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오늘] 한국 국가부도의 날…IMF 양해각서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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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오늘] 한국 국가부도의 날…IMF 양해각서 체결
  • 김인영 에디터
  • 승인 2018.12.02 14: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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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억 달러 지원금에 서명…한국경제, 가혹한 IMF 관리체제 시작

 

▲ 영화 '국가부도의 날' /네이버영화

김혜수, 유아인 주연의 ‘국가부도의 날’ 영화가 상영중이다. 아직 보지는 않았다. 21년전 뼈아픈 IMF 금융위기를 되돌아보는 영화라고 한다.

1997년 12월 3일 임창렬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이 세종로 청사에서 미셸 캉드쉬 (Michel Camdessus) IMF 총재에게 IMF 긴급 자금지원을 받기 위한 의향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채무국으로서 IMF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앞서 그해 11월 19일 강경식 부총리는 금융개혁법안 유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임창렬 부총리가 들어섰다. 임창렬씨는 1980년대에 IMF에 파견된 경험이 있지만, 외신들은 그를 ‘고집스런 민족주의자’로 묘사했다.

그의 취임 일성은 IMF로 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대신에 일본과 미국에서 직접 돈을 빌려 외환 위기를 극복하겠다고 주장했다. 임 부총리는 “한국 위기가 확산되면 미국, 일본도 위태롭다”며 미국과 일본을 압박했다. 그리고 재경원은 한국은행이 IMF가 요구하는 자료를 주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 정부의 주장에 코웃음쳤다. 미국 재무부는 IMF를 통하지 않으면 지원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 무렵 루빈 미 재무 장관은 시카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문제(한국 지원)에 접근하는 올바른 방법은 IMF를 통하는 길이다. 혹자는 IMF를 통한 지원은 미국이 리더십을 양보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지만, 미국은 IMF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는 의회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직접 개입을 피하고 IMF를 통한 방식을 선택했다. 미국은 일본이 단독으로 한국을 지원하는 것에 대해서도 음으로 양으로 저지했다. 한국은 IMF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제 금융계에서는 한국이 IMF 사상 최대의 금액을 지원 받을 것이며, 그 액수가 500~1,0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정부는 2.25%이던 환율 밴드를 10%로 확대하고, 국책은행 또는 정부의 채권을 해외시장에 발행해 외화를 조달하겠다는 내용의 금융안정화 대책을 발표했지만, 국제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이렇게 썼다.

“한국은 투자자들과 예금자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IMF 구제금융을 통해 은행을 조속히 안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이 (구제금융 요청을) 너무 지체하거나 경제가 침몰할 경우 그 영향이 다른 나라에까지 파급될 것이다. 최근 태국, 홍콩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금융혼란은 외부 지역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으나, 세계 경제 11위권인 한국의 위기는 이미 일본과 다른 나라에까지 그 영향이 파급되고 있다. 멕시코와는 달리 아시아 위기는 무모한 통화정책이라기보다는 민간부문의 문제가 있음을 반영하고 있으며, 따라서 재정지출 감소나 긴축통화 정책만으로 효과를 거둘 수 없다.”

11월 21일 한국 정부는 마침내 IMF에 손을 내밀었다. 임 부총리는 200억 달러 정도의 자금을 IMF에 요청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국제 사회에서는 이를 믿지 않았다. 적어도 한국 정부가 요청한 금액의 3배인 600억 달러는 필요하다는 것이 국제금융시장의 시각이었다.

사실 IMF도 한국의 위기를 예상하지 못했다. IMF는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경제가 극심하게 흔들리자 그해 10월 7명의 조사단을 한국에 보냈다. 당시 한국 외환보유의 수위는 가라앉고 있었지만, IMF 조사단은 그것을 지적하지 못했다. 그들은 “한국이 스스로의 문제를 ‘즉각’(promptly) 해결해야 한다”고 권고했을 뿐 ‘긴급하게’(urgently) 수습하라고 경고하지 못했다. 나이스 단장도 나중에 “그 팀이 한국 경제의 허약함을 지적하지 못했고, 긴급행동을 요구하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한국이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자, 미국의 언론들은 한국 관련 뉴스를 퍼부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 성장으로 주목을 받던 한국이 자존심을 희생하며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한국이 IMF의 지원이 필요했는데도 체면 때문에 이를 거부했었다.”

