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2 오늘] 너무나 원칙주의자였던 트로츠키 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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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 오늘] 너무나 원칙주의자였던 트로츠키 실각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11.11 15:0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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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원칙 고수하다 레닌, 스탈린과 대립…멕시코에서 사망

 

1927년 11월 12일 소련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자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가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와 함께 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

이론적으로 트로츠키는 세계혁명주의를 주창하고,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은 일국사회주의를 내세웠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현실의 세계에서 러시아혁명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이 죽은 후 권력투쟁이 치열하게 벌여졌다. 결국 신흥세력인 스탈린파가 레닌 사후 3년만에 기득권 세력인 트로츠키파를 사상적 반동으로 몰아 내치고 권력을 잡은 것이다.

 

▲ 레온 트로츠키 /위키피디아

트로츠키는 1879년 우크라이나의 부유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 이름은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슈타인(Lev Davidovich Bronstein)이었다. 학생 시절에는 나로드니키(대학생들의 농민운동)에 참가하고, 곧이어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신봉자였다. 너무나 마르크스주의 원리에 충실하다 보니, 이론에 어긋나는 현실주의자들과 대치했다. 그래서 그는 소련 좌파들로부터는 기회주의자로, 종파주의자 또는 반동분자로 낙인찍혔고, 서방사회에서는 소련 공산독재에 저항한 인물로 부각되었다.

그는 죽음을 알고 쓴 유언장에서 이렇게 썼다.

“의식을 깬 이래 43년의 생애를 나는 혁명가로 살아왔다. 그 중 42년 동안은 마르크스주의의 깃발 아래 투쟁했다. 내가 다시 새로 시작할 수만 있다면 이런저런 실수들을 피하려고 노력할 것은 물론이지만, 내 인생의 큰 줄기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요, 마르크스주의자이며, 변증법적 유물론자다. 결국 나는 화해할 수 없는 무신론자로 죽을 것이다. …… 훗날의 세대들이 모든 악과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 삶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자!“

 

그는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였고, 유물론자였다. 그래서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에서 레닌과 대립했고, 스탈린의 적이 되었다.

19세이던 1898년 남부 노동자동맹을 조직하다가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형당했다가 1902년 탈출에 성공한다. 이때 감옥 간수의 이름을 따 트로츠키라는 가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탈출후 런던으로 망명해 레닌과 마르토프등 명명가들과 만났다. 처음에는 레닌과 호흡을 같이하지만, 곧이어 레닌의 냉혹한 노선에 실망해 멘셰비키에 가담하면서 레닌과 반목이 시작된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발하자 러시아로 돌아와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이 된다. 하지만 다시 체포되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던 중에 또 탈출한다. 이번엔 유럽과 미국을 전전하며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의 통합을 도모하나 실패한다.

 

그의 진면목은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나타난다.

1917년 2월 러시아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주도한 혁명이 일어나자, 트로츠키는 러시아로 귀국해 레닌과 손잡고 볼셰비키당에 입당하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된다. 이어 무장혁명을 주도하며 10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뒤 공산정부 외무장관이 된다.

백군 반란이 일어나자 트로츠키는 1918년 붉은 군대(赤軍)을 조직해 내전을 승리로 이끈다.

 

1924년 1월 21일, 러시아 혁명의 주역이자 소련의 1인자 레닌이 세상을 떠났다. 당내에 본격적인 권력투쟁이 전개되었다.

권력투쟁은 사상 투쟁의 형식으로 전개되었다. 트로츠키는 중공업 노선을 강조하며, 세계 공산주의 혁명을 동반한 영구혁명론을 주장했다. 이에 비해 스탈린은 경공업을 위주로 한 정책을 제시하고, 러시아만의 일국사회주의를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이론으로는 트로츠키의 주장이 맞다. 사회주의 혁명은 내부에서 끊임 없이 솟아나는 반혁명주의자들을 제거해야 하고, 따라서 혁명은 영구히 진행되어야 한다. 또 트로츠키의 세계혁명론도 세계 노동자들의 단결을 주장한 칼 마르크스의 이론과 일치한다. 그의 중공업우선주의는 후에 스탈린이 따르게 된다. 당시 소련의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은 트로츠키 이론을 지지했다.

하지만 러시아 인민들은 지쳤다. 혁명 이후 내란으로 5년이상 국토가 피폐해지고 동족간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진행되었다. 러시아만 혁명하고, 남의 나라 혁명은 그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날 때가지 기다려보자는 스탈린의 말이 대중적 지지를 얻게 된다.

 

스탈린파는 서서히 당내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트로츠키주의가 레닌의 사상에 적대적이라며 고립시켰다. 트로츠키는 마침내 1927년 11월 12일 그리고리 지노비예프(Grigory Zinoviev)와 함께 당에서 축출된다.

그는 1928년 1월 31일 소련 연방내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추방되었다가 1929년 2월 터키로 국외 추방되었다. 그때 트로츠키를 따라나선 사람은 두 번째 부인 나탈리아 세도바(Natalia Sedova)였다.

 

▲ 1940년 암살 직전, 트로츠키와 미국인 동지들이 멕시코에서 찍은 기념사진. /위키피디아

 

그후 그는 터키, 프랑스,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멕시코를 전전하며 스탈린의 탄압에 대항했다. 망명지에서 트로츠키는 자서전 ‘나의 인생’(My Life, 1930), ‘러시아 혁명사’(1931), ‘배반당한 혁명’(1939)을 연이어 발표했다. 특히 트로츠키의 최후의 저서 ‘배반당한 혁명’은 스탈린주의의 모순성을 폭로하는 것으로, 해외로 추방해 목숨만은 살려주려던 스탈린을 분노케 했다고 한다.

이후 스탈린의 대숙청 과정에서 트로츠키는 국내에 있던 가족과 측근들을 차례로 잃었고, 끊임없이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

1936년에 한차례 암살 미수사건을 겪은후 그는 1940년 멕시코로 망명했다. 멕시코에선 화가이자 공산주의자였던 프리다 칼로와 그녀의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의 도움으로 숨어 지냈다. 그러던 중 1940년 8월 21일에 트로츠키는 멕시코의 스탈린주의자 라몬 메르카데르에 의해 등산용 피켈에 머리를 찔려 살해당했다.

그는 죽음을 예감해 1940년 2월 27일에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는 멕시코시티 인근 코요아칸(Coyoacán)에 묻혀 있다.

▲ 1940년 트로츠키가 암살 직전에 살았던 멕시코 집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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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20-03-24 20:55:33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