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8 오늘] 아들 머리 위의 사과를 쏜 빌헬름 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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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8 오늘] 아들 머리 위의 사과를 쏜 빌헬름 텔
  • 김인영 에디터
  • 승인 2018.11.17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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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건국의 전설…후에 희곡, 오페라로 전해지며 각색

 

유럽 중세 시기에 알프스 산맥 근처의 산악 마을들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직할지였다. 합스부르크가는 알프스 지역에 지배를 강화하면서 과중한 세금을 물리고, 주민들을 억압했다.

그러자 1291년 우리(Uri), 슈비츠(Schwyz), 운터발덴(Unterwalden)의 3개주가 연맹체를 구성했다는 것이 스위스 역사의 정설이다.

 

하지만 건국 기원은 어느 나라에서나 미화되고 윤색된다. 스위스 건국을 미화한 대표적인 인물이 추디(Aegidius Tschudi, 1505~1572)라는 역사가다. 그는 1570년에 쓴 저술에서 스위스 건국사를 정리했다.

이에 따르면, 1307년 11월 18일 합스부르크의 압제자 헤르만 게슬러(Hermann Gessler)는 빌헬름 텔(Wilhelm Tell)에게 아들의 머리에 사과를 놓고 그것을 활로 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합스부르크가는 스위스 우리(Uri) 주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면서 주민들을 억압했다. 지배자 헤르만 게슬러는 광장 보리수 밑에 창을 꽂아놓고, 자신의 모자를 걸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자에 절을 하도록 강요했다. 활쏘기의 명수였던 빌헬름 텔은 모자에 절을 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게슬러의 노여움을 산 것이다.

빌헬름 텔은 아들의 머리에 놓여진 사과를 명중했다. 그는 만일 화살이 명중하지 않을 경우 게슬러의 심장을 쏘기 위해 준비해 둔 화살이 발각되면서 체포된다. 성으로 끌려간 윌리엄 텔은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던 도중에 폭풍을 만났지만 배에 능숙한 그는 육지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그후 빌헬름 텔은 게슬러를 화살로 사살하면서 주민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부상한다.

 

▲ 빌헬름 텔이 활로 아들 머리위에 있는 사과를 쏘고 있는 그림(1554년 작) /위키피디아

 

볼프강 폰 괴테는 스위스를 여행하면서 이 전설을 듣게 된다. 괴테는 역사가 추디가 쓴 연대기를 가져와 희곡을 쓸 계획이었다. 괴테는 이 아이디어를 친구인 프리드리히 실러에게 주었다. 실러는 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희곡 ‘빌헬름 텔’을 쓰고, 1804년 3월 17일에 바이마르에서 초연되었다.

조아키노 로시니는 실러의 희곡에 기반해서 1829년에 오페라 ‘빌헬름 텔’을 작곡했다. 이 오페라에 쓰인 빌헬름 텔 서곡은 로시니의 대표작이다.

 

▲ 스위스 우리주 알트도르프에 있는 빌헬름 텔과 아들 동상 /위키피디아

 

이 전설은 스위스 연방의 기원이다. 스위스라는 나라 이름도 초기 3개주의 하나인 슈비츠 주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후 동맹 가입국이 점차 늘어났고, 1499년에는 슈바벤 전쟁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의 군대와 싸워 승리를 거두며 사실상 독립을 얻게 되었다. 처음 3개 주에서 시작된 연방은 1513년 13개 주로 늘어난다.

현재 스위스는 26개 주(칸톤)로 구성되어 있다.

 

▲ 스위스의 26개 칸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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