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0 오늘] 아시아 삼각무역 거점 마카오 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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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0 오늘] 아시아 삼각무역 거점 마카오 반환
  • 김인영 에디터
  • 승인 2018.12.19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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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임대조건으로 1557년 점유…1국2체제 유지

 

1999년 12월 19일 밤 11시 35분부터 12월 20일 0시 16분까지 마카오 외항 신전해(新塡海) 구 문화센터 광장에서 마카오 주권 반환식이 거행되었다. 20일 0시, 주권 교체식장에서 장쩌민 국가주석과 조르제 삼파이우 포르투갈 대통령 등 양국 고위급 인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포르투갈 국기가 내려지고 중국의 오성홍기가 게양됐다.

이로써 마카오의 행정구역 명칭이 중화인민공화국 오문특별행정구(中華人民共和國 澳門特別行政區)로 재편되었다. 중국어로 마카오는 澳門이다.

포르투갈이 중국 남쪽 마카오(Macau)를 중국에 반환한 것은 식민지로 통치한지 112년만이다.

앞서 1997년 7월 1일 영국이 홍콩의 주권을 중국에 넘겨줌으로써 중국 땅에서 유럽의 식민지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중국은 홍콩과 마카오를 1국2체제로 통치하고 있다.

 

▲ 1887년 청나라와 포르투갈이 마카오의 지위에 관해 체결한 조약문 /위키피디아

 

마카오는 16세기 대항해 시대의 선두주자였던 포르투갈이 동아시아의 거점으로 활용하면서 포르투갈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포르투갈은 1510년 언도 고아(Goa)에 거점을 만든데 이어 1511년 말레이시아의 말라카(Malacca)에 진출한 다음, 중국에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남지나해 해안을 어슬렁거렸다.

명나라 10대 정덕제(正德帝) 때인 1517년 포르투갈 정부가 난징에 사신을 보냈지만 거절당했다. 포르투갈 배가 중국 해안에서 못된 짓을 하고 다닌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말라카의 술탄이 명나라에 포르투갈 세력을 쫓아내 달라고 병력지원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중국 남해안에 발호하고 있는 해적들을 물리쳐 줄 터이니, 기항지를 한곳 달라고 했다. 이에 명나라 조정도 임대료를 내는 조건으로 마카오에 기항지와 거주지를 내주게 된다.

1557년 포르투갈은 명나라에 영구거주 조건으로 500 태일(兩, 37.7g)의 은(18.9 kg)을 임대료 조로 내는 조건으로 마카우 임대 계약을 맺는다. 명나라를 이은 청나라 시대에도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거점으로 남게 된다. 명과 청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왜구(일본)의 해안선 접근을 막았기 때문에 포르투갈이 마카오를 통해 중국과의 교역을 독점했다.

 

▲ 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교역로 /위키피디아

 

마카오에 영구거주권을 획득한 포르투갈은 중국, 일본, 스페인 사이에 무역 거래에 나섰다. 스페인은 1571년 필리핀 루손섬을 점령하고 마닐라를 건설해 동아시아 중국, 일본과의 무역 거점으로 삼았다.

주요 교역상품은 은(銀)이었다. 중국은 당시 은으로 세금을 걷었다. 명나라 말기에 북방의 몽골이 자주 쳐들어왔기 때문에 명나라는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 은의 수요가 급증했다. 북방의 긴장은 명나라에겐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북방의 긴장이 고조되면 북방으로 가는 은의 흐름이 급속하게 빨라졌다.

이 무렵 일본에서 은이 생산되었고, 스페인은 안데스 지역 포토시(Potosi)에서 대량의 은을 생산했다. 일본의 은과 신대륙의 은이 마카오의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중국에 유입되었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에 걸쳐 중국은 블랙홀 같이 세계의 은을 흡수했다.

일본 역사학자 고바타 아츠시(小葉田淳)등의 연구에 의하면 16세기 후반 중국으로 유입된 은은 2,100~2,300톤에 이르는데, 그중 일본산 은이 1,200~1,300톤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임란 직후인 17세기 전반에는 중국의 해외 은도입량이 더 늘어 5,000톤에 이르렀는데, 절반 가까운 2,400톤이 일본산 은으로 추정된다.

