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오늘] ‘3일 천하’, 그후 김옥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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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오늘] ‘3일 천하’, 그후 김옥균은?
  • 김인영 에디터
  • 승인 2018.12.03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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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도피 끝에 청나라와 손잡고 귀국하려다 상하이서 홍종우에 피격

 

1884년(고종 21년) 12월 4일, 김옥균(金玉均)을 중심으로 하는 급진개화파가 개화사상을 근본으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다. 갑신정변은 교과서에서도 상세하게 나와 있으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다만 주동자 김옥균(1851년~1894)은 정변 실패후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아보자.

혁명가 김옥균에게 가장 영향을 준 인물은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였다.

후쿠자와는 일본 메이지(明治) 시대에 계몽사상가로, 봉건 타파와 서구문명 도입을 주장했고, 일본이 근대로 나아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일본 지폐 1만엔에 그려질 정도로 근대화의 주요한 인물이다.

김옥균은 갑신정변 이전에 세 번 일본에 건너갔는데, 수신사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처음 일본에 갔을 때 후쿠자와를 만났다. 김옥균과 후쿠자와는 만남은 개화승 이동인을 통해서였다고 한다.

 

▲ 서울 종로구 견지동 소재 우정총국 /문화재청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김옥균은 함께 정변을 모의한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일본 공사와 함께 일본으로 도망치기로 마음을 먹었다. 조선에 있으면 사형될 게 분명했다. 일단 살아서 대의를 다시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 김옥균

일본 공사관에서 불안하게 하룻밤을 보낸후 김옥균은 일본 공사와 함께 제물포(인천)로 도주했다. 그곳에서 한달에 한번 들어오는 정기연락선 치토세마루(千歲丸)를 타기 위해서였다. 일본 선원은 그의 승선을 거부했다. 하지만 일본인 선장이 몰래 태워 선창에 숨겨주었다.

김옥균은 이틀후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했다.

나가사키에 잠시 머문후 김옥균은 도쿄로 가서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났다. 후쿠자와는 그의 신변을 돌보아 주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반역자 김옥균과 다른 망명자들을 송환하라고 일본에 요구했다. 일본은 범인인도협정이 체결되어 있지 않아 자국 법에 어긋난다며 조선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럼에도 조선 조정은 대신을 보내 김옥균의 송환을 요구하는 공문을 일본에 보냈다.

김옥균은 도쿄에서 요코하마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조선 정부의 송환 요구에 악몽과 같은 나날을 보내며, 한때 미국으로 망명할 것을 마음 먹기도 했다. 1885년 4월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등 정변 동지들은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는데, 김옥균은 이런저런 이유로 끝내 도미하지 못했다.

일본 정부에 의해 번번히 송환요청이 거절되자 조선 조정은 김옥균의 암살을 시도했다. 1885년 6월 장은규(가명 장갑복)와 송병준이 김옥균 암살에 자원했다. 이들은 김옥균과 안면이 있던 인물이었는데, 김옥균을 암살하면 큰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민씨들의 약속을 받았다. 이들은 일본으로 가 김옥균에게 만나자고 제안했지만, 김옥균은 이들을 의심해 만남을 거절했다.

1886년엔 2차 암살단을 보냈다. 종두법을 보급한 지석영의 형인 지운영이란 인물이 암살자로 선발되었는데, 그도 김옥균과 안면이 있었다. 지운영도 김옥균에게 면담을 신청했지만, 역시나 김옥균은 만나 주질 않았다. 오히려 지운영은 김옥균의 지인들에 의해 고종의 신임장과 암살무기가 탈취당하기까지 했다. 지운영은 김옥균 암살에 실패한후 조선으로 돌아가 유배당했다.

일본 정부도 이젠 김옥균이 귀찮아 졌다. 조선 조정이 끊임없이 송환을 요청한데다 두차례나 암살단을 파견하고, 청나라도 일본에 압력을 가해왔다. 일본 내무성과 외무성은 이런 반발을 삭히는 방법으로 김옥균을 태평양 한가운데 고도(孤島)인 오가사와라 제도로 유배를 보내기로 했다.

