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화가야 유적지…창녕 계성 고분군 사적 지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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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화가야 유적지…창녕 계성 고분군 사적 지정된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8.12.08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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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세기 창녕 지역 가야 성립ㆍ발전ㆍ쇠퇴를 보여주는 대규모 무덤군

 

「삼국유사」 오가야(五伽耶) 조에서 일연은 고려시대 사략(史略)을 인용해 5가야의 하나로 비화(非火)가야를 들고, "지금의 창녕인데 아마도 고령(高靈)의 잘못인 듯 싶다"고 주를 달았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비화가야(非火伽耶)의 정확한 위치가 비정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에도 비자벌(比子伐)이라는 지명이 나오고, 일본서기에도 비자발(比自鉢)이란 지명이 나온다.

대체로 비화가야, 비자벌, 비자발을 하나의 지명으로 본다. 학계에서는 비화가야의 위치를 경남 창녕으로 본다.

대다수의 가야 소국들이 낙동강 서쪽에 위치하지만, 비화가야는 낙동강 동쪽에 위치한 것이 차이가 난다. 비화가야는 진흥황 시절에 신라에 귀속된다. 진흥왕의 창녕비가 이를 입증한다.

 

▲ 창녕 계성고분군 발굴현장 전경 - 3호분 /문화재청

 

고대에 패망한 나라의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무덤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그 무덤의 주인공들은 아마 그 지역의 왕족 또는 귀족 등 지배계급이었을 것이다.

창녕 계성에는 영축산 서쪽으로 뻗어내린 구릉 사면부에 261기의 봉분이 조성되어 있다. 후대인들은 이들이 비화가야의 주인공들이라고 본다.

고분군의 서북쪽으로는 계성천이 흐르고 능선 여러 갈래에 봉분들이 분포하고 있다. 정상부에는 지름 30m가 넘는 대형무덤 5기가 있는데 1917년 처음으로 고분군의 분포도가 작성되었다.

무덤의 주인이 누군지 알 길이 없다. 다만 그 무덤에는 주인들이 쓰던 물건이 남아 있다. 토기들도 온전하다. 그것으로 먹고 마시고 하며 자그마한 영토를 꾸리다가 망한 것이다. 후대인들은 옛선인들의 유물을 보존해야 한다. 우리의 조상의 숨결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 창녕 계성고분 1호분 출토 토기 /문화재청

 

문화재청은 경상남도 창녕군에 있는 창녕 계성(桂城) 고분군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 예고했다.

1967년 5호분, 1968년 1호분‧4호분, 2013년~2015년 2호분‧3호분, 2017년 156호분, 2018년 2-3~5호분 등 5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했다.

조사 결과, 창녕 계성 고분군은 5~7세기에 걸쳐 조성되었는데, 5세기에 축조된 구덩식 돌덧널무덤(수혈식 석곽)인 대형 고총 고분과 6~7세기에 축조된 앞트기식 돌방무덤(횡구식 석실)이 모두 확인되었다. 이러한 축조 양식의 변화는 고분군의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이동하며 나타나며, 창녕 지역에서의 가야의 성립, 발전과 쇠퇴 과정을 보여준다.

구덩식 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의 돌곽 상부는 나무로 덮개를 만든 특징을 확인했다. 아울러 뚜껑굽다리접시(유개고배, 有蓋高杯)와 긴목항아리(장경호, 長頸壺), 원통모양그릇받침(통형기대, 筒形器臺) 등 창녕양식 토기류, 금동관 조각(편), 금제 귀걸이, 은제 허리띠 등의 장신구류를 발견하였다. 또한, 말띠드리개(행엽, 杏葉), 발걸이(등자, 鐙子), 말안장 꾸미개(안교, 鞍橋) 등의 마구류와 무구류도 다량 출토되었다.

창녕 계성 고분군은 고분의 변화 양상과 출토 토기 양식 등을 통해 창녕과 주변 지역의 5~7세기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문화재청은 30일간의 예고를 통해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사적 지정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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