미국 언론들은 한국인들이 자존심, 체면을 꺾고 IMF로 갔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그 자존심은 무엇이었던가. 외국 딜러들이 한국의 외환보유액을 의심할 때 정부당국자나 한국 은행 관계자 누구 하나 국제금융시장에 「국가 IR」을 거의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개념조차 몰랐다. 월가의 전문가들은 멕시코와 태국의 위기에서 정부가 경제 상황을 정확하게 제시했더라면 패닉을 피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 한국의 경제위기를 보도한 비즈니스위크 커버(1997. 11. 24일자) /비즈니스 위크

 

IMF와 한국 정부간 협상이 시작됐다. 미국 언론들이 임창렬 부총리를 ‘터프 가이’라고 표현했지만, IMF 당사자들로선 다루기 힘든 존재였다. 그는 캉드시 총재의 이름을 발음기호대로 「캄드수스」(Camdessus를 발음기호대로 읽을 경우)라고 부르며 샅바싸움을 시작했다. 아무리 나라가 부도가 나 도움을 요청하기로서니 주권국가의 체면을 유지해야 했다.

IMF측 실무협상은 오스트리아 출신인 나이스 국장이 맡았다. 실무진의 협상이 마무리돼 가고 있던 12월초 캉드시 총재가 서울공항에 내렸다.

당시 상황을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렇게 정리했다.

“캉드시는 공항에 내리자마자 재경원 차관보(당시 정덕구)로부터 자신의 일정을 넘겨받았다.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45분간의 최종 협상을 마무리한 다음, 청와대를 방문, 서명식을 하도록 일정이 짜여져 있었다. 그는 일정이 너무 빡빡하다는 이유로 몇 가지 일정을 취소했다. 그랬더니 협상이 실패한 줄 알고 한국 금융시장이 흔들렸다. 그는 (실무진이 합의한 것보다) 더 많은 개방을 한국이 양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캉드시는 자신이 메모로 넘겨준 요구사항이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구제금융은 없다며 강하게 나왔다.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를 역임한 그는 국제 시장의 논리를 잘 이해했지만, 따듯한 가슴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일정을 하루 전에 보내주어야지 공항에서 일정을 주고, 이리저리 몰고 다니는 것이 무척 불쾌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임 부총리는 캉드시의 방한은 의례적인 방문으로 알고 있었으며, 일정은 하루 전에 팩스로 보내주었다고 밝혔다.

상황이 어쨌든 캉드시의 분노는 시장을 뒤흔들었다. 국제 시장에선 한국과 IMF와 한국의 협상이 깨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결국 한국 정부는 수백억 달러의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역사상 처음으로 은행을 폐쇄할 것을 약속했고, 외국인 투자자들이 은행을 소유할 수 있도록 양보해야 했다. 한국 정부의 양보에 IMF도 한발 물러섰다. IMF는 외국인들이 한국 기업을 인수할 때 ‘우호적’(friendly)인 경우에 한해 개방하고, ‘적대적’(hostile) 인수는 허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일본의 지배를 받은 한국인들의 마음을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외자 유치를 위해 나중에 IMF 협약과는 별도로 「적대적 인수」마저 허용했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 타결이 늦어질 때 루빈 미 재무장관이 몇 차례나 임 부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타결을 종용했다.

재벌의 문제도 협상테이블에 올랐다. 미국과 유럽측 요원들은 한국 재벌의 설비 과잉으로 국제 시장 가격을 하락시키고 있는 자동차, 반도체 산업에 대한 감산 문제까지 접근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IMF는 이 문제에 관한 한 합의문에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지만, 정부의 보조금 지원을 제한했다.

또다른 협상 과제는 금융기관 폐쇄였다. 한국은 금융기관을 폐쇄해본 역사가 없다. IMF는 부실 은행을 폐쇄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한국 재경원은 종금사 1개를 폐쇄하겠다고 밝혔으나, IMF 협상팀은 이것으로 안된다고 주장했다.

