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2 오늘] 독재자 차우셰스쿠 곁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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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 오늘] 독재자 차우셰스쿠 곁엔 아무도 없었다
  • 김인영 에디터
  • 승인 2018.12.21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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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를 장기집권, 족벌 정치하다 시민 봉기로 1주일만에 붕괴

 

철권통치를 하는 독재정권도 시민봉기 1주일만에 힘없이 무너질수 있다는 실증적 예가 1989년 12월 22일 쫓겨난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Nicolae Ceaușescu) 대통령에서 찾을수 있다.

루마니아의 시위는 그해 12월 16일 서부 국경근처의 티미쇼아라(Timișoara)라는 중소도시에서 소수민족인 아시아계 마자르인의 시위에서 시작되었다. 챠우셰스쿠 정권이 인권운동가이자 장로교 목사인 퇴케시 라슬로 (Tőkés László)를 국외추방 처분을 내린데 대해 항의 시위가 벌어졌고, 보안경찰이 시위대에 발표해 수많은 사상자가 났다. 시체 안치소에서 도둑맞은 시위자 시체가 현장에서 매매되고 있다는 소식이 퍼지자 데모는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마자르인은 아시아 유목민족이 이웃 헝가리 일대에서 현지화한 종족으로, 정부의 진압이 무차별적이었다.

소수민족에 대한 강경진압에 대학생 등 지식인들이 들고 일어나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군대가 나서 강경 진압에 나섰다.

 

▲ 루마니아 혁명을 촉발한 티미쇼아라 시위대 /위키피디아

 

12월 21일, 다급한 챠우셰스쿠는 수도 부쿠레슈티(Bucharest)에서 10만명을 동원해 관제 집회를 열었다.

차우셰스쿠가 연설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티미쇼아라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자가 두 개의 수류탄을 던졌다. 시위자는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다. 광장은 패닉 상태에 빠졌고, 집회는 강제 해산당했다.

이 관제집회는 국영 루마니아 방송으로 생중계되었고, 차우셰스쿠가 당황하면서 뒷걸음치는 모습이 루마니아 전역에 방영되었다.

관제 집회에 대학생과 시민들이 합류해 독재 타도를 외치는 민중집회로 발전한다. 세쿠리타테라는 보안경찰이 진압에 나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군대도 진압에 동원되었다.

 

▲ 1989년 12월 루마니아 혁명의 시위대 /위키피디아

 

12월 22일, 이날은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하루 사이에 루마니아 역사가 뒤바뀐 날이다.

이날 오전 9시 30분, 국방장관이었던 바실리 밀레아(Vasile Milea)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차우세스쿠 정권은 밀레아가 반역자였으며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가 자살한 게 아니라 발포 명령을 거부해 총살당했다는 얘기가 퍼졌다. 여기서 군부가 흔들려 일부가 군중의 편에 돌아섰다.

차우셰스쿠는 신임 국방장관을 물색했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빅토르 스탄쿨레스쿠(Victor Stănculescu)를 국방장관에 지명했지만, 그는 차우셰스쿠 정권에 부역하기 싫어 멀쩡한 왼쪽 다리에 가짜 깁스까지 하면서 국방장관 자리를 거부했다. 하지만 그는 어쩔수 없이 국방장관을 떠맡게 된다.

시위군중들은 공산당 본부를 비롯해 정부 기관을 점거한데 이어 대통령궁으로 들이닥쳤다.

차우셰스쿠는 헬리콥터를 타고 탈출을 시도했다. 여러 대의 헬리콥터를 불렀지만 한 대만 왔다.

시위대는 임시정부인 '구국 전선 평의회'를 조직하고,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했다.

▲ 니콜라에 챠우셰스쿠 /위키피디아

차우셰스쿠는 비상사태를 선언하려 했지만, 마지 못해 국방장관이 된 스탄쿨레스쿠가 이를 거부했다. 국방장관은 군에 더 이상 차우셰스쿠를 도와주지 말고 조용히 원대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차우셰스쿠는 아내 엘레나와 헬리콥터를 타고 북한으로 도망가려고 했지만, 도망치는 장면마저 자유 루마니아 방송로 개칭한 카메라에 포착되어 전세계로 전파를 탔다.

콘스탄틴 더스컬레스쿠(Constantin Dăscălescu) 총리가 사임하고, 내각도 총사퇴했다.

혁명 세력은 정권을 비판한 혐의로 구속된 양심수들을 석방시켰다. 구국전선평의회는 공산당내 자유주의자였던 이온 일리에스쿠(Ion Iliescu)를 혁명 지도자로 옹립했다. (그는 이듬해 선거에서 정식 대통령이 되었다.)

밤이 되면서 군인들도 시위대에 대거 가담했다. 대령 이상 고급장교들까지 시위대에 참가했다.

차우셰스쿠 부부를 태운 헬기의 조종사 바실리 마루탄 중령도 더 이상 차우셰스쿠에 충성하지 않고, 헬기를 좌우로 마구 흔들었다. 조종사는 대공사격을 받고 있다는 핑계를 댔다.

차우셰스쿠는 하는수 없이 헬기를 포기하고 육로로 도주했다. 차우셰스쿠는 도로를 달리는 민간 차량을 잡아 탔는데, 그 운전기사는 수십 m를 가다가 엔진 과열이란 핑계를 대고 차량에서 내리라고 했다. 차우셰스쿠는 다시 차를 잡았지만, 이 운전기사는 현지의 농부와 짜고 차우셰스쿠 일행을 농업박물관에 감금시켰다.

이튿날인 23일, 구국 전선 평의회는 농민의 밀고를 받고 차우셰스쿠 부부를 체포했다. 이 사실이 자유 루마니아 방송을 통해 전국에 보도되었다. 크리스마스 날인 25일 차우셰스쿠 부부는 특별 군사재판에서 대량 학살 및 부정 축재의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받고, 총살되었다.

 

▲ 개인숭배에 사로잡힌 챠우셰스쿠 부부 /위키피디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1965년 루마니아 공산당 최고 자리에 올라, 1974년부터 1989년까지 초대 대통령직을 역임하며, 무려 24년간 장기집권했다. 소련 주도의 바르샤바 조약기구(WTO)에서 탈퇴하고, WTO의 체코 침공에도 참여하지 않으며 동서 냉전 시기에 독자노선을 걸었다.

하지만 그는 비밀경찰을 운영하며 공포정치를 감행했고, 부인 엘레나를 비롯해 일가족을 정부 요직에 앉히는등 족벌 정치를 했다. 고아출신들을 어려서부터 훈련시켜 친위조직 세쿠리타테를 만들어 암살, 정보수집등의 임무를 맡겼다.

그는 북한 김일성을 숭배해 의형제를 맺은 사이로 알려져 있다. 나중에 탈출할 때 북한을 가려 했던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그는 북한에서 개인숭배를 배워 자신에 대한 숭배에 적용시켰다.

경제는 엉망이었다. 무리한 공업화 정책으로 1980년대에 무려 111억 달러의 국가부채를 졌다. 차우셰스쿠 정권은 막대한 부채를 붕괴되기 직전인 1989년 여름에 완전히 갚았다. 하지만 부채를 갚기 위해 농산물과 공산물을 대량으로 해외에 파느라, 국내에서는 생필품이 부족하게 되었다. 정권 붕괴 직전에 식량을 배급해야 했고, 난방과 가스, 전기 공급이 수시로 중단되었다.

이런 경제난과 철권 통치가 어느 한순간 와르르 붕괴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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