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1 오늘] 사고불감증이 빚어낸 이리역 폭발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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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 오늘] 사고불감증이 빚어낸 이리역 폭발사고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11.10 17: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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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약 50톤 폭발…호송원의 도덕적 해이, 역무원의 원칙 무시등 원인

 

처음에는 북한군의 공습으로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 시각, TV에선 한국과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이 중계되고 있었다.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 15분, 전라북도 이리(裡里)시 호남선 이리역에서 대형 폭발사고가 났다.

이리역 구내에 대기하고 있던 1605호 화물열차에서 30톤의 고성능 폭탄이 폭발한 것이다. 열차에는 화약제조업체인 한국화약(한화의 전신)에서 제조된 다이너마이트 상자 914개(22톤), 초산암모니아 상자 200개(5톤), 초안 폭약 상자 100개(2톤), 뇌관상자 36개(1톤) 등 모두 1,250상자 30톤분이 실려 있었다.

이 폭탄을 실은 열치는 이틀전인 11월 9일 인천을 출발해 광주로 가던 중 11월 10일 이리역에 도착해 4번 입환대기선에 머물러 있었다.

폭발 사고 후 역 구내에는 깊이 15m, 직경 30m의 큰 웅덩이가 패였다. 역내에 있던 객차·화물열차·기관차 등 30여 량 남짓이 파손되었고 철로가 엿가락처럼 휘어져버렸다.

당시 집계한 인명피해는 사망자 59명, 중상자 185명, 경상자 1,158명 등으로 총 1,402명에 달한다. 피해 가옥 동수는 전파가 811동, 반파가 780동, 소파가 6,042동, 공공시설물을 포함한 재산피해 총액이 61억원에 달했다. 이로 인해 발생한 이재민 수만도 1,674세대 7,873명이나 되었다.

 

▲ 이리역 폭발사고 /자료사진

 

사고는 전적으로 사고불감증에 따른 인재였다.

한국화약의 호송원 신무일 씨는 화약류 등 위험물은 곧바로 통과시켜야 한다며 대기 지시를 내린 이리역 측에 항의를 제기했으나 이리역측은 이를 묵살했다.

신씨는 열차가 대기할 수밖에 없게 되자, 이리역 앞 식당에서 음주를 한 후 화약이 가득 든 열차에 들어갔다. 화물열차 내부가 어두워 그는 논산역에서 구입했다는 양초에 불을 붙여 화약상자에 세워 놓은 뒤 침낭 속에 몸을 묻고 잠에 빠져 들었는데 끄지 않은 촛불이 화약상자에 옮겨 붙어 대규모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직후 박정희 정부는 중앙재해대책본부를 구성해 재해 복구 활동을 벌였다. 정부는 천막촌을 건설해 이재민을 수용했고, 지역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새이리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사고가 발생하자 한국 화약의 현암 김종희 회장은 즉시 대국민 사과를 하였고 사재를 헌납해 피해 복구와 이재민들을 위해 사용했다.

이리시는 1995년 익산군과 통합하면서 군에게 이름을 빼앗기는 아픔을 겪었다. 대개 시와 군이 통합하면 시의 이름이 남는데, 이리시로 할 경우 사고가 연상된다는 주장에 밀려 익산시로 명칭을 바꿔야 했다. 이리역은 이듬해인 1978년 11월 신설되었지만, 시군 통합후 익산역으로 개명했다.

 

당시 최절정의 인기가수 화춘화가 이리역 앞 극장에서 공연을 하다 사고가 났는데, 함께 있던 코미디언 이주일이 화춘화를 업고 뛰어 사고현장에서 빠져 나왔다. 무명이었던 이주일은 이 일로 인해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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