당시 IMF 협상팀에는 미국 은행 감독당국에서 일하다 은퇴한 윌리엄 알브레히트(William Albrecht)라는 요원이 있었다. 알브레히트씨는 힐튼 호텔에서 한국 금융기관의 경영 내역을 검토한 결과 12개 이상의 종금사가 지급불능 상태에 있다고 진단했다. 재경원도 마침내 알브레히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한국 정부는 30개 종금사중 우선 9개를 영업정지시키고 얼마 안가 5개를 영업정지시켰다.

캉드시의 마지막 요구는 차기대통령 후보들에게 IMF와의 협정을 이행하도록 약속을 받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이에 반대했다. 자신의 재임기간에 발생한 일을 다음 대통령에 짐을 지울 수 없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캉드시는 “IMF 패키지가 선거일 이후에도 지속된다는 것은 세상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라며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나라가 빚더미에 몰려 파산직전에 있는데 누군들 버티겠는가. 차기대통령으로 유력시되는 세 후보 모두 캉드시의 요구에 응해 IMF 협정을 준수할 것임을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월 3일 IMF와 한국 정부는 협약에 서명했다. 총 지원금은 550억 달러. 이중 IMF가 210억 달러를 지원하고, 세계 은행 100억 달러, 아시아개발은행(ADB) 40억 달러, 기타 미국, 일본 등 제2선 지원금 200억 달러였다. ‘제2선 지원금’이란 IMF, 세계은행등 공공 자금 지원이 끝나고 나서도 위기가 심화될 때 지원하는 금액을 말한다. 350억 달러로 일단 한국 위기가 진정되면 미국은 한국에 돈을 빌려주지 않아도 된다. 그나마 제2선 지원금중 일본이 100억 달러로 가장 많이 배당받았고, 미국은 이의 절반인 50억 달러, 다른 나라들이 50억 달러였다. 미국은 IMF의 배후에서 사사건건 간섭하면서 돈 내는 문제에서는 아주 인색했다.

미국 재무부는 의회의 반대를 피하기 위해 50억 달러를 '외국환 안정화 기금'(ESF: Exchange Stabilization Fund)에서 조달할 생각이었다. 이 기금은 지난 1930년에 창설된 것으로, 재무부가 달러가치 안정을 위해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고 행정부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다. 미 재무부는 인도네시아에도 이미 이 기금에서 30억 달러를 지원키로 한바 있다.

IMF의 한국 지원금은 사상 최대 규모였다. 태국 170억 달러, 인도네시아 180억 달러를 합친 규모보다 크고, 1995년 멕시코에 대한 530억 달러보다 많다. 한국에 대한 IMF의 자금 지원은 국제적인 논란을 낳았고, 미국 내에서는 의회가 IMF 지원법안을 보류하는 결정적 동기를 제공했다.

그러나 IMF 패키지는 한국에 돈만 빌려주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다. 외국인이 한국 금융기관을 인수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정리해고를 인정하며, 관치금융은 금지됐다. 정부가 부실 금융기관을 합병 또는 폐쇄하도록 조치해야 하며, 경제 성장률과 긴축 예산이 강요됐다.

IMF 처방은 어물쩍 넘어갈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루빈 미 재무장관은 IMF 합의가 이뤄지자 마자, "중요한 것은 약속 이행"이라고 못밖았다. 만일 중도에 약속을 파기해버리면 IMF는 즉각 자금 지원을 중단해 버린다. 1998년에 인도네시아와 러시아가 IMF 조건 이행에 반기를 든 일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비참했다.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 대통령이 물러났고, 러시아에서도 외국 자금이 대거 이탈, 금융공황에 빠졌다.

한국 정부는 꼼짝할 수 없이 IMF라는 채권자의 감독 하에 거시정책을 꾸려나갈 수밖에 없게 됐다. 군사 작전권은 한미 연합사에 위임한 상태에서 경제정책마저 IMF에 넘겨주었으니, 한국은 과연 진정한 독립국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국 정부와 국민은 IMF의 시련을 이겨내야 할 의무가 있었다.

 

▲ 외환위기 당시 금모으기 운동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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