 이용해 권력을 잡는 수단이었다.

소련도 아민의 속셈을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남쪽 파키스탄과 인도의 서방세력을 견제하는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아프간의 실세 아민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 하피줄라 아민 /위키피디아

타라키와 아민의 정권이 수립되자, 아프가니스탄은 곧바로 소련 위성국으로전락했다. 그 대가로 아민은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약속받았지만 결코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소련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아프간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권력을 잡은후 얼마 되지 않아 대통령에 오른 타라키와 군부를 쥔 아민 사이에 정치적 갈등이 벌어졌다.

아민은 이번에도 소련을 이용했다. 아민은 소련의 지도자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과 비밀리에 모의해 1979년 9월 16일 쿠데타를 일으켜 타라키 대통령을 살해했다.

곧이어 그는 대통령에 올랐다. 대통령에 오른후 3개월간 아민은 무단통치를 저질렀다.

집권 3개월 동안에 1만 8,000명의 정치적 반대자들이 처형되었고, 아프간의 지도자들은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아프가니스탄은 1919년 영국의 보호국에서 국왕이 통치하는 왕국으로 독립했다. 냉진기에 왕정은 미국과 소련 사이에 등거리 외교를 하며 명맥을 유지해나갔다. 그러다가 1973년 쿠데타로 왕정이 타도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이후 수차례 쿠데타가 발생해 정권이 교체되는 가운데 친소 좌파 세력이 부상하고 1978년에는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공산 정권은 이슬람을 탄압했다.

이에 아프간의 이슬람 세력은 무신(無信)론자인 공산정권에 지하드(성전)을 선언하고 곳곳에 할거하며 무장투쟁을 벌였다.

 

▲ 소련군의 아프간 수도 카불 침공로 /위키피디아

 

아민이 집권하던 기간에 그의 무단 통치는 오히려 이슬람의 지하드를 강화시켰다. 아민 정권은 1979년 11월 팍티야 주에 대규모 토벌 공세를 벌여 무장 조직들을 진압하고, 파키스탄 국경 지역의 마을들을 전멸시켰다.

하지만 반군의 저항은 끈질겼다. 곳곳에서 테러가 이어졌다. 이에 아민은 카불에 소련군을 주둔해달라고 요청했다.

1979년 12월 12일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열린 정치국 회의에서 소련군의 아프간 출병이 결정되었다. 이튿날인 13일 소련은 전격적으로 육군과 공군의 양면으로 아프간을 침공했다. 5개 사단의 대군이었다.

12월 23일 소련군은 수도 카불을 점령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민은 소련군이 자신을 도와줄줄 알았다.

소련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그들은 강대국을 저울질하던 아민을 싫어했다. 차리라 고분고분한 지도자, 즉 괴뢰가 필요했다. 10만의 병력을 투입한 이상, 이 산악국가의 야만스러운, 별볼일 없는 지도자에게 휘둘려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소련군은 수도 카불에 진입해 아민의 정부군도 진압했다. 비밀 경찰 책임자이던 아민의 조카가 암살되었고, 소련군의 지령을 받은 국가보안위원회 요원들이 카불의 대통령궁에 잡입해 12월 27일 대통령궁을 습격했다.

아민은 이날 사살당했다. 아민은 자신이 놓은 덫에 걸려 죽은 것이다.

소련은 아민 정권의 체코 주재 대사였던 바브락 카르말을 대통령에 내세워 친소 정부를 수립하고,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었다.

 

▲ 소련군 점령에 저항하는 아프간 반군 게릴라 /위키피디아

 

하지만 소련에게도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처럼 무덤이었다.

소련의 점령은 이슬람 반군의 저항을 더욱 격화시켰다. 이슬람 과격파 무자히딘(Mujahideen) 저항세력은 끈질기게 유격전을 펼쳤고, 소련군은 도시지역과 주요 도로들만 장악했을 뿐, 아프간 영토의 80%에 해당하는 농촌지역은 소련군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소련은 대규모 공습을 감행해 반군들의 피난처인 시골 마을들을 밀어버리며 관개시설을 파괴하고 수백만 개의 지뢰를 매설하는 등 가혹행위를 자행했다. 그 결과 반군은 물론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1980년대 중반이 되면 아프간에 파견된 소련군은 10만명을 넘어섰고, 전지역으로 전선이 확대되었다. 소련이 부담해야 할 군사비도 너무 컸다. 서방의 비난으로 외교적 타격도 컸다.

1987년 소련의 새 서기장으로 집권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아프간에서 철군을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아프가니스탄의 마지막 소련군은 1988년 5월 15일 철수를 시작해 1989년 2월 15일 전원이 아프가니스탄 영토를 빠져나갔다.

10년간의 긴 전쟁에서 패한 것은 결국 소련이었다. 1991년 소련이 오히려 해체되었다. 아프간 침공에 든 경제적 비용이 소련 해체의 한 요인이 되었다.

미국이 베트남 참전으로 고통을 겪은 만큼 소련도 아프간에서 곤욕을 치렀다. 소련의 아프간 침공은 ‘소련판 베트남 전쟁’ 또는 ‘곰의 덫’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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