16세기 후반에 중국이 수입한 은의 절반은 스페인, 나머지 절반은 일본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은이 마카오를 통해 중국으로 흘러들어 갔다.

서양에서는 오랫동안 금과 은이 1대12.5의 교환비율로 거래됐다. 그들은 금과 은의 교환비율을 천문학에서 찾았다. 그들에겐 금은 태양이요, 은은 달이었다. 수메르 천문학에선 1년에 달이 태양을 도는 비율을 1대12.5로 계산했다. 이 1대12.5의 비율을 금과 은의 교환비율로 정했다. 수메르인의 전통은 로마제국에도 이어져 금과 은의 비율이 1대12.5 또는 1대13을 유지했다.

이에 비해 중국에선 금과 은의 교환비율이 1대6이었다. 중국에서 은 값이 비싼 것은 세금을 은으로 받아 은의 수요가 컸던 탓도 있었다.

여기서 엄청난 이문이 발생한다. 마카오의 포르투갈 상인들은 일본 또는 남미 볼리비아에서 생산된 은을 가져와 중국에서 금과 교환하면 100%의 환차익을 얻게 된다. 마카오에 둥지를 튼 포르투갈 상인들은 해외에서 싼 은을 구해 중국에서 금으로 교환하고, 그 금으로 일본에서 은으로 바꾸고, 인도에서 면직, 말레카에서 후추를 사서 유럽으로 가져가면 엄청난 무역차액을 얻었다. 이른바 재정거래(arbitrage)에 의한 삼각무역이다.

동아시아 무역은 일본 왜구와 중국 사이의 밀무역, 새롭게 진출하는 포르투갈, 스페인의 유럽인들의 삼각무역이 경합하며 급성장했고, 그 창구가 마카오였다.

중국의 최대 수출품은 생사(生絲)였다. 생사(raw silk)는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가공하지 않은 실을 말한다. 생사는 주로 농민들의 부업에서 생산됐고, 최대생산지는 양쯔강(長江) 이남의 강남 델타지역이었다. 그 지역에서 생산된 생사를 호사(湖絲)라고 불리며 수출됐다. 생사산업은 벼농사와 비교하면 높은 수입을 얻을수 있었다. 또 많은 토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따라서 가난한 중국 농민들은 생사업에 종사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전세계 은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다. 중국 명나라는 당시 가장 부유한 문명국이었다. 중국인들은 서양에서 가져온 물건에 큰 관심이 없었고, 대신에 유럽인들은 중국의 비단, 도자기에 탐을 냈다. 이 물건을 가져가기 위해선 은을 가져와야 했다. 스페인이 해외(남미)에서 개발한 은의 절반이 마카오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갔다. 이 와중에 마카오 상인들은 국내외 환차익을 활용한 투기적 행태를 보이며 무역이득을 챙겼다.

 

▲ 1887년 청나라와 포르투갈이 마카오의 지위에 관해 체결한 조약문 /위키피디아

 

스페인이 쇠퇴하고 네덜란드가 세계 해상권을 잡았을 때 마카오를 접수하기 위해 몇차례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마카오의 번영도 아편 전쟁 이후 영국이 1842년 홍콩을 할양받으면서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포르투갈은 1849년년까지 청나라에 임대료를 지불했다. 하지만 1887년 12월에 베이징 조약으로 포르투갈은 마카오와 부속지역을 영구히 포르투갈이 점유하게 된다. 이때부터 식민통치가 이뤄지게 된다.

1951년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해외주(州)로 재편되어 본국 정부가 임명하는 총독의 통치를 받았으며 1973년 자치령이 됐다.

1974년 포르투갈에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나 독재정부가 무너진 후 새 정부가 마카오의 반환 용의를 처음으로 표명했다. 그 후 중국과 포르투갈 양국은 1979년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1987년 마카오 반환 협정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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