1886년 8월 9일 김옥균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오가사와라 제도로 떠났다. 그곳은 일본 영토가 된지 10년밖에 되지 않았고, 도쿄로 오가는 정기연락선도 1년에 네 번밖에 다니지 않는 오지였다.

김옥균의 오가사와라 유배는 고독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세월이었다. 한겨울 평균기온이 영상 17도였고, 각종 질병이 닥쳐왔다.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한문도 가르치기도 했지만, 고독과의 싸움에 지쳐 본토로 보내달라고 일본 정부에 청원을 넣었다.

1888년 7월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오가사와라 제도에서 빼내 홋카이도 삿포로로 이송시켰다.

일본정부는 1889년 2월 홋카이도 내에서 이동의 자유를 허락했으며, 1899년 10월에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었다.

김옥균은 도쿄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김옥균을 놓아주지 않았다. 세 번째 자객이 파견되었다. 이 자객단에 우리나라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으로 알려진 홍종우가 가담했다.

김옥균도 피신 5년쯤 되니 긴장이 풀어진 것 같다. 프랑스에서 왔다는 호기심에 김옥균은 홍종우를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해 받아들였다. 홍종우도 개화파 홍영식으로 인해 피해를 보았다며 김옥균에 다가갔다.

 

▲ 김옥균의 이동로 /김현민

 

1894년 김옥균은 또다시 일생일대의 도박을 한다. 그는 10년전 갑신정변때 적이었던 청(淸)나라와 제휴를 시도한다.

청나라 입장에서는 고종이 고분고분하지 않고 속국으로서의 지위를 벗어나 독자노선을 취하려 하는 것을 마땅치 않아 했다. 김윤식 등 친청파 인사들이 내각에서 제거된 것도 청나라의 불만이었다. 적의 적은 동지가 될수 있다. 청나라는 고종의 적인 김옥균을 받아 들일 필요가 있었고, 김옥균도 청나라의 호의에 솔깃했다. 청의 후원으로 귀국해 정권을 장악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옥균은 청나라 실세인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의 양아들 리진펑(李經芳)으로부터 상하이 초대를 받았다. 김옥균은 상하이로 가서 리홍장을 만날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김옥균의 일본인 사부격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너무 위험하다며 만류했다. 또다른 일본인 후원자도 함정일 것이라고 말렸다. 하지만 김옥균은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다. 실오라기처럼 가느다란 희망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1894년 3월 24일 김옥균은 일본인 하인 겸 경호원인 와다 겐지로, 그의 벗인 척하는 홍종우와 함께 상하이행 배에 몸을 싣고 고베항을 떠났다. 3월 27일 이들은 상하이 일본 조계지에 도착해 동화양행(東和洋行)에 머물렀다.

3월 29일, 그날은 평온했다. 그날 오후 김옥균은 조용히 ‘자치통감’을 읽고 있다고 한다. 오수 4시 김옥균을 경호하던 와다가 잠시 심부름을 나간 사이, 홍종우가 권총을 꺼내들고 김옥균의 방으로 들어왔다. 홍종우는 세발을 쏘았다. 첫 번째 탄환은 빗나갔고, 두 번째는 왼쪽 어깨를 관통했고, 세 번째는 뇌를 관통했다. 김옥균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때 나이가 43세였다.

김옥균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조선과 청나라, 일본 사이에 시신 쟁탈전이 벌어졌다. 결국 조선의 강력한 주장에 김옥균의 시신은 제물포항으로 입항한다. 그의 시신은 대역죄인은 능지처참한다는 대명률 ‘모반의 죄’를 적용해 의금부 도사가 입회한 가운데 마포 양화진에서 부관참시 당했다.

그가 죽고 이듬해 갑오개혁으로 친일정부인 개화파정부가 수립되었다. 김옥균은 법부대신 서광범과 총리대신 김홍집의 상소에 의해 죄가 사면, 복권되었고, 1910년에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달(忠達)이다.

 

▲ 충남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소재 김옥균 유허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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