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0 오늘] 소련이 핀란드에 쩔쩔 맨 겨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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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오늘] 소련이 핀란드에 쩔쩔 맨 겨울전쟁
  • 김인영 에디터
  • 승인 2018.11.29 20: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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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영토 뺏기 위해 일방적 침공…핀란드 게릴라부대에 고전

 

핀란드측 사망자 2만5,000여명, 소련군 사망자 12만6,000~16만8,000명.

핀란드 부상자 4만3,000명, 소련군 부상자 18만~20만명.

사망자(실종자 포함)나 부상자 규모를 보면 이 전쟁은 핀란드가 이긴 전쟁이다. 하지만 핀란드에게 이 전쟁은 남부와 서부, 북부의 영토를 내주고, 섬 몇 개를 넘겨줘야 하는 굴욕적인 전쟁이었다.

1939년 11월 30일, 소련군의 일방적인 핀란드 침공으로 겨울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이듬해 3월 12일 모스크바 조약으로 종전될 때까지 105일 동안 혹독한 겨울 내내 치러진 전쟁이었기에 ‘겨울전쟁’(Winter War)이라고 불린다.

소련은 핀란드의 영토와 재산을 일부 빼앗았지만, 대국으로서의 체면을 구겼다. 작고 힘없는 나라라고 여겼던 핀란드의 응전 능력은 대단했고, 소련군은 덩치만 컸지 여러 전투에서 쩔쩔 매기만 했다.

전쟁은 오래가지 못했다. 종전을 원하는 것은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핀란드는 3개월여 전투에서 기력을 다했고, 소련도 독일과의 회전을 위해 북부 전선에서 손을 뗄 필요성이 있었다.

 

전쟁은 소련의 일방적 요구로 시작되었다. 1939년 10월 소련 외무상 뱌체슬라프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가 핀란드를 방문해 일방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협정체결을 요구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영토욕을 반영한 조건이었다.

그 조항은 ① 국경지대인 카렐리아(Karelia), 라플란드(Lappland)를 포함해 2,300㎢의 영토 할양 ②수리사르(Surisar), 코틀린(Kotllin) 등 4개 섬과 올란드 제도 할양이었다. 한마디로 전쟁을 피하려면 땅을 내놓으라는 주장이었다.

몰로토프는 핀란드가 당연히 거부할 조건을 제시하면서 "이제 내 역할은 끝났소. 나머지는 붉은 군대가 말할 것이오."라고 협박하며 돌아갔다.

소련은 핀란드를 만만히 보았다. 군대로 위협하면 땅을 내놓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핀란드는 몰로토프가 돌아가지 바로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 흰색 군복을 입고 눈 속 진지에서 중화기를 조준하고 있는 핀란드군 /위키피디아

 

11월 30일 소련군은 헬싱키를 비롯해 핀란드 대도시 21곳을 폭격하며 지상군을 투입했다.

당시 핀란드군은 보병 약 33만7,000–34만6,500명, 전차 33대, 항공기 110여대였고, 소련군은 보병 약 46만명, 전차 3,200여대, 항공기 3,800여대였다. 군사력에선 소련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핀란드군의 저항은 격렬했다. 핀란드군은 현지 지형지물에 익숙했고, 주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갈등 관계였던 핀란드 공산당이 조국 방위에 나섰다. 좌파와 우파의 갈등이 해소되었고, 언어적 파벌 대립관계도 풀어졌다. 미국에 이민 갔던 핀란드인도 조국 방위를 위해 돌아왔다. 서유럽에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의용군이 자진해서 핀란드 편에 섰다.

핀란드인들은 소련의 막강한 공군력과 탱크에 맞서기 위해 효과적인 게릴라 전술을 채택했다.

흰 군복을 입은 스키부대는 설원을 기동력 있게 이동하며 소련군을 괴롭혔다. 스페인 내전에서 사용되었던 화염병도 활용했다. 핀란드인들은 화염병을 몰로토프 칵테일이라고 불렀다. 소련군이 개전 초기에 헬싱키 도심에 무차별 소이탄을 투하하자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이 쏟아졌는데, 당시 몰로토프 소련 외무상은 “우리는 원조용 빵을 투하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핀란드인들은 몰로토프에게 복수하기 위해 화염병을 던지며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영하 40도 이하가 보통이었으며, 같은 겨울나라인 소련군도 이 추위에는 버티기 힘들었다. 추위에는 핀란드인이 더 강했다.

소련군의 무능도 드러났다. 스탈린의 숙청에서 살아남은 지휘관들은 상부의 명령에는 절대 복종했지만, 변화하는 전술 상황에 미숙하게 대처했다. 12월 7일 소비에트 보명 163사단은 핀란드군의 매복에 걸려들었다. 1만6,000여명의 소련군은 3,000여명의 핀란드 스키부대의 기습공격에 포위되어 절반 가까이 사망했다. 소련군 탱크, 트럭, 대포가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했고, 시체들이 눈밭에 뒹굴었다.

 

▲ 핀란드군 매복 포위작전에 나뒹구는 소련군 시체와 전투장비들 /위키피디아

 

핀란드군에겐 장비와 무기가 절대 부족했다. 정규군 이외에는 군복도 배급받지 못했고, 소총도 자신의 것을 가져와야 했다. 해를 넘기면서 핀란드 군에 탄환이 바닥을 드러냈다. 이웃 스웨덴은 말로만 도와준다 하면서 차일피일했고, 영국과 프랑스군의 지원도 시원치 않았다.

1940년 이웃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프 5세는 핀란드에 정규균 지원을 공식적으로 거부했다. 2월, 소련군은 핀란드의 마지노선 격인 만네르헤임 선이 소련군에 의해 무너졌다. 핀란드는 협성을 선택했다. 소련도 전쟁이 장기화하길 바라지 않았다.

2월 29일 양측은 협상에 들어갔다. 1940년 3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소련 외무상 몰로토프와 핀란드 총리 리스토 리티(Risto Ryti)는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 겨울전쟁에서 핀란드가 러시아에 빼앗긴 영토 /위키피디아

 

평화의 조건은 가혹했다.

이 강화조약에서 핀란드는 국토 중동부의 살라(Salla)와 인구의 12퍼센트에 해당되는 42만 명이 살고 있는 산업중심지 카렐리야(Karelia)를 소련에 빼앗겼다. 또 북부 바렌츠 해(Barents Sea)에 접한 칼라스타얀사렌토(Kalastajansaarento) 반도와 핀란드 만에 산재한 여러 섬들도 내주었다.

곧이어 2차 대전이 발발하자 핀란드는 소련에 대한 치욕감에 독일 편에 붙었다. 그리고 이번엔 빼앗긴 영토를 찾기 위해 소련을 침공했다. 1941년 6월 25일에 재개되어 1944년 9월 19일까지 이어진 이 전쟁을 계속전쟁(Continuation War)이라고 부른다.

핀란드는 계속전쟁에서 잃었던 땅을 일시적으로 수복했지만,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연합국 측으로 돌아섰다. 소련이 연합국 일원이었으니, 당연히 계속전쟁도 중단해야 했고, 수복했던 땅도 돌려주었다.

아직도 핀란드는 겨울전쟁에서 빼앗긴 땅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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