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1 오늘] 2차대전 때 일본 편에 섰다 돌아선 태국
상태바
[12/21 오늘] 2차대전 때 일본 편에 섰다 돌아선 태국
  • 김인영 에디터
  • 승인 2018.12.20 19: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개전초 일본에 협조하며 연합국에 선전포고…전세 역전되자 연합군 편으로

 

태국에겐 2차 세계대전이 큰 고민이었다. 미국과 영국의 연합군을 지지할 것인가, 떠오르는 일본을 지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1941년 12월 21일, 태국의 플랙 피분송크람(Plaek Phibunsongkhram) 총리는 방콕 왓 크라케오(Wat Phra Kaew) 궁전에서 일본과 동맹해서 연합군에 대항한다는 조약에 공식서명했다. 이로써 태국은 주축국의 일원으로,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태국 내 모든 군사시설과 철도, 도로를 일본이 이용할수 있도록 했다. 이에 맞서 중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연합국은 태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 플랙 피분송크람 /위키피디아

피분송크람(약어로 피분)은 당초 어느 진영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국으로 남으려 했다. 하지만 앞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일본의 지원을 얻은게 잘못이었다. 공짜는 없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에 인도차이나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과 태국 사이에 영토를 둘러싸고 전쟁(1940~1941)이 벌어졌다. 이 전쟁은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가 독일에 의해 점령되어 비시 정부가 출범했을 때, 일본이 비시 정부와 협상을 벌여 캄보디아 북쪽의 프라타봉(Phra Tabong) 지역을 태국에 넘겨주도록 도와주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도와주었으니, 당연히 태국이 자기네 편을 들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피분 총리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끝내고 정적인 프리디 바노명(Pridi Banomyong)을 내각에 끌어들여 전쟁 중립을 추진했다. 중립화 방안은 프리디의 아이디어였다.

 

태국 정부가 중립 노선을 밝히자, 1941년 12월 들어 일본은 시한부로 답변을 요구했다. 12월 8일까지 답변하지 않을 경우 침공하겠다는 것이었다. 12월 7일 밤 11시 일본군은 이동을 시작해 8일 태국을 침공했다.

일본이 요구하는 것은 버마, 말레이시아등 영국 식민지를 공격할 터이니, 태국은 길을 열어달라는 것이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를 침공할 길을 빌려 달라(征明假道)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이때 비겁하게도 피분 총리는 일본에 굴복했다. 길만 열어 주면 나라의 독립을 유지할 것으로 믿었다. 당시만 해도 일본은 파죽지세였다. 중일 전쟁에서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하고 태평양의 미국령 진주만을 공격했으며,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식민지에 진주했다. 피분 총리는 강한 자에 붙기로 한 것이다.

 

피분은 35세이던 1932년 쿠데타를 일으켜 절대군주를 페위시키고 권력을 장악했다. 후임 국왕은 어려서 스위스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임금 자리를 비워 놓은 채 다른 사람을 총리로 내세우고 실권을 잡았다.

▲ 2차 대전기 버마 전선 /위키피디아

그는 민족주의자로 나라 이름을 사이암(Siam)에서 태국(Thailand)로 바꾸고, 국민들의 정신개조운동을 벌였다.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를 존경하는 파시스트였다.

1938년에 총리 자리를 꿰어차고, 2차 대전이 종식되기 직전인 1944년 1월까지 태국의 실권을 장악했다.

2차 대전기에 태국은 어떤 위치였을까.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보다는 자율성을 유지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지배를 받는 형태였다고 규정된다.

태국은 병력을 동원해 버마, 말레이시아 전선에 참전해 영국군, 미군과 싸웠다. 덕분에 태국은 버마와 말레이시아, 라오스에서 영토를 넓혔다. 일본에 부역한 댓가였다. 연합군은 그 반격으로 방콕 시내를 공습했다.

이 무렵 일본군이 영국군 포로들을 동원해 버마와 태국 국경을 흐르는 콰이 강에 다리를 건설했는데, 유명한 ‘콰이강의 다리’(The Bridge on the River Kwai)라는 영화는 이 때의 스토리다.

 

▲ 콰이강의 다리(2017년) /위키피디아

 

하지만 일본군과 태국인들과 충돌이 벌어졌다. 태국 양민들이 일본군에 살해되는 사건들이 빚어졌는데, 피분 정부는 그럭저럭 일본과 타협하며 협조관계를 유지했다.

1943년경부터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주축국이었던 이탈리아가 패망하고, 태평양 전선에서 미군이 섬들을 하나씩 점령하며 일본을 향했다. 버마 전선도 교착상태에 빠졌다.

피분 정부는 일본과 거리감을 두었다. 이러다가 일본과 함께 연합군에 점령되는 게 아닌지, 걱정했다. 태국에서는 이탈리아의 피에트로 바돌리오(Pietro Badoglio)가 모델로 떠올랐다. 바돌리오는 무솔리니가 실각한 이후 총리가 되어 연합군과 휴전협정을 체결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인물이다.

▲ 프리디 바노명 /위키피디아

이때 나선 사람이 피분의 정적인 프리디 바노명이다. 그는 반일 게릴라 부대를 조직해 연합군의 편에 섰다. 그리고 미국에게 피분 정부가 어쩔수 없이 일본의 편에 섰다고 해명했다. 영국은 태국에 따끔한 맛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미국은 프리디의 설득을 받아들여 반일 게릴라들을 연합군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프리디의 반군 세력은 5만명을 헤아렸다.

1944년 1월 프리디 세력은 피분 정권을 무너뜨렸다. 새 정권은 1944년 8월 일본과의 전시협정을 파기했다.

1945년 들어서면서 태국 정부는 일본군을 기습공격했다. 반정부 게릴라 부대는 정규군에 합세해 항일 투쟁에 나섰다. 일본이 패망하자 태국은 영국과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가 일본의 무력강압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라고 선언하고, 태국 내의 친일파를 제거했다. 그리고 ‘자유태국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태국은 영국과 프랑스에 자진해서 손해배상을 하고 미국의 지원을 받아 패전국 대우를 면했다. 그리고 1946년 12월 유엔에 가입했다. 물론 미국이 허락한 조치였다.

1950년에 한국전이 벌어지자 태국은 연합국임을 입증할 목적으로 유엔 결의에 따라 즉시 파병했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