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오늘] 프랑스의 굴욕…파쇼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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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오늘] 프랑스의 굴욕…파쇼다 사건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11.02 14: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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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압도적 화력으로 수단 마흐디군 격퇴하고 프랑스 밀어내

 

1898년 11월 3일, 지금의 수단 남부 코독(Kodok). 4개월전에 이 지역을 점령한 프랑스군은 영국군에 요새를 내주고 물러났다.

당시 이곳의 지명은 파쇼다(Fashoda)였고, 이 사건을 파쇼다 사건(Fashoda Incident)으로 부른다.

공식적으로는 프랑스가 아프리카 분할을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것처럼 물러났지만, 실제로는 피에 굶주린 영국군에 피해 도망간 것이다.

 

▲ 옴두르만 전투도 /위키피디아

 

이 사건에 앞서 두달전인 9월 2일 수단에서 옴두르만 전투(Battle of Omdurman)가 벌어졌다. 영국군 사령관은 허버트 키치너(Herbert Kitchener)였다.

▲ 허버트 키치너경 /위키피디아

14년전인 1885년 중국 태평천국의 난에서 청 황실을 도왔고, 그후 수단에 파견된 고든 장군이 수단의 급진이슬람 마흐디파에 의해 참수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고든은 명망있는 제국주의자였다. 영국이 치를 떨었다. 하지만 영국은 이 마흐디파를 복수하기 위해 14년을 기다렸다.

14년후 1898년 키치너는 영국군 8,200명과 이집트 병사 1만7,600명 등 도합 2만5천여명을 이끌고 마흐디주의자들이 건설한 신의 나라를 침공했다.

수단의 이슬람 무장세력은 영국의 도전에 응했다. 마흐디군의 병력수는 5만2,000명. 일단 숫적으로는 영국과 이집트 연합군의 2배를 넘었다.

9월 2일 수단 옴두르만 북쪽 11km 지점 케레리(Kerreri) 두 진영의 군대가 마주쳤다.

전투는 허무하게 끝났다. 반나절만에 수단군이 1만1,000명이 사망하고 마흐디는 항복했다. 영국측 사망자는 48명에 불과했다.

영국군은 최신 막심(Maxim) 기관총에 리엔필드(Lee-Enfield) 소총으로 무장했다. 수단군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화력의 격차가 보여주는 전쟁의 극치였다. 그야말로 인간사냥이었다. 목표물은 터번을 두른 이슬람이었다. 칼로 무장한 이슬람군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 전투에 젊은 윈스턴 처칠도 기병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 /위키피디아

 

키치너는 옴두르만 전투에서 승리한 후 병력의 일부를 빼내 남쪽 파쇼다로 향했다. 그곳엔 이미 프랑스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장 밥티스트 마르샹(Jean-Baptiste Marchand) 소령이 이끄는 프랑스군 150명은 1년전에 프랑스령 콩고의 브라지빌에서 길을 떠나 그해 1898년 7월 10일 파쇼다에 도달해 그곳을 프랑스 소유로 선포했다.

그 무렵 이집트에 주둔하던 영국군은 수단의 마흐디 신국에 막혀 남진의 시기를 늦추다가 옴두르만 전투에 성리한후 곧바로 남하했다. 이때 키치너가 9월 19일 파쇼다에 도착했다. 옴두르만을 피바다로 만든지 17일째 되는 날이었다.

키치너는 프랑스의 마르샹에게 파쇼다를 내놓으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전투를 불사하겠다고 겁을 주었다. 키치너가 이끄는 병력의 수는 1,500명으로 프랑스군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게다가 북쪽에는 보름여전에 혈전을 치른 영국과 이집트군이 2만명 이상 주둔하고 있었다.

전투를 벌여보아야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마르샹은 결전을 각오했으나, 프랑스 정부는 마르샹에게 철군을 지시했다. 마르샹은 본국 정부의 지시를 따른다는 이유로 11월 3일 퇴각했다.

 

▲ 영국 불독이 짖자 프랑스 푸들이 깨갱거리는 모습을 파쇼다 사건에 비유한 당시의 삽화 /위키피디아

 

당시 프랑스 정부는 드레퓌스 사건으로 곤경에 빠져 있었고,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과 연합할 필요성이 있었다. 굴욕적이지만 국가 이해를 위해 프랑스는 파쇼다에서 철군하고 수단을 내주고 말았다.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영국의 아프리카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이 충돌한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이는 회고하기를 좋아하는 역사학자들의 평가에 불과한 것이고, 당시 제국주의자들은 제멋대로 휘저으면서 다니다가 어느 지점에서 만나 땅 싸움을 벌이던 시절이다. 이 사건은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 분할을 놓고 충돌한 마지막 싸움이란 평가가 적절하다.

이로써 아프리카의 나일강은 영국의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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